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민 호프만 저,《그래픽 디자인 매뉴얼》 평론
원칙과 실천
Graphic Design Manual
Principles and Practice
저자 아르민 호프만
감수 최문경
옮긴이 강주현, 박정훈 옮김
발행일 2022년 4월 28일
출판사 안그라픽스
인간은 줄곧 디자인과 함께 살았다. 포대기는 갓 태어난 생명을 감싸는 데 쓰였고 수의는 죽음을 애도하는 데 쓰였다. 인류가 발명한 문자는 철학과 지식 혹은 권력을 기록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오랜 시간을 거쳐 축적된 기록물은 오늘날 교훈을 얻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역사로 기능한다. 이 찬란한 역사의 중심에는 늘 창의적인 사람이 존재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이‚ 이들을 통해 새로운 사물로 치환되어 지구를 채웠다. 우리는 이렇게 태어난 사물로 인간 사회에서 발생한 일을 해결하며 다른 미래를 꿈꿨다.
디자인은 자연적인 존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물의 탄생에 관여한다. 어떤 사물은 기능적인 동시에 아름답다. 자연과 어우러진 조형예술은 죽어가는 지구환경을 돌아보게 만들고‚ 환경을 생각한 디자인은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게 한다. 이처럼 좋은 디자인은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때로는 정체되어 있던 세상을 뒤바꾼다.
디자인은 사람과 사물이 상호작용하여 의미를 생산하고‚ 사물이 제 기능을 수행할 때 제대로 작동한다. 이러한 디자인을 두고 우리는 좋은 디자인이라 정의한다. 시대를 불문하고 사랑받는 사물의 모습은 불안하지 않고 안정적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균형 잡힌 디자인을 적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요소가 정교하게 어우러질 때‚ 사물은 중심을 잡고 오랜 시간 바로 서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본질을 파악하고 기본을 터득하는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생각은《그래픽 디자인 매뉴얼》의 저자‚ 아르민 호프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픽 디자인 매뉴얼》은 1965년 첫 출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 수많은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는 디자인 참고서로 통용되고 있다. 점‚ 선‚ 대립‚ 문자와 기호. 총 네 가지 요소를 다루는 이 책은 짧은 글과 이미지로 구성되었다. 저자 아르민 호프만은 스위스 그래픽 디자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 호프만이 스위스 바젤 디자인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시기에 집필한 이 책은‚ 당시 예술 교육에 대해서 그가 얼마나 냉철한 태도를 취해왔는지 읽어낼 수 있다.
이 책을 출간한 1960년대는 과학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던 시대였다. 장인의 기술적인 능력은 기계로 대체되었고‚ 새로운 기술을 적용한 도구는 누구에게나 편리성을 제공했다. 예술과 공학의 협업도 이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향을 빠르게 인지한 호프만은 젊은 세대가 앞으로 배우게 될 예술 교육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갈수록 정교해지는 도구를 현명하고 비판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실‚ 호프만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디자이너였다. 우연이 만들어낸 디자인이나 독특한 취향이 드러나는 디자인은 그가 가르치는 수업에서 다루지 않았다. 본질부터 파악해야 여러 갈래로 잔가지를 뻗을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호프만에게 디자인이란 본질을 깨닫는 과정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산물이었다.
호프만의 디자인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예술은 인공지능의 영역까지 확대되었다. 인간의 창작물로 학습한 인공지능은 종종 본 적 없는 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러한 특성을 사용해 실제로 수익을 창출한 사례도 늘어가는 추세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공지능이 생성한 창작물이 타인의 지식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세계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만든 창작물이 과연‚ 학습 과정에서 활용한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원저작자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할 방법은 있는지. 예술의 본질을 스스로 탐구하는 과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창작물을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지. 이러한 물음은 적절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인간 사회를 떠돌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 매뉴얼》을 출간하고 반세기가 지났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책에 적힌 호프만의 디자인 철학 대부분을 현시대에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손에 쥐어진 도구를 비판적으로 사고할 것. 그것을 현명하게 그리고 책임감 있게 사용할 것.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이 만든 도구는 인간만큼이나 복잡해질 것이고‚ 도덕과 권리를 다루는 논의는 끊임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도구에 끌려가는 인간이 아니라‚ 도구의 본질을 파악해 활용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호프만이 한 말처럼‚ 책임감을 가지고 도구와 마주할 필요가 있다.
호프만이 주로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가르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호프만은 점‚ 선‚ 문자와 기호를 학생들 스스로 배치하고 조합하고 대립시키고 구성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이 기본 요소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시켰다. 이러한 호프만의 수업 방식은 학생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실제로 호프만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졸업 이후 카메라맨‚ 아트 컬렉터‚ 영화 제작자‚ 디자이너‚ 인형 제작자 등 다양한 예술 업계에서 재능을 펼쳤다고 알려져 있다. 호프만에 대한 자료를 참고하며 알게 된 것은‚ 잘 다루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본질부터 이해하려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무언가가 있고‚ 그 경험이 삶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점으로 작업하면 점들의 단순 배열, 수직 및 수평, 그리드 배열, 그룹, 자유 및 선택적 산란, 군집화, 크기의 가변성, 회색조 및 색상, 질감의 가변성 등 다양한 공식들을 만들 수 있다.
<점>, 13쪽 발췌
선은 중심에 얽매이지 않고 어느 방향으로든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 그렇지만 선을 기본 요소로 간주하는 것은 선의 형성 과정이 단지 과정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선은 과정이 완료된 요소이다.
<선>, 15쪽 발췌
서로 다른 가치를 하나로 모아 균형을 이루고 상반된 가치들을 보다 높은 수준에서 결합하는 것은 그래픽적 관점을 초월하는 문제이며, 실제로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되었다.
<대립>, 17쪽 발췌
로고 타입 디자인에서 글자의 조합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의식적으로 요소를 만나게 하고 가치를 대립시켜야만 기존의 글자를 넘는 새로운 형태의 표현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자와 기호>, 19쪽 발췌
호프만의 디자인 철학은 그가 디자인한 작업에도 잘 드러나 있다. 호프만이 작업한 포스터는 대부분 흑백으로 처리되었다. 색이 필요하다면 빨강‚ 파랑과 같은 원색만 사용했다. 보여야 하는 부분을 잘 보이게 하고, 읽혀야 하는 부분을 잘 읽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단순하지만 감각적이고 효율적이었다. 호프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강의하며 자신만의 양식을 곳곳에 알리기도 했다. 서정적이고 때로는 직관적인 호프만의 디자인 철학은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호흡하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 매뉴얼》은 예술 서적으로 분류된 책이다. 이 책을 읽거나 필요로 하는 핵심 독자 역시 예술을 다루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책은 마치‚ 오랫동안 세상을 통찰하며 살아온 한 철학자와 마주한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아마도‚ 디자인이 인간과 함께 걸어온 역사적 시간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상반된 가치’를 하나로 모으고 접점을 만들어 인간 사회를 풍요롭게 해왔다. 사물에 기능을 부여하고‚ 우리를 좀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메시지를 첨가해왔다. 재치 있거나‚ 합리적이거나 혹은 날카로운 방식으로. 이 책은 비록 철학서나 인문서는 아니지만‚ 우리가 앞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를 미처 생각지도 못한 관점으로 모색할 수 있도록 안내해줄 것이다.
아르민 호프만 소개 참고
Armin Hofmann | Biography, Designs and Facts (famousgraphicdesigners.org)
‘what Is Right Is Automatically Beautiful’ | Von Bartha
Armin Hofmann : Design Is History
Armin Hofmann: 1920–2020 | Poster Ho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