[장석류의 예술로] 서울문화투데이 칼럼(2020.11.19)
언제부터인가 문화행정 분야에서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특히 여러 명이 함께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거버넌스가 필요합니다.”, “거버넌스를 해야 합니다.”라고 침 튀기며 소신있게 얘기하는 사람을 보면, 요즘 새로 들리는 메타버스(metaverse)도 헷갈리는데 저 사람이 얘기하고 싶은 거버넌스는 도대체 뭐지 싶어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심지어 “각자가 생각하는 거버넌스가 다르겠지만...”이라고 누군가 얘기하면, ‘내가 생각하는 거버넌스가 뭔지 나도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하기에는 타이밍이 애매하고, 괜히 고개만 끄덕거리며 분위기를 따라가는 사람도 많다.
거버넌스의 학문적 안방은 행정학이다. 행정학 전공자는 예술대 혹은 그나마 비슷한 학문적 정체성을 가진 경영대에 비해서도 소개팅 상대로 떠올려 볼 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전공이 뭐에요?”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오! 멋진걸”이라는 반응은 여간해서는 만나지 못한다. 특히 예술대학에서 행정학을 바라보았을 때, 고리타분하고 딱딱할 것이라는 편견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생각의 유연성이 낮아 보이는 행정학에서 조금은 세련되어 보이는 이미지를 가진 단어가 거버넌스다. 행정학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여러 학문 분야의 렌즈를 통해 진단된 것을 바탕으로 공적 영역에서 어떻게 처방할 것인지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현실 행정일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 행정학의 처방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병든 사회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이 사회문제 자체’가 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비대해지는 정부가 모든 사회문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오히려 병을 키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류 행정학에 대한 대안적 처방으로 거버넌스라는 개념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 또는 공공부문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새롭고 개혁적인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은 방법으로 거버넌스를 언급한다. 거버넌스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것은 1990년대 UN,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에서 비롯됐다. 공동의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간 칸막이를 걷어내고 협력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거버넌스라는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거대한 국제기구에서 조금은 좁게 현실 한국 문화행정으로 가보자. 두가지 요소가 교차하는 ‘지역+예술’, ‘예술+교육’, ‘예술인+사회안전망’ 등의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다고 해보자. 우선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해당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일 정부 기관이 명쾌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또한 중앙-광역-기초 행정으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선을 어떻게 연결해야 해당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에서도 머뭇거리게 된다. 게다가 행정이 문화를 만났을 때,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도 어렵다. 지역은 다양하고, 예술도 다양하고, 사회정책의 제도적 도구도 다양하다. 한 사례를 살펴보면 최근 ‘영화+교육’ 분야에서는 학생들이 영상 언어를 읽고 쓸 수 있는 기본적인 리터러시(literacy) 관점의 교육환경을 갖추는 부분에 관심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선수들이 등판해야 할까? 이 문제를 영화인들은 영화진흥위원회가 풀어주길 원하고, 교육을 진행하는 쪽에서는 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나 지역교육청에서 해결해주길 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문제해결에 접근해야 할지 난감해하며 자신의 성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다. 내 영역인 것도 같지만, 내 영역은 아닌 것이다. 대표끼리 플래카드 머리 위에 올려두고 악수하며 사진 한 방 찍고, 보도자료를 내는 MOU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좋은 공연 혹은 영화제작을 위해서는 기획, 작가, 연출, 음악감독, 미술감독 등 다양한 스텝과 배우들이 선택되어 모여진다.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각자가 협업이라는 전제를 잊지 않으면서 뜨겁게 갈등해 간다. 한 프로덕션의 과정에서 쌓여가는 뒷담화와 술병들은 내상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서로 성장하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 간다. 거버넌스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공연이나 영화 프로덕션과 비슷하다. 그래서 행정이 계층제 관료 시스템으로 실행하는 집합적 행동 처방에 비해 거버넌스적 처방은 창의력을 추가로 요구한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집합행동을 할 다양한 수평적 주체가 모인 프로덕션을 어떻게 꾸리고, 어떻게 협업하게 하고, 어떻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게 관리하는가, 이것이 거버넌스의 요체이다. 그래서 딱 떨어지게 정렬이 맞아야 하는 행정은 거버넌스를 만나면 울화통이 터지기도 한다.
어떤 예술은 혼자 할 수 있지만 어떤 예술은 혼자 할 수 없다. 어떤 사회문제는 하나의 조직 혹은 전문행정 중심으로 해결해볼 수 있지만, 많은 사회적 문제는 행정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전문 스텝이 모여 완성하는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프로덕션’, ‘뮤지컬 위키드 프로덕션’, ‘호두까기 인형 프로덕션’처럼, ‘서울+지역+문화 활성화 문제해결을 위한 거버넌스’, ‘영화+교육+사회적 가치 활성화를 위한 거버넌스’, ‘예술인+경력관리+사회안전망 기반 조성 거버넌스’ 등 문화예술 분야의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거버넌스 프로덕션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회문제 해결에 대한 갈증이 있는 누군가가 행정이 서 있는 ‘통곡의 벽’을 실감하며,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거버넌스를 해야한다.”고 침을 튀긴 것이다. 각자의 성에 들어앉아 있는 행정이 성 밖으로 나와야 ‘OOO 문제해결을 위한 거버넌스’ 프로덕션을 꾸릴 수 있다. 많은 문제는 너의 영역이면서 나의 영역인 문제들이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하는 작품의 수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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