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와 비장소 (여행, 판매시설, 분양건물)
판매시설
주말에 코스트코 주차 출입구 대기 행렬에 합류했을 때, 약간 나 자신이 별로라는 느낌이 들었다. (스케일 파괴에 가까운 거대한 양송이 수프와 피자를 먹으며 잊어버렸지만.) 대형 쇼핑몰을 뱅글뱅글 돌며 쇼핑하거나, 마트 안에서 다른 사람의 카트를 피해 돌아다닐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최근 이런 감정을 친절하게 설명한 글을 읽었다.
현대에는 비장소에 대한 혐오와 열망이 공존한다. 우리는 아울렛, 프랜차이즈 식당을 정체성이 없다고 비난하지만, 그런 장소에서 익명성의 안정감을 느끼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맥도널드는 어디에서나 항상 똑같아서 집과 같은 편안함을 준다. 인간은 대립되는 면을 동시에 가진 존재다.
(출처: 과잉도시, 장용순, 도시의 정신분석 시리즈 중)
여행
여행은 '장소'를 경험하는 일의 연속이다. 박물관,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건축물, 이색적인 카페, 공원 등의 장소를 점으로 연결하다 보면 여행 일정이 절로 짜여지곤 하는데, 이 점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동을 위해 머무르는 정류장, 이동수단, 필요한 물품을 사는 상점, 숙소 등 기능을 충족시키는 '비장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여행에서 장소는 설레고 기대되는 곳이라 장소에서 느끼는 만족감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반면, 예상치 못한 '비장소'에서도 특별한 경험을 할 때 만족감은 상당히 크다.
대전 근현대전시관을 갔다가 성심당 본점에 가기 위해 대전 중앙로 지하상가를 지나기로 했다. 장소를 찾아가기 위한 이동 경로라는 '비장소'의 정체성을가진 약 1.5km에 달하는 이 공간은 예상과 달리 기웃거릴 만한 상점과 이곳을 약속 장소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너무 예쁜 잠옷 가게를 발견해서 우리 일행은 이곳을 "잠옷의 성지"라고 부르기로 했다.
다시 판매시설
판매시설은 대표적인 '비장소'로 간주되어 왔으나, 최근엔 소비행위 자체만으로 장소성을 부여받는다.
더 현대 서울, 스타필드 같은 대형 판매시설에서 데이트하거나 모임을 하고, 휴일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 많다.
대전에서는 이를 넘었다. 성심당이 빵집이라는 비장소에서 대전이라는 도시의 대표 랜드마크가 되었다. 성심당은 주변에 파급 효과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대전엔 성심당 말고는 볼 게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특한 사례다.
처음엔 "빵집이 뭐 대단하겠어"라는 마음으로 유명하니까 한 번 가보자며 방문했지만, 바로 스스로의 오만함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쟁반에 빵을 쌓아 올리는 모습은 빵의 천국을 연상케 했고 나 역시 저렴한 가격과 기대를 넘는 맛에 감동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이라 더 축제 분위기였고, 케이크들이 가득했다. 직원들은 구매 '응원'을 쉬지 않았다. 여기서 구매한 8천 원짜리 잠봉 뵈르를 여행 중 이틀에 걸쳐 나눠 먹었는데, 그 어떤 잠봉 뵈르보다 풍성한 느낌이었다. (성심당을 가지고 장소와 비장소를 논하려 했던 게 적절하지 않은 듯, 여긴 그냥 성심당이다. 하핫)
분양건물
도시에서 가장 흔하게 경험하는 비장소는 개발사업으로 지은 건물인 것 같다. 새로 짓는 건물이지만 그저 상품으로 취급되는, 장소감 없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마케팅의 일환인 장소성 부여는 상당히 인위적이다. 연속된 공실 상가들의 파사드를 보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거대 디스토피아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개발사업으로 짓는 건물 중 분양하는 건물이 장소성을 가질 수 있을까?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떠오르는 질문이다. 사용자가 고려되지 않은 공급자 위주의 건물에서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개발사업으로 짓는 건물에서 괜찮은 공간적 가치를 찾으려 SOFA 매거진에 글을 쓰다 결국 방향을 바꿔서 겨우 마무리를 했다. 불특정인에게 분양하는 대신, 운영자와 사용자를 결정해 설계하는 방식에서 미약한 가능성을 발견한 정도로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