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라의 이야기에서 발견한 나의 재발견.
배움의 발견 - 타라 웨스트오버
어쩌다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다. 방금 첫 문장을 쓰면서 기억이 났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본 빌 게이츠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빌 게이츠가 호숫가에 앉아 읽던 책이라 호기심에 산 것이다.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할 때까지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일단 첫 느낌은 ‘Educated’라는 한 단어로 이뤄진 간결한 제목이 좋았고, 빌 게이츠와 버락 오바마가 선정한 ‘올해의 책’이라는 마케팅 문구에 마음이 일렁였던 것 같다. 망설일 것도 없이 책의 앞부분을 조금 읽어봤다. 몇 문장 읽지 않았는데도 흡입력이 상당했고 그녀가 나와 같은 부류일 것이라는 알 수 없는 확신에 냉큼 그 책을 구매대로 가져갔던 기억이 난다.
2020년. 그 해는 나에게 여러모로 많은 변화가 있던 해였다. 그런 이유에서였는지 이 책은 구매했던 당시엔 읽히지 않은 채 책장 한 켠에 꽂혔다. 그러다가 책은 두껍고, 유명하고, 그러나 읽기는 어려운 책들을 자기 방에 진열하길 좋아했던 남편에 의해 얼마간 남편 방 서가로 옮겨졌고, 2년이 지나 또 한 번의 이사를 하고 나서야 다시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2022년의 나는 이 책이 어떻게 '구매'로 이어졌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단순히 2018년 미국의 각종 매체에서 ‘올해의 책’을 휩쓸었다는 마케팅 문구 때문에? 하지만 책 첫 페이지의 몇 문장을 읽고 나서 그 책을 왜 샀는지를 상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어 페이지를 더 읽고 나서 남편에게 말했다.
“왜 샀는지 알겠어요. 벌써부터 좋아.”
책은 처음부터 흡입력 있는 문장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첫 문장은 다음 문장으로, 다음 문장은 그다음 문장으로. 그녀의 문장들은 내가 일주일간 여행을 다녀와서 펼쳐도, 피곤하거나 심심할 때 읽더라도 한동안 나를 잡아 두기에 충분한 몰입감을 주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무서운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지만, 다시 책을 집어 드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심리적 장벽을 극복해야 하는 책이었다. 어느 순간엔 내가 이 문장들을 왜 읽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책을 300페이지가량 읽었을 무렵에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라도 책의 마지막 챕터에 도달해야 했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타라'라는 화자의 감정에 이입되어 책을 완독 했다.
이 책을 처음 구매했을 당시에 읽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만큼의 감동을 느낄 수가 있었을까? 책을 완독하고 나서 받은 감동 속에서 여러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마도 이 책이 서가에게 꽂혀 있던 지난 몇 년간 내게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2020년은 심한 공황장애와 우울증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상담심리 치료와 정신과 약을 복용하며 휴직하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그 해 여름,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경기도로 이사를 왔다. 그 후 내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고, 2021년 늦가을 무렵 <리셋, 다시 나로 살고 싶은 당신에게>가 출간되었다.
책을 쓰고 나서 한동안은 책을 알리는데 주력해야 했다. 이런저런 마케팅 PR로 정신이 없던 즈음, 아버지가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는 처음엔 힘든 내색 없이 항암 치료를 이어갔지만 몇 달 버티지 못하고 이듬해 봄,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말로는 정의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에 놓이곤 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나 스스로가 ‘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아내려는 고민은 계속되고 있었다. 단순히 아버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 상실감이라는 감정 - 외에, 내면에 짙게 드리워진 슬픔의 출처가 어디인지 나는 간절히 알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폐암 진단을 받은 직후 나는 내 방식대로 아버지를 사랑하려고 애썼다. 어렸을 때의 기억, 엄마의 고난, 누군가의 강요, 가족의 도리, 도덕적 양심에서 벗어나 내 깊은 곳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사랑. 그 사랑에서부터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를 바랐다. 내 방식대로 아버지를 사랑하면 내 인생 전반에 걸쳐있는 ‘죄책감’이라는 정서를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온전히 내가 원할 때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대화를 했다. 그 순간 사랑의 주체는 나에게 있었고, 나를 향한 사랑에서 시작된 사랑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흘러들었다. 아버지와 나는 내가 낸 책을 매개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고 몇 년 만에 물꼬가 트인 대화는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어떤 면에서 아버지는 조금도 변한 것 같지 않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익숙한 듯 낯선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 3-4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아버지는 내가 그토록 바랐던 아버지의 모습, 내 무의식에 숨겨져 있던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잔소리인지 걱정인지 자기 위안인지 헛갈리는 내 말들에 아버지는 가만히 귀 기울였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가만히 지켜보며 내 방식대로 아버지를 사랑했던 오래 전의 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갑작스러운 보상처럼 따라온 것이 있었다. “그때 (너는 사춘기였는데) 내가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다 나 때문이야.” 아버지는 나의 공황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평생에 걸쳐 듣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자신이 아버지로의 역할을 잘해야 했다는 죄책감 어린 그 말을 들은 순간 “내가 뭘 그렇게 잘 못했는데!”라고 소리쳤던 과거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오랫동안 내 뇌리 박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던 그 말은 그날 아버지가 한 말에 의해 조각나고 흩어졌다. 오래도록 나를 괴롭게 하던 기억의 편린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즈음 내 기억은 드문 드문 새로운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내가 속한 현실이 자주 재구성되는 경험을 했다. 동시에 나의 자아도 여러 번 탈피를 거듭하며 변해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죄책감은 변함이 없었다. 그저 내가 변화를 거듭하는 동안 죄책감의 크기와 형태가 변하는 듯했다.
아버지의 병이 깊어지는 동안 죄책감은 무력감과 함께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 그러다 이윽고 과거에 내 손으로 묻었던, ‘분노하는 자아’를 소환해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 자아는 더욱 강해졌다.
(책의 저자이자 화자인 타라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여러 가지 질문을 놓고 끝없이 논쟁해왔다.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단순히 아버지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결국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며,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을 마주해야 하는 현실에 대하여. 왜 온전히 내 방식대로 아버지를 사랑하기 어려운가에 대하여.
명확한 사실적 근거들과 그 근거들로부터 발현된 부정하고 싶은 기억.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은 끊임없이 충돌해왔고 나는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 퇴사, 이사, 책 출판, 아버지의 죽음. 이 일련의 사건들이 이 책이 서가에 꽂혀있던 지난 2년간 내가 겪어온 일이며, 그로 인해 수없이 많은 자아의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그 변화된 자아로 인해 이 책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지만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끊어낼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 그리고 ‘정신의 자유’를 위한 치열한 노력에 대하여
죄책감을 내려놓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녀가 했던 행동에 대하여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길이라는 것까지.
읽는 동안 고통스럽기도 답답하기도 했지만 타라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살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해야 했던 여러 선택들처럼 나와 남동생도 어떤 '선택'을 해야만 했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아마도 2020년 어느 시점부터) 내가 지식에 ‘더욱’ 탐닉하고 집착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교육’함으로써 정신의 해방을 구하려 했던 것이었다.
- 분열된 자아 사이에서 중심을 지킬 수 있는 능력
- 그 능력으로 얻게 되는 그 자유
를 얻고 싶었던 것이다.
타라 웨스트오버는 자신의 쓰라린 시련으로부터 자기 삶을 증명하고 설명하려 애썼다. 그리고 그녀가 쓴 비망록은 그동안 내가 풀어내지 못했던 숙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책이 출판된 지, 구매한지도 제법 되었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책을 완독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 마침내 무릎을 치게 만들었던,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마지막 문장들을 남겨본다.
그날 밤 나는 그 소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