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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Jan 06. 2018

로맨티스트

6 Jan, 2018


 유럽 축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 시기는 경기를 보는 것 말고도 또 하나의 즐길 요소가 있는 시기다. 그것은 바로 겨울 이적 시장. 유럽 축구 리그는 시즌이 끝난 뒤 여름을 맞아 이적 시장이 열리고 시즌 중 전반기를 마치면 겨울 이적 시장이 짧게 열린다. 시즌 중에 선수를 사고판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각 팀들게 이 시기는 시즌 마지막 순위표에서 어디에 서 있을지를 결정할 중요한 시기다. 

시즌 전반기를 마치고 우승을 향한 목표에서 멀어진 팀들은 시즌 중이라는 매리트를 활용해 평소보다 비싼 가격에 선수를 팔 수 있고, 높은 목표를 가진 팀들은 야망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가격이 오른 선수를 사야 한다. 파는 쪽은 더 높은 수입을, 사는 쪽은 목표를 향한 큰 걸음을 걸을 수 있기에 나름 양측 모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다만 이 겨울 이적 시장에서 손해를 보는 이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선수를 판 팀의 팬들이다. 


축구 리그에는 당연하게도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된다. 여기서 힘을 가누는 정도는 팀의 위상이나 역사, 전력 등이 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금력이다. 월드클래스 급의 선수 한 명을 사는데 2,000억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해야 하는 세상이니 그 엄청난 액수 앞에서 팀의 위상은 뒷전이 되고 만다. 게다가 가격 인플레가 심해지는 겨울 이적 시장이라면 더할 수밖에 없고, 그런 압도적 자금 앞에 선수를 빼앗긴다면 팬 입장에서는 속이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바로 지금 몇몇 팀들의 팬들은 그런 이유로 애가 타고 있고, 반대팀의 팬들은 힘든 운동을 하고 근육을 얻은 양 겨울에도 웃통을 벗고 근육 자랑을 하고 있다. 이 시기가 되면 유독 떠오르는 근육, 아니 선수들이 있다. ‘로맨티스트’라고 불리던 그들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리버풀 F.C의 팬이다. 리버풀은 지난 몇 년간 팀의 에이스를 꾸준히 빼앗긴 성실함을 자랑하고 있다. 마스체라노부터 시작해 토레스, 수아레즈 까지... 그 뼈아픈 역사를 돌이켜 보자면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리그 우승을 못 한 것보다 한 맺힌 눈물이 나는 바이다. 특히 토레스의 이적은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토레스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있던 당시(지금도 별다를 것은 없지만) 리버풀보다 위상이 높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비롯한 여러 팀을 제치고 토레스는 리버풀을 선택했다. 나 역시 그의 이적과 함께 리버풀을 나의 First Team으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을 후회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듯 토레스는 리버풀의 주장 제라드와 환상의 호흡을 맞추었다. 얼마나 호흡이 좋았냐면 제라드가 공을 차기 위해 발을 드는 순간 토레스는 골문으로 질주했다. 그것을 끝. ‘제토라인’이 골을 넣는 과정은 그만큼 간결하고 완벽했다. 둘만 있다면 (더 좋은 윙어와 예능감 없는 골키퍼, 돌아오는 윙백 등등이 필요하긴 했지만) 리그 우승도 꿈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꿈은 겨울 이적 시장에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토레스는 우승을 원한다는 말을 남긴 채, 이적 시장의 문이 닫히기 몇 시간 전, 헬기를 타고 런던으로 향했다. 그리고 첼시와 계약을 맺고는 리버풀을 떠나 버렸다. 결국 리버풀에는 팀의 기둥이자 리버풀 마지막 로맨티스트로 불릴 제라드만이 남게되었고 ‘토’가 빠진 ‘제 라인’은 쓸쓸히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여기에 리버풀 팬이라면 또 한 명 잊어선 안 될 로맨티스트가 있다. 캐러거와 함께 리버풀 수비를 책임지던 수비수 아게르. 그의 로맨틱 지수가 얼마나 높은지는 이 한 마디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덴마크 인은 배신하지 않는다.”


덴마크인 아게르는 바르셀로나 등 가기만 하면 우승이 보장되는 엄청난 팀들이 눈독을 들인 수비수 중 하나였다. 정말 마음만 먹는다면 (혹은 그가 덴마크 인이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우승컵을 더 많이 들고 선수 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승컵이 아닌 로맨티스트의 길을 걸었다. 


“You'll Never Walk Alone.”


리버풀의 상징과도 같은 이 문구와 함께 팬들은 아게르가 잘할때 뿐만 아니라 아프거나 실수할때마저도 그와 함께 걸었다. 물론 그 역시 지금은 리버풀에 없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걸음의 멈춤이었지만 ‘배신’의 길로 접어든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축구계의 ‘로맨티스트’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따라 붙는 말이 있다.

“프로의 세계는 돈이 최우선이다.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을 배신이라고 말해선 안 된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리고 모든 선수의 목표가 로맨티스트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한 스포츠 클럽의 팬으로서 그 팀에 로맨티스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크다. 돈보다 팀을 앞세운 이가 있다면 팬 역시 성적보다 팀을 앞세우게 하는 법이다. 리버풀에는 그런 이들이 있었다. 캐러거, 제라드, 아게르까지... 어쩌면 우승보다 값진 동기를 부여해준 이들이 리버풀에는 있었다. 그리고 2018년의 겨울 이적 시장의 씁쓸한 모습을 보며 다시 그들의 플레이를 돌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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