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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Willow Aug 25. 2018

동물을 사랑하면 슬퍼지는 세상

아기말 '캐러멜'과의 만남




나는 동물을 참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동물들이 좋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이던가, 학교 앞 종이 상자 안에서 삐약삐약 거리던 병아리들을 보며 그 조그만 부리며 노랗고 보송보송한 몸이 너무 사랑스러워 몇 시간이고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던 장면이 동물에 대해 내가 애착을 느꼈던 첫 번째 기억이다. 빽빽한 잠실 아파트 단지에서 성장한 나에게 허락된 동물은 병아리, 새, 다람쥐와 같은 작은 애완동물들이었다. 희미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도 가장 또렷한 장면들은 그 귀엽고 사랑스럽던 작은 생명체를 바라보던 순간들이다. 40이 훨씬 넘은 지금도 동물원에 가면 아이들보다 내가 더 좋아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양한 동물들을 관찰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 중 하나도 야생의 침팬지들과 깊이 있게 교감했던 제인 구달 박사.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애초에 동물 관련 직업을 선택했어야 하는데 아쉬운 생각도 간혹 든다. 특히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동물들에게 내가 느끼는 감정은 뱃속에서 갓 나온 내 아이를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너무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꼭 내가 그들의 어미라도 된 듯 그들을 안아주고 보살펴주고 싶은 모성본능이 무럭무럭 샘솟으니 말이다. 12년 전, 손바닥만 하던 우리 집 반려견 곰순이를 처음 데려왔을 때 얼마나 내가 이 아이를 물고 빨고 했을지는 뭐 더 이상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지금도 나에게 가장 소중한 힐링의 시간은 곰순이의 그윽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그 아이의 몸을 쓰다듬어주는 순간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동물들에 대한 애정이 지나친 탓일까 동물들이 받는 고통에 대한 톨러런스가 지나치게 약하다. 어릴 적 학교 앞에서 사 왔던 두 마리 병아리들이 죽었을 때의 고통과 슬픔, 다람쥐와 새들이 차갑게 식어있던 모습을 바라보며 흘렸던 눈물은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서도 가장 세밀하고 아픈 감정의 기억이다. 어른이 되면서는 그 연민의 대상이 더 늘어났다. 세상에 고통받는 동물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면서이다. 인간에게 학대받는 동물들에 관한 기사 혹은 트윗을 보거나 관련 이야기를 들으면 내 마음은 언제나 무너져 내린다. 주인에게 고통당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개와 고양이들, 인간의 식량을 위해 무자비하게 대량 사육되는 소, 돼지, 닭들,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잔인하게 대량 살상되는 돌고래들…. 그들의 고통이 내 마음에 와서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보니 곰순이가 다니던 동물병원에 버려지고 아픈 동물들이 있으면 자주 그 아이들의 치료비나 수술비를 대곤 했었다. 지금은 일본에 오는 바람에 엄마 친구 집에서 보살피고 있지만, 당시 유기견으로 동물병원에 잠시 머물던 깜이를 입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년 전이었나, 집 근처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인부가 데리고 다니던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염증 주머니가 두 눈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걸 보고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불쌍해서 주인 허락을 받고 내가 대신 동물병원에 데려가 30만 원을 들여 수술을 시켜줬던 일도 있다. 길을 가다가 줄이 언제나 짧게 묶여있고 산책 따위는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개들을 볼 때면 내 마음은 한없이 우울하고 슬퍼진다. 그런 날은 곰순이 등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그 순한 눈을 바라보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속삭이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무기력감이 나를 자주 힘들게 한다.


심지어  작은 벌레들에도 이 감정은 상당히 민감하게 작용하는 편이다. 어렸을 때에는 개미를 밟아 죽이는 아이들에게 너무 화가 나서 마구 소리를 지르고, 배추나비 애벌레 몸에 나뭇가지를 쑤셔 넣던 아이들의 잔인한 장난에 울음을 터트렸던 기억도 있다. 그게 글쎄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여서, 3년간 세대에 걸쳐 키우던 장수풍뎅이들이 우리가 여행을 다녀온 새에 반 이상이 죽은걸 보고 며칠 내내 슬퍼서 울었다. 동물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동물을 사랑하고 그들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고작 동물보호단체에 매월 기부하는 정도, 그리고 한 달에 한번 보호소에서 자원봉사하는 정도라는 사실이 나는 늘 부끄럽다. 그들에 대한 내 무한한 사랑과 관심에 비례한다면 나는 동물보호 활동가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만약 이 세상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동물 학대와 그로 인한 그들의 고통을 내가 너무 자주 직접 경험해야 한다면,  나는 너무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워 울다가 우울증으로 죽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달리 도리가 없다.

 

오늘, 또 일이 벌어졌다.


며칠 전에 아이들이 승마체험을 하고 싶어 해서 머무는 곳에서 가까운 말 목장을 방문했다. 60대 후반의 부부 두 명이 운영하는, 산속 깊숙이 외진 곳에 위치한 이 목장에는 20여 마리의 말들이 지내고 있었다. 장거리 경주에 능숙한 아라비안 종으로 크기는 다른 종에 비해 좀 작은 편이고 성격이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아이들 승마체험이 끝나고 말들이 지내는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말들을 바라보고 얘기도 걸고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중 한 마리가 유난히 배가 부풀어 있길래 혹시나 물어보니 역시나 출산을 앞두고 있고 이제 오늘내일한다고. 그 아이에게 특별히 더 애정을 담아 말을 걸고 쓰다듬으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꼭 보러 가자고 아이들과 약속을 한 터라 다음날 확인차 전화를 해보니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그다음 날 오후, 그러니까 어제 아이들과 함께 당근을 잔뜩 들고 다시 목장을 방문했다. 지난번 뵀던 할머니는 출타 중이시고 할아버지가 혼자 말들을 돌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미말이 있는 마구간 한쪽에 새벽에 태어난 아기말이 우리를 반기는 것이 아닌가! 태어난 지 하루 반이 된 아기말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생명체였다. 반짝이는 순한 눈망울과 기다란 속눈썹, 짙은 갈색 몸과 길쭉한 다리. 이 어린 생명체의 완벽한 아름다움에 나는 감동하였고 첫눈에 이 아기말에게 반해버렸다. 함께 간 아이들도 마찬가지여서 그 아기말에게서 떠날 줄을 모른다.


태어난지 하루 반이 지난 아기말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어미는 저쪽 편에 아기와 분리되어 있었다. 주인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어미가 아기에게 젖을 주려 하지 않고 전혀 보살피려 하지 않아 아기의 안전을 위해 떼어놓았다고. 이제껏 세 번이나 출산의 경험을 했고 그때마다 알뜰이 살피고 젖을 주던 엄마였는데 이번엔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신다. 아기는 짚이 잔뜩 깔린 마구간에 덩그러니 누웠다가는 아직 걷는 게 익숙지 않은지 비틀비틀 일어나서 엄마 곁으로 다가가 한참을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는데 엄마는 과연 미동도 없고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다시 비틀거리며 누워서는 힘이 드는지 숨을 쌕쌕거리는데 얼굴 주변에 파리들이 어찌나 꼬이는지 안쓰럽기 그지없다.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손을 내미니 일어나서는 우리 곁으로 살며시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그 아이의 부드러운 얼굴이며 목덜미며 갈기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마치 더 만져달라는 듯 얼굴을 내 팔에 비비며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 사랑스러움과 애틋함에 마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기말은 엄마와의 접촉과 사랑을 본능적으로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쓰다듬어주고 말을 걸어주며 그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주인 할아버지가 아기말에게 먹인다고 우유를 가져왔다. 일반 우유를 물과 희석하여 데운 것이란다. 주둥이에 까만 고무 같은 것이 끼워져 있는데 아기 먹이려고 급조해서 만들었다고. 과연 이걸로 먹일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조잡해 보인다. 동물용 젖병 같은 게  없냐고 물으니 그런 것이 있느지도 모르시는 듯했다. 어쨌든 할아버지가 아기말에게 우유 먹이는걸 옆에서 도와주는데 역시나 이 아기말, 까만 고무를 빨 생각은 전혀 못한다. 엄마젖을 빠는걸 아직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인간의 아기도 마찬가지라 태어난 지 몇 시간 안에 엄마 젖을 빠는 경험을 못하면 모유수유 자체가 힘들어진다. 동물도 매한가지이지 않겠는가. 이번엔 사료통에다가 우유를 부어서 입 앞에 대 주었더니 입을 우유에 담그고 열심히 먹으려고는 하는 것 같은데 제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양이 얼마 되지 않는 듯하다. 얘가 우유를 마셔서 줄어든 건지 입으로 휘젓느라 우유를 바닥에 흘려서 줄어든 건지 분간이 안된다. 한동안 더 우유를 먹이려고 노력하던 할아버지는 이만하면 됐다고, 나중에 다시 먹이겠다고 하신다. 어련히 잘 알아서 하시겠거니 생각하며 그래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참을 더 아이들과 함께 아기말 곁에 머물렀다. 입 주변에 우유가 잔뜩 묻어 있어 이대로 두면 또 파리가 꼬일 것 같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더니 또 팔에 얼굴을 비벼댄다. 잠시 후에 더 서 있기 힘든지 비틀비틀 다시 바닥에 누웠다. 아이들은 갈색의 윤기 나는 몸을 가진 아기말에게 ‘캐러멜'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고. 할아버지에게 그래도 되냐고 여쭈니 허허 웃으시며 그러자고 하신다. 오후 다른 일정이 있어 우린 가져온 당근들을 다른 말들에게 서둘러 나눠주고, 내내 동상처럼 서있는 엄마말에게는 특별히 당근을 많이 주며 ‘많이 먹고 아기에게 젖 꼭 줘야 해 알았지?’ 당부를 하곤 목장을 떠났다.


스스럼없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제 몸을 맡기고 부비던 캐러멜


다음날 오후, 이번엔 양배추 한 덩이를 들고 남편까지 대동해 온 가족이 또다시 목장으로 향했다. 어제 만난 아기말이 보고 싶고 걱정도 되기도 해서 아이들보다 외려 내가 나서서 가보자고 했다. 목장 근처에서 어디론가 차를 몰고 외출하시는 주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목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학생들 승마체험 가이드를 하고 계셨다. 목장에 가서 놀고 있겠다고 말씀드리고 우리는 덜컹거리는 산길을 올라 목장에 도착했다. 부리나케 마구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제 있었던 자리에 아기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엄마말과 다른 말들은 그대로 있는데 말이다.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겼나 하고 마구간 안을 샅샅이 뒤지고, 바깥쪽 창고 등도 살펴봤는데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말들에게 가져온 양배추를 먹이며 할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말을 다 먹이고도 시간이 남아 목장에서 키우는 개 세 마리가 있는 곳에 가보았다. 우리가 올 때마다 늘 사납게 짖어대는 아이들인데 말에 늘 정신을 빼앗겨 그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역시 걱정했던 대로 줄은 짧고, 물은 바닥이 보이거나 더러워 보이고, 아이들의 건강상태는 썩 양호해 보이지 않는다. 다 홋카이도견의 잡종 같은데 한 아이는 귀 양쪽 끝이 상처투성이라 모기와 파리들이 상처 주변에 들끓고 있고, 어떤 아이는 이빨 몇 개가 반쯤 부러진 채 앞으로 노출되어 있고, 또 어떤 아이는 사료통에 똥이 들어 있다. 시골 노인들이 키우는 집지키는 목적의 개들은 대부분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 없이 지낸다는 것은 익히 경험으로 알고 있는지라 놀랄 것도 없지만, 마음이 더없이 아프고 우울해진다. 산책 가는 게 뭔지 모르는 이런 개들은 주인 말고 다른 사람들은 상당히 경계를 해서 곁을 주지도 않는다. 조금씩 거리를 좁혀 다가가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어느 이상 다가가니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며 짖어대어 더 이상 가까이 가기가 무섭다. 그저 멀찌감치 떨어져서 한숨을 쉬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마구간도 물도 더럽고 말들도 지저분하고 관리상태가 그다지 양호하지 않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이 곳 동물들의 안위가 걱정되며 마음이 어두워진다. 더 이상 할아버지를 기다리기는 힘들 것 같아 불편한 마음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데 이번엔 말 한 마리가 어디 속이 불편한지 누웠다 앉았다 하더니만 털썩 다시 누워서는 발을 버둥대며 괴로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깜짝 놀라고 걱정되었지만 말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저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목장 안에는 우리 가족 외에는 당시 아무도 없었고, 핸드폰은 불통이라 주인 부부에게 연락은 안 되니 말이다. 저렇게 커다란 동물이 이토록 괴로워한다면 필시 큰 병에 걸린 듯 싶어 걱정이 되었다. 우리 곰순이가 만약 저런 증상을 보인다면 분명 동물병원으로 달려갈만한 상황이니 말이다. 그러다가 좀 진정이 된 듯 누워서 숨을 고르는 말을 보며 이제 좀 괜찮은가 보다 싶어 우리는 일단 산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통화가 되는 곳까지 가서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릴 요량이었다.


어디가 아픈지 내내 버둥대던 목장의 어떤 말


다시 덜컹거리는 산길을 달려 국도와 만나는 부분까지 내려오니 다행히 저쪽에 할아버지의 차와 승마체험 중인 학생들이 길을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말들이 놀랄까 봐 조심스레 차에 탄 상태로 할아버지 차에 다가가 창문을 열고 말 한 마리가 아픈 것 같다고 증상을 얘기했다. 할아버지는 아마 사료를 너무 많이 먹어서 배에 가스가 차서 그런 것 같다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씀하신다. 조금은 안심이 돼서 이번엔 아기말이 보이지 않더라, 어디 있냐고 여쭤보았다.


 ‘죽었어요’

평상시의 톤으로 툭 던지시는 할아버지의 무심한 한마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죽었다고요? 그 아기말이요?’

‘응. 오늘 아침에 보니 죽어 있더군. 먹이가 부족했었던게지…’

여전히 평상시의 톤으로 담담하게 말하는 할아버지.

나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금세 패닉 상태가 되었다. 동시에 그 예뻤던 아기말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며 왈칵 눈물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 무슨 말을  들을 이유도 없고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 말을 함께 들은 남편도 같은 생각이었던 듯 서서히 차에 속도를 올려 그 장소를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 아름답고 완벽했던 작고 여린 생명체가, 어제만 해도 내 팔에 얼굴을 비비며 사랑과 스킨십을 갈구하던 그 아기가 죽어버렸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얼마 동안이지 상심한 마음에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말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분명히 그 아기를 죽게 하지 않았을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쳐 인터넷으로 말의 출산과 양육 관련 정보를 찾아보았다. 아기말이 태어나면  두 시간 안에 젖을 먹어야 하고, 30분에 한 번씩은 지속적으로 수유를 해야 한다고. 출산하는 어미 중 5% 정도는 아이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런 경우는 주인이 잘 살펴야 한다고. 만약 몇 시간이 지나도 어미가 제 아이를 살피지 않으면 바로 수의사에게 보여야 한다고. 보기에 아기가 멀쩡해 보여도 제때에 수유가 안되고 영양공급이 안되면 아이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믿을만한 사이트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들은 바로는 전날 새벽 3시에 태어난 아기말은 엄마가 보살피지 않아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그날 저녁 무렵에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할아버지가 아까 보았던 방식으로 우유를 주었다고 했다. 그 다음날 아침에 한 차례, 그리고 우리가 방문했던 오후 3시에 한차례, 그렇게 만 하루 반동안 세 차례 정도에 걸쳐 우리가 봤던 방식으로 우유를 먹었던 것이다. 한데 우리가 봤을 때에도 우유를 거의 흘리고 제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 같지 않았던걸 생각하면 그 전의 두 번의 수유도 그다지 달랐을 것 같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할아버지가 더 꼼꼼히 살피고 좀 더 제대로 영양을 공급했다면, 아니 얼른 수의사에게 데리고 갔다면 그 사랑스러웠던 아기말이 그렇게 허무하게 스러져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슬프고 억울한 마음에 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마침 출타 중이라던 할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아까 목장에서 걸었던 전화번호가 할머니 전화였던 모양인지 확인차 연락하신 모양. 친정 집에 볼일이 생겨 다녀오는 길이라고, 한 시간이면 목장에 도착한다고 하신다. 아기말이 죽었다는 걸 아직 할아버지에게 듣지 못했다고 그분도 놀라신다. 이런 일이 자주 있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고,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하셨다. 아기말이 태어나기 전날에 급하게 출타하신 거라 태어난 걸 보지도 못하셨단다. 할머니가 계실 때는 마구간이 좀 더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어 있었던 기억에 생각이 미치자,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가 옆에 계셨다면 아기말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또 슬프고 분한 마음이다.


인간에게 살육당하는 동물들, 그리고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고, 태어나고, 제대로 된 보살핌 받지 못한 채 병들거나 죽어가는 동물들을 생각하면 나 역시 인간이지만 내가 속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목장 할아버지가 동물을 학대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좀 더 노력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았다면 분명 살릴 수 있었다.  충분한 노력 없이 한 생명을 안이하게 방치하고 허무하게 죽게 한 것 역시 결코 가볍지 않은 죄이다. 그렇게 이 지구 상에서 사라져 간, 앞으로 사라져 갈 내가 모르는 아름답고 완벽한 생명체가 얼마나 더 많을 것인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존재는 언젠가 동물들에게 저지른 그 숱한 죗값을 꼭 치르게 될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 무기력함과 분노, 슬픈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힘들게 느껴진다.


동물 때문에 슬프고 상처받은 마음이 가장 위로받을 수 있는 대상은 역시나 동물인 곰순이다. 누워 있는 곰순이 옆에 함께 누워 곰순이의 순한 눈을 바라보며 등을 쓰다듬으며, 그 어리고 아름다웠던 아기말을 위해 기도했다. 건강한 모습으로 멋진 갈기를 휘날리며 푸른 초원을 마구 뛰어다니는 그 아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천국에서는 그리하렴, 아니 다음 생에서는 꼭 그럴 거야. 엄마 사랑 듬뿍 받고, 따뜻한 햇빛 받으며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맛난 엄마 젖도 실컷 먹으렴.


딱 이틀 동안 이 세상에 살다 간 어여쁜 아기 말 ‘캐러멜'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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