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아닌 나

문예지 단편소설 응모작

by 스토리

배란다 넘어 빨간 옷을 입고 꼬리를 흔들어대는 치와와 한 마리와 유모차를 끄는 노인이 보인다. 불현듯 보쌈 하듯 사위 차에 실어 보내버린 민구가 그리워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먼 발치서 보이는 녀석은 영락없는 민구 모습이다.

칠 년을 내가 키운 민구에게서 벗어나면 무슨 영광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져가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배변을 위해 데리고 나가야 했으며 일을 하거나 출타해서도 눈이 빠져라 기다리는 녀석이 눈에 밟혀 해가 지기 전에 귀가를 해야만 했었다.

어느날부터 내가 이 녀석에게 발목 잡혀 제대로 된 일자리도 여행도 하지 못하면서 사는 건 아니란 확고한 판단이 섰던 것이다.

적어도 내가 벌인 일도 아니고 딸 수진의 개였던 것이니 제자리로 돌려보내기로 굳은 결심을 했지만 두 명절을 지나도록 선뜻 데려가지 않았다.

세 번째 설 쐬러 서울서 내려온 승용차에 은근슬쩍 안겨주어 버렸다.

사실 새신랑 사위였던 김서방은 개를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정작 민구를 선뜻 데려오는 건 반대한다고 수진이 말했었다.

그래서 세 번의 명절을 보내고서야 나의 결심을 실행하고야 만 것이다.

그 때는 다들 떨떠름했고 엉겁결에 보내고 데려 갔지만 지금은 지어미 수진보다 더 좋아한다니 다행이긴 하다.

그 녀석을 보내지 않고 함께 했다면 나의 심신이 지금보다는 더 나빠지진 않았을 것이라 예상 된다.

녀석을 거두어야하니 조금이나마 활동적 이었을 테고 혼자라는 고독감에서 위로와 안정을 주었을 것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 편하자고 민구를 서울로 떠나보내고 난 뒤 그리 좋아지기는커녕 내 생애 최악의 위기를 맞고 멘붕을 넘어 자포자기 상태다.

민구가 없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고된 생업전선에라도 나가보겠다던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다.

늘 마음뿐이고 태생 자체가 힘들고 고된 일이라곤 견뎌내 보지 못한 게으른 족속일 뿐 이었다.

돈이 되는 곳은 모두 힘들고 궂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 주태숙은 그런 일과 돈을 잘도 피해 다녔던 것이다.

그저 마르고 쉬운 곳을 지렁이마냥 기어 다녔다.

일단 채용에선 안내나 사무보조로 선발되어도 들어가 보면 어떻게든 청소나 주방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나같이 태숙의 감정을 상할 대로 상하게 했다.

그러니 그들과도 매 번 매끄러운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가서 보면 한 달 계약직도 있어 기가 막혔지만 겨우 넉 달은 버텼었다.

사람들은 태숙을 너무 쉽게 보아서인지 나이로 무시하는지 대부분 그랬다.

그저 아르바이트 수준의 돈벌이만 하다가 칠 년 전 사별 후 가장이 되어버렸다.

그럭저럭 여러 가지 일을 근근히 이어왔지만 이젠 사방이 막히고 낭떠러지에 서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그야말로 번아웃 이다.

그렇게 어영부영 손에 잡히는 것 없이 눈 깜짝할 사이 이 년이란 허송세월이 갔고 나도 모르는 사이 예순셋이라는 나이만 먹고 널부러져 나자빠진 현재이다.

그래도 민구 보내고 억지춘향으로라도 동유럽과 세부 그리고 하이난을 여행 다녀온 건 참 잘한 일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지금의 상황에서라면 어림도 없었을 터이다.

그 때만해도 지금보다는 여유가 있기도 했다.

연금공단과 만기보험금이 지급되어 일말의 여행자금은 충분히 확보된 상황이고 내 나이가 환갑과 진갑을 맞이하고 있었기에 당연한 인생의 과제를 수행하고도 싶었다.

그때 마침 사촌올케가 코카서스 일대로 떠난다는 제의에 따라나서려고 작정하고 여행경비를 입금하려는 찰나에 저 세상으로 가버린 남편의 제사가 떡하니 버티고 있지 않은가.

작고한 지 칠 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보니 까먹을 만도 하다.

살아생전 무슨 그리 애뜻한 정이라고 있었다고 제사가 무슨 소용이람.

제사도 불사하고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첫제사를 빼고는 늘 제사를 지내면서 이건 아닌데를 읇조리곤 했다.

자식들에겐 나 죽으면 절대 지내지 말라고는 했었다.

마침 추석이 다가 오기에 나 없이 두 딸네 중 하나라도 산소로 가서 제사를 대신해도 괜찮을 듯 하여 통화해 보았더니 둘이 다 날 미쳤다고 몰아 부치는 게 아닌가.

저거 아버지가 그리도 중하면 저거가 단 한 번이라도 이참에 제사 지내보아도 될 터인데 말이다.

늘 나 혼자 제사준비를 했고 뒷설거지도 딸들은 먼저 하는 법이 없었다.

딸자식 참 잘 못 키웠구나 싶어 부아가 치밀어 죽을 뻔 했다.

잘 키운 자식이라면 이번에 저거들이 지낼 테니 환갑여행 잘 다녀오라고 하지 않았을까.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주변의 부추김도 한 몫 하여 보란 듯이 떠나려다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친정엄마가 극구 말리기도 했고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 김이 새서 포기 했다.

자식이라고 보내줘도 시원찮은 판국에 발목잡고 늘어졌다.

경비 한 푼 태주지도 않으면서 그걸로 생활비로 쓰면 일 년을 쓰겠다며 볼 멘 소리 였었다. 그래서 그 당시는 올케언니만 떠나고 이듬해 보란 듯이 동유럽을 아무 말 않고 다녀와 버렸다.

정녕 자식이 이래야만 하는 가

내가 두 딸자식 잘못 키운 것이지.

여느 집 들은 딸들과 너무 살가워 내가 보기엔 볼상 사납기도 하지만 우리는 지나치게 요원하다.

엄마 집 배란다에서나 마당에서 고개만 들면 보이는 가장 높이 치솟은 쌍둥이 주상복합 건물이 큰딸 예진의 집이건만 정작 왕래가 소원하다.

근래에는 생일이나 제사등 행사 때만 얼굴 볼 정도이다.

그 흔한 카톡도 먼저 하는 법이 없다. 딸들의 근황을 별스타그램에서 확인할 정도이다.

어제 보니 캠핑카로 호캉스니 펜션이니 한옥이니 난리부루스가 따로 없다.

서울 딸은 철철이 해외나들이도 잘도 하는구나 싶다가도 부모인 내가 지들한테 다른 부모들처럼 경제적으로 지원 한 푼도 못해 주었으니 할 말이 없다.

부모도 돈으로 평가되고 돈으로 대우받는다.

서로 가려하고 그 반대는 꺼린다. 나도 그렇다.

그런 걸로 서운하자면 부지기수 이다.다행히 지 재력이 있는 부모 곁으로는들 자식은 반드시 지들이 키우겠다니 천만다행 이다.나도 키워줄 생각은 없다.

그제 교회 집사는 딸과 며느리 두 집 손주를 키워주고 있는 걸 보노라니 내가 너무 무심한 엄마로 여겨지긴 했지만 각자 형편대로 사는 거다.

그 엄마의 그 딸인 것이다.

다른 친정엄마들처럼 바리바리 반찬 해다 나르지도 않지만 두 딸은 전혀 필요하지도 않단다. 큰딸 예진이 결혼 후 첫 해 김장으로 김치 한 번 담가주고선 끝 이었다.

오히려 예진의 시댁 김치 한 쪽을 내가 얻어먹는 엄마였다.

그렇다고 단 한 번도 김치 달라고 한 적이 없다. 요즘 아이들은 김치를 그리 먹지 않으니까 그럴 것이다.

나도 엄마도 그렇다.

그래서 삼 년 전 이사하면서 김치냉장고는 중고로 단번에 팔아 치웠다. 참 잘 한 일이다.

며칠 전 엄마 집 것도 처분해 버렸다. 엄마도 나도 일인 가구라 김장이라고 해 본 지 오래다. 반찬가게서 한 쪽 사면 일주일도 넘게 먹으니 말이다.

얼마 전부터 어머니도 즉석 밥으로 갈아 타셨다. 나의 제안으로 매우 만족해하신다.

두어 스푼 드시니 그게 여러모로 편하다고 하신다. 주변인들은 내가 사는 방법에 못마땅해 하지만 일인가구의 특성과 가성비로 치자면 내가 옳다는 결론이다.

며칠 전 뉴질랜드에서 둘째 여동생 제부가 방문하였기에 엄마 죽 재료로 잣을 사러 농수산물 시장을 간 김에 큰 맘 먹고 나물거리들도 사왔다.

하지만 오랜만에 겨우 만들었지만 별로 반응들이 없어 역시나 아니라고 실감했다.

그냥 하던 대로 편하게 소량 사다먹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편의점만 해도 그렇다. 예전엔 나도 오십 원 백 원 차이로 먼 길 되돌아 큰 슈퍼로 갔었다. 이젠 편의점이 나의 참새 방앗간이 되었다. 꼭 필요한 것 한두 가지만 사니 더 경제적이다. 큰 슈퍼는 아무래도 더 사게 된다. 내가 늘 사는 블랙커피는 오히려 삼백 원이 더 저렴한 것도 있다.

노인이 되면 한 걸음도 힘들어 그렇다.

난 이미 몇 해 전부터 편의점 마니아로 노인 아닌 노인으로 진입했다.

만 육십 오세가 되려면 아직 삼 년이나 남았으나 이미 노인으로 전락됨을 절감하고 있다.

생산성이 떨어졌으니 사회에서는 도태되고 고용시장에서는 설 자리를 잃었다.

조용히 은퇴하면 그만인 것을 아등바등 하자니 퇴짜 맞는 게 매 번이다.

시.구청 궂은 일.청소까지 서류와 면접에서 실력을 발휘해 보았으나 허사로 불합격 통보를 받았었다.

이사 후 주변 근거리 아파트 청소 회사로 세 군데 이력서를 보냈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통화와 워크넷 분포도를 보니 사십대들이 나온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리고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만두지 않으며 사오십대 대기자가 넘쳐난다는 결론이다.

요양보호사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작년까지도 아니 올 봄 까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센터에서 대상자가 나오면 가서 일 했었다. 여름까지 하던 어르신들이 요양원과 요양병원으로 가면서 더 이상 일거리가 잡히지 않고 있다.

고용시장도 예전과 다르게 치열하다.

여성회관에선 이틀이 멀다하고 문자가 오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채용 문구만 뜨니 그것이 더 스트레스로 이젠 수신거부하고 싶다.

55세 미만,자차소지자니 해당사항 제로다.

그것도 아니면 원거리이거나 까다롭거나 아무도 갈 사람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질 체력에 더러운 꼴을 못보는 나로서는 갈 곳이 없다.

그러니 이젠 오기가 생기면서 더 이상 추락하지 않겠다고 빚이 지건 글이 지건 은퇴를 선택이 아닌 필연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쩔 도리가 없다. 아무도 오라는 데가 없으니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회적으로 은퇴나이가 한참을 지났다.

과연 어떤 고용주가 채용해 주겠는가. 면접이라고 가보면 사람이 넘쳐나는데 .그렇다고 발 빠르게 청소 쪽으로 예전부터 했으면 모를까. 이제는 그것도 늦은 감이 든다.

반 푼수가 집안 망한다더니 이도 저도 아니다.

도대체 그동안 무얼 얼마나 잘못 살은 건지 자괴감으로 견딜 수가 없다.

꾸준히 무슨 일이든 하고 살았지만 나의 노후가 이다지도 형편없을 줄 꿈에도 몰랐었다.

이 나이에는 문화센터서 취미생활로 운동아나 여행 하면서 유유자적 노년을 만끽해야 할 시기에 아무도 주지도 않는 일자리를 구걸해야 하다니.

모든 게 자업자득이다.

재산이라고는 딸랑 아파트 하나 뿐인 것을 그마저도 줄여보겠다고 시작한 갈아타기에서 막차를 타 낭패를 보고 있는 중이다.

한마디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꼴이다.

은퇴자들을 위한 인생이모작 수업 중에 빚을 없애야한다는 어설픈 재무 설계를 듣고 겨우 이천삼백만원의 대출을 없애보려고 시작한 게임에서 집값 폭락으로 그보다 다섯 배로 빚이 늘어났다.

내 생애 그것도 노년에 최대의 빚더미를 안게 되자마자 일자리 퇴출까지 겹쳐 대출이자와 생활비까지 비상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살던 32평 아파트 전세금을 최대로 받아 20평 전세로 옮기고 남은 현금으로 온갖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싸다는 이유로 외곽의 25평 아파트 분양에 계약금을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오픈 테라스에 꽂히기도 했었고 새 아파트에 살아보고도 싶고 조만간 주택연금으로 갈아타던지 아니면 얼마라도 수익이 난다면 이리저리 이사도 불사하겠다는 나름의 계산은 충분히 있었지만 그 뒤로 입주물량 폭탄으로 양껏 받아 쥔 전세금 칠천만원을 게워내고야 말았다.

받은 전세금이 내 돈 인양 무얼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다 그 정도에서 그친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 이다.

남은 자금으로 원룸이라도 더 샀더라면 더 수렁에 빠졌을 것이다.

다들 한다는 재태크 라는 걸 육십 넘어 몇 백 만원 벌이나, 월 몇 만원 절감해 보려는 시도는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만 것이다.

재태크 아니 돈버는 기술이나 체력도 아닌 주제 파악을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주변의 지인 둘을 따라 장에 나선 탓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뒤에 보니 그녀는 나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었고 결국은 계약금 포기로 손을 들어버렸다.

난 그 때는 그녀를 맹목적으로 믿었었고 계약하는 날은 태풍이 강타해 네 시까지 차량운행에도 지장을 초래했는데 그 때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태풍이 서막의 계시였던 것 같다.

큰 덩어리의 빚을 안고 이사한 새 집은 하나도 좋은 줄도 모른 채 원수 덩이로 테라스도 그저 그럴 뿐이다.

외곽 끝자락에 교통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을 도대체 무엇이 나를 그리도 성급하게 끌어당겼는지 지금도 의아하지만 다 내가 저지른 일이다.

그동안 현금이라곤 쥐어보고 살지 못했던 지라 남아도는 전세금에 주체를 못하고 뭔가를 저지르지 않으면 손해라도 보는 조급함에서였다.

내가 원했던 오픈테라스와 비데가 있는 새 집이지만 멀다고 한 번 와 본 친구도 동생도 다시 오질 않는다.

나조차도 일주일에 두 번 들러 화분에 물주기가 고작이다.

처음에 살던 곳에 어머니를 돌보러 매일 버스를 세 번 타고 가야하는 것이 성가셔 이젠 엄마 집에서 주로 지내고 있다.

두 집을 가졌으나 빚과 생활고에 우울증과 무기력으로 혼이 빠져버린 상태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으며 아무것도 맛이 없다.

철마다 가꾸는 그리 좋아하던 꽃에도 ,지금 한창인 단풍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이러다간 제 명대로도 살지도 못하겠다 싶어 정신을 가다듬어 보려 하지만 도무지 어렵다.

지난달부터 두 집을 부동산에 내놓았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다 팔아치우고 더 작은 곳으로 가거나 내 집 없이 임대아파트로 장차는 가려고 한다.

그런데 이 집 타령이 언제나 끝나려는지 지루하다.

난 곧 또 한 살을 먹는다.

그동안 뭐하고 살아 이렇게 노후가 불안하고 아직도 일자리 찾아 헤매는 나 말고도 두 동생도 매한가지다.

벌써부터 이러니 팔순을 훌쩍 넘은 엄마 나이 되도록 어떻게 살아갈까 까무룩 하다.

내일이면 88세 생일을 맞이하는 엄마를 보면 자주 화가 나기도한다. 긴병에 효자 없다더니 이젠 내 입에서 큰소리가 마구 나온다.

말귀도 못 알아들으시고 다 마음에 안 든다.

음식의 반은 바닥에 흘리시고 기저귀 처리도 겨우겨우 하시는 뼈만 앙상한 엄마가 싫어지고 짜증만 난다.

아마도 그건 내 마음이 편하지 않은 반증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해만 지면 정신과 수면제를 드시고 시체처럼 깊은 잠에 고꾸라져 자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쯤에서 조용히 삶을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불효자식 일까.

잣죽 외에는 통 못 드시다가 요 며칠 간은 이것저것 자주 챙겨 드시는걸 보니 다시 깨어나는 모양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꾹 잡으시려는 듯 보인다.

오늘 세 시에는 엄마가 원하시는 복국 집을 찾아 한참을 휠체어를 밀어야 할 판이다.

다들 살기가 힘겨워 두 동생들은 가끔 엄마를 원망하는 말을 하곤 했다.

이젠 내가 그렇다.

어찌 요렇게 못나게 낳았고 키웠는지를. 누구인들 그리 하였으랴! 부모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유전자를 거스를 방법은 없다.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딱 내 나이쯤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그 때 모습에서 나를 발견한다.

장녀이지만 아버지의 그때를 가장 닮았다.

싫지만 나도 어쩌지 못하는 내력이다.

내 딸도 나도 내 어머니도 그러할 것이다.

조금 전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바람불고 날이 차다기에 콜택시로 복국 집을 다녀왔다. 한사코 마다하시는 엄마를 끌다 시피 해서 여동생과 만나 삼 인분을 시켰으나 나 혼자도 모자랄 건더기였다.

아니다싶어 나오려 해도 어머니의 거동이 불편해 주저앉고 말았다.

내 돈 지불하면서 이런 푸대접도 우리가 늙었다는 증거일까.

그들은 우리가 돈이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코스는 안 되고 지리만을 고집 했다.

돈 되는 단체손님이 곧 온다고 우린 안중에도 없었다.

더 웃긴 건 어머니가 집에 오자마자 잣죽 한 그릇을 친히 렌지에 데워 마구 드시는게 아닌가. 우린 억울해 국물에 밥이라도 퍼먹고 왔는데 말이다.

복국을 들먹이길래 인터넷 검색하여 가자는데 한사코 안가겠다고 버티시는 걸 모시고 간 집이 허사가 되고 만 셈이다.

노인들의 말은 반대로 들으면 된다. 하고 싶고 가고 싶으면서 늘 반대로 말한다.

그걸 자식들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일 뿐이다. 외식도 오늘 보니 불가능이다,

혼자는 이제는 사고로 이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대도 내가 들어오는 건 반대였었다.

다른 자식들의 입김으로 그리된 것이 난 못내 서운함으로 남아있다.

내 처지로 보나 엄마의 상황으로 봐서는 내가 들어와 마지막을 지켜야 하는 게 맞는 판단이었는데 그러질 못하고 멀고 먼 새 아파트로 입주를 하고보니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모두가 거길 왜 갔느냐고 비난이다 보니 오롯이 나 혼자만의 외로운 투쟁이다.

입주시점 때 계산이 빠른 큰사위는 계약금 이천 백만 원을 포기하고 던지라고도 했지만 난 그 돈이 아까워 그 돈으로 사 년 치 대출이자로 은행에 주는 게 낫다고 이사를 감행했다.

다행히 팔 개월 만에 분양가 회복은 되었으나 그것으로 전혀 만족이 안 된다.

적어도 손실만 없이 팔고 나오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저층에 인테리어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걸 싸다고 시작한 끝이란 이렇다.

이렇듯 시류를 잘못 탄 나의 결정에 잘해보려 한 단 한 번의 실수이건만 난 대실패로 몰아 스스로를 파괴시키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나를 해치지는 않아야겠다.

따지고 보면 아직은 큰 손해를 본 것은 아니다.

두 번의 이사비용과 복비 정도 인 것을.

하지만 이리도 조급함은 안정된 수입원이 없으며 일자리 없음이다.

여기 저기 청소일조차도 면접에서 불합격이라는 통보를 받다보니 매사에 전의를 상실했다.

더 이상 추락하느니 내가 나에게 안식년을 주기로 마음을 다독여본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도 위로해 주는 이 없으니 나라도 나에게 휴식을 선물하고 싶다.

그리고 목숨이 경각에 달리신 어머니를 위해 마지막 봉사로 극진히 모셔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나의 마지막 일이 되고 마지막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동사무소에 공공근로 신청서를 작성하러 갈 것이다. 살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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