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도 경쟁, 아이도 경쟁해야 하는 나라
나는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다.
세모를 임신하고 가장 먼저 산 책은 <임신 출산 육아 대백과>였다. 출산과 육아까지, 아이에게 가장 좋은 환경을 주고 싶어 인간 백과사전이 되기 위해 매일 읽었던 기억이 난다. 태어날 아이가 낳자마자 형광등부터 보면 좋지 않다고 해서 내 자궁처럼 어두컴컴한 분만실 방에서 끙끙 앓아가며 진통을 견뎌냈다.
'그거 아니? 세상에 네 계획대로 되는 건 단 1도 없을 것이다.'
아이는 태변을 먹었고, 나는 10cm가 열린 채 제왕절개술을 받았다. 그렇게 세모를 만났다. 책 대로 될 리가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야 했다.
산후 조리원에 간 나는 모유수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수술을 하고 쉬어야 하는데 나는 아이를 먹이는 데에 혈안이 되었다. 수유실에 앉아 핑크색 가운을 입고 둘러앉아 수유를 하는 엄마들이 어색했다. 한 아기가 모유를 먹지 못하고 계속 울고 있었다. 그 앞에 같이 눈물을 흘리는 산모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보다 더 두려웠던 말은 바로 산후조리원 간호조무사의 말이었다.
"산모님, 저녁에 뭐 드셨어요? 양파 같은 거 드셨죠?"
"네. 그것 때문인가요? (흐어어어엉)"
"아이가 모유 냄새 달라진 것도 다 알아요~ 오늘은 분유 먹일게요."
그때부터 알았어야 했다. 아이의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한 화살은 바로 '나'에게 향할 것이란 것을.
열심히 먹이고 재우다 보니 아이는 어떻게든 자라긴 자랐다. '영유아검진'을 받던 날, 우리 아이의 머리둘레, 키, 몸무게 퍼센트가 나왔다. 처음에는 60% 정도로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다 해가 갈수록 세모는 10%를 겨우 넘겼다.
"아이가 잘 안 먹나요?"
사실 잘 안 먹었다. 그런데 내가 요리 실력이 형편없는 어린 엄마라 그런 걸까 고통스러웠다. 그 시절 오은영 선생님이 잘 안 먹는 아이 때문에 고민이 있는 엄마에게 솔루션을 주는 프로그램까지 찾아봤었다. 보면서 눈물을 흘리던 내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오빠, 이유식 배달 시켜도 될까? 내가 해주는 걸 너무 안 먹어. 근데 첫아이니까 이유식 정도는 엄마가 해서 먹이는 게 낫지 않냐고 그래. "(눈물 콧물을 흘리며 남편에게 괴로운 마음을 쏟아냈다.)
잘 먹는 아이를 보면 부러웠다. 잘 먹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부러웠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 나는 늘 좋은 엄마였던 적이 없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이의 친구 엄마들을 만나면서, 나는 점점 더 미성숙해졌다. 아이가 숫자를 읽을 수 있을 때쯤 또래가 읽지 못하면 이상한 우월감이 들었다. 그러다 아이가 다른 또래보다 조절을 잘 못하고 말썽을 피울 때면 한없이 작아졌다.
아이가 ADHD 진단을 받기 전이었다. 연산도 잘하고, 수학 문제 푸는 것을 좋아하길래 과학자가 되려나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과학고까지 찾아봤다. 과학 인강까지 듣게 했다. 7살 아이에게. 그러다 영어유치원을 보내기 위해 유치원을 떠나는 몇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도 보내야 하나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정말 큰일 날 뻔했다.)
영유를 생각하는 엄마를 비웃듯 세모는 늘 문제를 일으켰고, 유치원에서 많은 민망함을 견뎌야 했다. 남들은 학군지로 이사를 갈까 고민하던 때, 나는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녀야 했다. 다른 엄마들에겐 비학군지에 있는 게 내신에 유리하고 대학 갈 때도 더 나은 것 같다는 말로 나 자신을 포장하기도 했다.
중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상위권 아이들은 꼴찌인 아이들보다 불행해 보였다. 늘 학교 현장에서 입시는 산으로 간다는 것을 느꼈지만, 부모들과 학생들은 어쩔 수 없다. 마음이 급하다. 그들의 불안함은 너무도 정당했다. 큰 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일개 개인들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대세에 따르고 발맞춰 갈 뿐. 그 안에서 고통받는 것은 미래에 '이게 사실 정답이 아니네. 미안하다.'라는 말을 들을 어린 제자들이라는 사실이 슬플 때가 있다.
아이 친구 엄마들, 그리고 학교의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공통적인 불안이 있다. 미래의 아이에게 이런 소리를 들을까 두렵다고 했다.
"엄마, 엄마가 정보를 더 알았다면 내가 더 좋은 대학 갔을 텐데."
"그때 그 학원 다녔으면 내가 더 잘했을 텐데."
공부도 대학도 스스로 간 나는 상상이 가지 않는 감정이었다. 부모 자식 관계가 어떻게 이렇게도 얽혀 있어야 할까.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보듬는 관계가 아니라 아주 깊이 서로의 삶에 '참견'하듯 살아가고 있다.
캐나다에 와 아이를 키우면 나는 정말 기준이 높은 부모라는 것을 늘 느낀다. 이런 느낌은 한국의 '완벽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한국 사람들의 소비는 서로가 가진 것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소비한다는 말이 있다. 이건 아이들의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옆집 영희가 그 학원 다녀서 1등급 나왔대."
"옆반 철수는 컨설팅받았다더라."
캐나다 부모들은 현실적이다. 우리나라에는 '의대' 붐이 있다면 캐나다는 '하키'다. 하키에 가장 많은 돈을 쓰고, 아이가 하키를 잘하면 정말 온 마음 다해 기뻐한다. 그래서 나도 하키를 시켰다. 한국 부모답다. 남들 다 하니까 일단 해야 한다.
"해리는 하키 하나요?"
"아니요. 돈이 너무 많이 들고 제가 따라다닐 시간이 안 돼요."
캐나다 친구들한테 우리 이번에 멕시코랑 미국 간다고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너는 가봤어?' 물어보면 대부분은 여행을 많이 안 가본 사람이 많았다. 아직 돈을 더 모아야 될 때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소비에 있어서도 상대적인 것이 아닌, 가족의 예산 계획에 맞춰 소비하는 것을 늘 느낀다. 자식에게 올인해서 자신의 노후자금까지 쓰는 우리나라와는 마인드가 달랐다. 각자의 삶이 다르니 아이들도 주어진 환경에 따라 헤쳐나가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건강히 낳아줬는데도 모유수유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졌었다. 발달에 문제가 없는데도 하위 10% 키여서 잘 못 먹인 내 탓이라고 자책했다.(당시 5대 영양소를 어떻게 줘야 하나 책 한 권을 보고 정리한 메모까지 있다.) 돈이 여유롭지 않았을 때에도 아이의 학원은 가장 좋은 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레벨 테스트 준비를 시키며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주었을 때도 나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왜 아이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도 늘 부족한 부모라고 느꼈을까?
어쩌면 한국에선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부모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입시 시스템과 사교육 시장 마케팅들. 그 안에서 아이의 미래, 우리 가족의 미래까지 걸어야 하는 부모들. 정작 그들은 '아이가 누려야 할 오늘의 행복'과 '쌓아가야 할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는 책임지지 않는다.
월마트에서 5달러짜리 티셔츠와 15달러짜리 운동화를 사주면서도 아이를 잘 입혔다는 마음이 들었다. 해외여행을 가지 않아도 집 앞 공원에서 신나게 프리즈비를 날려서 좋았다. 이곳에서는 옆집이 앞집이 학교 아이들이 뭘 하는지 학교 끝나고 어떤 문제집을 푸는지, 어떤 학원을 가는지 신경 쓸 일도 없다. 학원을 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이를 시간 맞춰 하교하고 저녁을 손수 차려 모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오늘도 잘 먹일 수 있어 감사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나도 글을 쓰러 내려오는 지금 이 시간 느낀다.
아이의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하루.
나는 비로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