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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Sep 12. 2017

⎨COVER STORY⎬
길을 걷는다는 것에 대하여

BOOKDIO COVER STORY


1.

 "길을 걷는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두 가지는 '길'이라는 명사와 '걷다'라는 동사이다. 둘은 모양은 다르지만, 진실을 속성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부분이 있다. 거의 모든 명사가 그러하듯 '길'은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당연하고 두 다리 혹은 양손. 때로는 온몸으로 내디딜 수 있는 존재이다. 걷는다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직접 행동할 때야 비로소 완성되는 동사이기 때문에 진실하다. 물론 "구름 위를 걷다."와 같이 묘사를 위해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때에도 "걷다"라는 동사는 행위를 기반에 두고 있기 때문에 진실하지 않다 말할 수 없다. 


 이런 진실성 때문일까? 많은 작가들은 길을 걷는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철학자 칸트는 이 행위를 설명하는 데 있어 진부하디 진부한 클리셰일 정도이다. 국내에도 여러 작가들이 걷는 행위를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듯하다. 가까운 예로 최근 <장석주가 새로 쓴 근현대문학사>를 펴낸 장석주 시인은 스스로를 산책자 겸 문장노동자로 소개한다. 시인의 소개에 따르면 그는 문장노동, 즉 글을 쓰는 자아보다 산책을 하는 자아를 더 앞에 두는 듯 하다. 


 소설가들에게 있어 길을 걷는 행위는 더욱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창작한 이야기는 발 디딜 어떤 곳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없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말하는 것" 이것을 소설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라고 보는 이들이라면 이 말에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체 없이 부유하는 이야기일수록 진실한 땅을 기반으로 해야 힘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못한 이야기의 생은 그 무게만큼이나 가볍고 짧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이것은 필자가 작년에 직접 참여한 실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실험에 따르면 어떤 꾸며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건 내가 작년에 겪은 일인데…" 라는 말을 덧붙이면 듣는 이들이 그 이야기에 빠져들 확률은 더 높아진다고 한다. 



2.

 길을 걷는 행위. 그곳에서 진실의 속성을 찾고 생각을 정리하며 영감을 얻어 쓰여진 수많은 이야기들. 작가들이 원하는 것은 그렇게 쓰여질 이야기 자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조지 오웰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그는 처음부터 작가의 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가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버마의 길을 제국 경찰의 옷을 입고 걸으면서부터였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 그곳에서 제국 경찰의 옷을 입고 선다는 것은 버마 모든 길의 통행권을 들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오웰은 자유로이 그 길을 걸으며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를 부유하는 이야기를 만났다. 누군가는. 아니, 오웰 이전의 어떤 이들도 버마의 진짜 이야기를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곳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 버마의 공기 속에 머물게 할 뿐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길을 걸었다. 여기서 짧은 의문을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을 길을 걷는다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오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미 있는 이야기를 길 위에 그대로 둔다는 것. 그것은 시체의 산책길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사유도 없는 시체의 산책길. 그래서 오웰은 쓰기를 결심했다. 살아 있기에 쓰기를 결심했다. 그가 쓰고자 한 것은 당연히도 버마의 길 위에서 마주한 모든 것이었다. "쓴다."라는 동사. 그것에는 전달의 속성이 있기에 쓰여진 모든 것은 공기를 타고 흘러 다른 길 위에 서게 된다. 그곳을 또 다른 산책자가 거닐고 산책자의 발걸음에 묻은 이야기는 또 다른 산책자의 길에 담긴다. 그렇게 이야기는 전달될 것이었다. 물론 오웰은 전달자의 역할을 하기에 앞서 자의식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지만 속성이란 언제나 목적에 앞서 결승점을 통과한다.  



 길 위에서 만난 이야기. 그것을 전달하는 입장에서 오웰에게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모양이 아니었다. 소설, 에세이, 르포….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그것만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고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길 위에서 만난 진실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위해 오웰은 광산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하기 위해 위건으로 향했고 목숨을 건 전쟁터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것도 자신의 조국이나 식민지 버마가 아닌 스페인의 내전을 향해서 말이다. 그런 오웰의 행동에 누군가는 물었을 것이다. 대체 왜 남의 나라 전쟁에 목숨을 걸고 뛰어드느냐고. 오웰의 답은 간단했다. 


 "그곳에 진실이 있을 테니까."


 오웰과 같은 답을 하는 사람은 또 있었다. 그는 오웰보다 먼저 스페인에 도착했고 오웰보다 거친 말투로 대답을 했다. 오웰과 그는 한 호텔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글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안면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오웰이 자신을 아서 블레어라는 본명으로 소개하자 그는 오웰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본명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뒤늦게 오웰이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을 밝히자 그제야 그는 거친 웃음을 지으며 오웰을 자신의 방에 초대했다. 


 여기서 오웰이 만난 남자. 오웰처럼 길 위의 진실을 찾아다녔고 그것을 글로써 쉼 없이 소리치던 남자. 그의 이름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였다. 헤밍웨이는 기자의 신분으로 스페인 내전의 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그가 쓴 스페인 내전의 기사글은 유럽과 미국을 관통해 널리 읽혔고 그로 인해 스페인 국경에 머물던 이야기는 비로소 선을 넘어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여기에 있었다. 일찍이 경험한 진실만 남기려 했던 오웰과 마찬가지로 헤밍웨이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경험으로 빚어낸 글이 아니면 그것은 말할 가치도 없는 가짜라 생각했다. 이는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에도 적용되는 가치라 믿었다. 그 때문에 헤밍웨이의 소설은 모두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오웰과 만나기도 했던 스페인 내전의 기억은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로. 쿠바에서 지낸 시간은 <노인과 바다>로 이어졌다. 두 이야기 모두 가상의 인물이 나오고 가상의 인물이 삶 위를 걷는다. 하지만 그런 꾸며진 이야기의 기반. 즉, 이야기가 발 디딘 땅은 헤밍웨이가 걸어온 길과 다르지 않았다.  


 "경험으로 배우는 게 많아질수록 더 진실에 가깝게 상상할 수 있다."


 헤밍웨이는 스스로 남긴 말처럼 작가로서의 모든 글감을 길 위에서 찾았다. 그는 쉬지 않고 걸었으며 경험한 모든 것을 글로 남겼다. 물론 그것을 모두 소설이라는 도구로 담아내지는 않았다.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도구가 앞서는 일. 헤밍웨이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경험을 소설로 쓰기에 시간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언제나 너무 빨랐고 산책길은 방대했으니까. 대신 그는 소설로 남기지 못한 진실은 또 다른 자아로 남기는 방법을 택했다. 바로 저널리스트라는 자아로 말이다. 



 저널리스트 헤밍웨이. 그는 이 명함 한 장을 가지고 25년간 세계의 사건을 마주했다. 글쓰기의 시작 역시 소설가보다 저널리스트가 먼저였다. <캔자스시티 스타> 신문에서 첫 글쓰기 활동을 시작한 헤밍웨이는 캐나다의 <토론토 스타>를 거쳐 유럽으로 건너간 뒤 줄곧 유럽의 소식을 전하는 특파원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저널리스트 활동을 하며 남긴 400여 편의 기사와 칼럼은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국경의 선을 넘나들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그가 쓴 모든 이야기가 진실의 땅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저널의 특징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헤밍웨이의 정체성을 저널리스트로 한정 지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헤밍웨이에게 중요한 것은 오웰과 마찬가지로 매체나 장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글을 쓰는 자아에 앞서 길 위의 진실을 바라보는 자아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헤밍웨이를 무엇을 쓴 작가라고 불러야 할까? 그의 소설 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고, 그의 기사에는 소설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런 글을 남긴 헤밍웨이를 소설가 혹은 저널리스트. 뭐라고 불러야 정확한 것일까. 이 질문은 현재로 이어져야 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난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문학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을 두고 때아닌 문학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작품은 세계대전을 겪은 여자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담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소설의 정의를 "허구의 이야기"로 한정 짓는다면 이 작품은 소설이라고 볼 수 없고 알렉시예비치 역시 소설가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소설 속에 모인 수많은 여성의 인터뷰와 목소리. 그것은 저널의 속성만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본다면 이 작품을 지칭하는 '목소리 소설'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알렉시예비치 역시 노벨문학상이 아닌 퓰리처상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그의 작품은 '목소리 소설'이라는 새로운 소설의 분야를 만들어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 그것 역시 간단하다. 길 위를 걷는 사람의 목소리. 그것에는 진실과 함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길 위의 진실. 그것에 감춰진 속성 중 하나는 이야기이다. 진실이 생기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저 그곳에 있었다." 정도의 이야기는 진실이 아닌 사실 정도로 불러도 무방하다. 그것이 왜 그곳에 있었고 어떻게 그곳에 있게 되었으면 왜 그곳에 머물게 되었는가. 이런 이야기가 있어야 사실은 비로소 진실이 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모아낸 세계대전을 겪은 여성들의 목소리. 그 안에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 즉, 진실이 있었고 진실을 담는 것만으로 그의 작품은 문학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진실에 감춰진 속성 중 하나가 '이야기'니까 말이다. 



3. 

 지금 다시 길을 걷는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한 가지다. 당신이 걷는 그 길 위에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지나쳐버릴 사실이고 누군가에게는 글감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진실이다. 길 위에는 그 모든 것이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에 발 딛고 보이지 않는 공기의 숨결을 느끼는 것. 그리고 기록하는 것. 그것의 결과물이 바로 문학이다. 


 다시 앞선 질문을 해본다. 헤밍웨이는 소설가인가 저널리스트인가. 오웰은 르포 작가인가 소설가인가? 알렉시예비치는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하는가 퓰리처 보도상을 받아야 하는가? 답이 하나인 문제에 깊은 고민을 하지는 말자. 대신 그 시간을 그들의 글을 읽거나 길을 걷는 데 사용하자. 어차피 진실은 그곳에 있을 테니 말이다. 


Written by 최동민
1984romaingar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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