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계속 달려야 해

영화 ‘100미터.’를 보고

by 산들

(약 스포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본 밴드의 신곡을 들었다. 제목은 ‘らしさ(나다움)’. 이번에도 노래 좋구먼 생각했는데, 애니메이션 영화의 엔딩 테마곡이란다. 이 곡 분위기에 맞는 영화라면 재밌겠는데 하고 관심이 생겨서 생겨서 본 영화, ‘100미터.’다. 일본에서는 ‘햐쿠에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달리기에 재능이 있던 ‘토가시’. 어느 날 우연히 현실 도피를 위해 무작정 달리는 전학생 ‘코미야’와 만난다. 코미야의 달리기는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럼에도 계속 달리는 코미야에게 토가시가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의 달리기 연습을 봐주게 된다. 전국에서도 주목할 정도로 빠른 토가시가 중학교 육상 스타 선수 ‘니가미’와 잡지 인터뷰를 하고 온 날, 코미야는 토가시에게 100미터 시합을 제안하고 두 사람은 전력질주한다. 그 다음날 코미야는 전학을 가 토가시와 연락이 끊긴다. 그리고 그들은 몇 년 후 어엿한 육상 선수가 되어 재회하게 되는데…

어렸을 땐 단지 달리는게 좋아서 달렸지만…


타고난 사람과 노력하는 사람. 오랜 기간의 노력이 단 한 번, 몇 초의 짧은 시간에 결정되어 버리는 승부의 세계. 스포츠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다. 보통 스포츠물을 보면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입장에서 즐기게 되는데, 이 영화는 미묘하게 현실적인 부분들이 공감되면서 더 와닿는 지점들이 있었다. 꿈과 희망으로만 가득 찬 이야기가 아니라 더 그런 듯하다. 영화의 메시지가 비단 운동선수뿐 아니라 회사원이나 학생, 우리 모두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대대적 흥행을 하지는 못했지만 일본에서 7억 엔 이상의 수익을 올렸고, 제49회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어 호평을 받는 등 성과는 꽤나 올린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느낀 영화 백 미터의 감상 포인트를 정리해 본다.



1. 달리는 장면의 연출과 리듬감


영화 ‘100미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달리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보여주는 달리기는 단순히 속도의 쾌감이나 스포츠 경기의 박진감을 전달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일반적인 스포츠 애니메이션이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과장된 연출이나 극적인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반면, 이 영화의 달리기 장면은 오히려 절제되어 있다. 과장된 영웅 서사나 화려한 기술 묘사보다는,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순간의 공기, 스타팅 블록에 발을 대고 숨을 고르는 짧은 정적, 그리고 출발 신호와 함께 터져 나오는 짧고 강한 움직임 같은 것들이 조용하지만 강하게 전달된다.


100미터라는 거리는 생각보다 짧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10초 남짓, 길어도 15초 안팎이면 끝나버린다. 그런데 영화는 그 짧은 시간을 단순히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몇 초의 시간 안에 쌓여 있는 수많은 시간들을 느끼게 만든다. 발이 트랙을 차고 나가는 순간, 팔이 리듬을 맞춰 흔들리는 장면, 숨이 거칠어지는 순간 같은 것들이 이어지면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이 몇 초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쌓여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달리는 장면의 리듬도 인상적이다. 음악이나 컷 편집이 과하게 앞서 나가지 않고, 달리는 사람의 호흡과 보폭에 맞춰 서서히 흐른다. 그래서인지 관객은 단순히 화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함께 호흡하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누군가가 트랙 위를 달리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 사람이 지금 어떤 마음으로 달리고 있을지를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이 이 영화가 일반적인 스포츠 영화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승부의 결과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이라기보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과 선택들이 한순간에 응축되어 나타나는 장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출발선에 서 있는 짧은 순간, 총성이 울리기 직전의 미묘한 긴장, 그리고 몸이 앞으로 기울며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차분하게 이어지면서, 관객은 어느새 그 몇 초의 시간을 꽤 오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그래서 이 영화의 달리기 장면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처럼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아주 작은 순간이지만, 동시에 그 사람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모두 모여 있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도 떠오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역시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회사나 학교에서 몇 달 동안 준비한 프로젝트가 단 한 번의 발표로 평가받는 순간, 몇 년 동안 쌓아온 경력이 어느 하루의 결과로 판단되는 순간. 그런 순간들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온다. 어쩌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달리기의 몇 초라는 시간은,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그런 짧은 순간들과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달리기 장면은 단순히 “멋있는 장면”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그 몇 초의 시간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그 시간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함께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관객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선택과 시간이 응축된 한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2. 재능 대 노력이라는 묵직한 주제


이 영화의 중심에는 오래된 질문 하나가 놓여 있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과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과연 누가 더 멀리 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다. 사실 이 질문은 스포츠 이야기에서 매우 자주 등장한다. 많은 작품들이 결국 노력하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곤 한다. 그래서 관객은 어느 정도 익숙한 결말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질문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노력하면 반드시 이긴다거나, 재능이 결국 무너진다거나 하는 식의 단순한 메시지를 쉽게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까운 질문을 던진다. 노력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능의 격차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 격차는 때때로 생각보다 훨씬 냉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100미터 달리기라는 종목 자체가 그런 냉정함을 잘 보여준다. 긴 경기라면 전략이나 체력, 변수들이 작용할 여지가 있지만, 100미터는 거의 순수한 속도의 영역에 가깝다. 몇 년 동안의 훈련이 단 몇 초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 결과는 매우 명확하고,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단순하다. 누가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는지가 전부다.


가장 빠른 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경쟁은 이상적인 스포츠 서사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누구나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식의 낭만적인 메시지보다는,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불균형과 한계를 조용히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조금만 달려도 빠르고,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그 사실은 보는 사람에게 묘한 씁쓸함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단순한 체념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질문을 조금 더 깊은 방향으로 확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계속 달리는가. 이미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시 출발선에 서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비단 운동선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인이나 학생, 혹은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질문이다. 사회에는 분명히 각자의 출발선이 존재하고, 그 출발선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누군가는 빠르게 앞서 나가고, 누군가는 같은 자리에서 조금씩 나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멈추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 이유는 승리 자체보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확인하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조용히 바라본다. 누가 이겼는지보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다시 출발선에 서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제는 단순한 스포츠 경쟁을 넘어선다. 재능과 노력이라는 오래된 대비를 통해, 결국은 우리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는다.



3. 강약이 있는 담백한 작화와 감정의 여백



이 영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각적인 표현 방식이다. 최근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점점 더 화려하고 정교한 작화를 선보이고 있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담백한 스타일을 유지한다. 선은 단순하고 색채도 과하게 강조되지 않는다. 화면 전체가 차분한 톤을 유지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다소 소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지켜보면 그 담백함이 이 작품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 자체가 지나치게 극적인 감정을 강조하기보다는,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조용히 따라가기 때문이다. 화려한 장면이나 큰 사건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작은 표정이나 짧은 대화, 그리고 말없이 이어지는 시간들이 천천히 쌓여 간다.


특히 인물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대사가 거의 없거나, 인물의 마음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 상황만 제시되기도 한다. 관객은 그 장면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지금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를 스스로 상상하게 된다. 이런 방식은 감정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연출보다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덧붙여 해석하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경쟁에 대한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성장이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다.


성우진도 화려했다. 내가 좋아하는 우치야마와 츠다켄도 나옴


직장인이나 사회인에게 특히 와닿는 부분도 이런 여백에서 나온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아주 극적인 순간보다, 설명하기 어려운 작은 감정들을 더 자주 경험한다. 어느 날 문득 느껴지는 피로감, 누군가와의 미묘한 거리감, 혹은 이유 없이 찾아오는 조용한 고민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감정들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조용한 장면과 여백 속에 담아 둔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크게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몇몇 장면들이 천천히 떠오른다. 어떤 표정, 어떤 순간의 공기, 혹은 말없이 지나간 장면 하나가 문득 기억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빗속의 경주 장면이라든지, 후반부 로토스코핑 기법을 사용한 롱테이크 장면은 아주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다. 손이 엄청나게 많이 갔을 것 같은,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그린 것이 느껴지는 작화였다.

결국 이 작품이 주는 인상은 꽤 차분하다. 격렬하게 감정을 흔들기보다는, 조용히 생각할 거리를 남겨두는 방식에 가깝다. 그리고 그 여백 덕분에 관객은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한동안 그 이야기를 마음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된다.



캐릭터들이 매력 있고, 주제의식도 과하지 않고 맘에 들어서 주기적으로 찾아볼 듯하다.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 내가 껴안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암울하지 않고 묘하게도 ‘나도 힘내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어주었다.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 ‘100미터.’를 추천한다.




*공식 뮤직비디오

https://youtu.be/CWZ0lTUs5Mk?si=pPzNhorG1E_3e_oG


* 어떤 분이 올려주신 버전인데 편집이 최고.

청춘스포츠물 오타쿠를 위한 영상이다.

특히 운동, 예체능 했던 사람들이 보면 눈물나죠.

https://youtu.be/l7cnnzhXpTs?si=Ns80dmYYIJXbkGyV

らしさそんな物を抱えては

나다움 그런 걸 안고서는

僕らは泣いてた笑ってた競い合ったまま

우리들은 울고 웃었어 서로 경쟁하면서도

大好きな事に全て捧げては

정말 좋아하는 것에 모든 걸 바치고는

まだまだ泣くんだ笑うんだ

아직도 울고 웃는거야

位置に着いたなら さあ、本気で勝負だ

제자리에 섰다면 자, 진심으로 승부다

。。。。。

ああ生きててよかったな

아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사진 출처

https://lp.p.pia.jp/article/news/434802/index.html?detail=true

https://kai-you.net/article/926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