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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Jan 07. 2018

동백

7 Jan, 2018


1년 중 신정만큼 모호한 날이 또 있을까 싶다. 휴일이지만 휴일 같지 않고, 마음먹고 무언가를 하기에는 시간이 짧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져 있기에는 죄책감이 드는 그런 날이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런 이유로 신정의 시간은 고장 난 장난감이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남발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올해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가족을 만나고 그 시간 사이에 온라인으로 새해 인사를 나누고 머릿속으로는 올 한 해를 어떻게 수습하며 살까 고민을 했다. 그런 무료한 시간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겸사겸사 집 근처 화훼단지를 찾았다.


신정이라 그런지 문을 연 가게가 거의 없었다. (거의라고 말했지만 사실 한 곳밖에 없었다) 그래도 문 연 가게는 꽤 규모가 큰 가게여서 꽃부터 관엽식물, 행잉 플랜트 등등 웬만큼 유명한 종류의 식물들이 가득했다. 도매 단위로 판매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가게였고 그런 이유로 어떠한 큐레이션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나 같은 식물 초보들은 화훼단지의 가성비가 그리 좋은 편은 되지 못한다. 아무리 가격이 싸더라도 어떤 식물을 골라야 할지도 어렵고 솔직히 말해 지금 내가 어떤 식물을 원하는지도 감이 안 잡힌다. 그렇기에 그나마 근사해 보이는 녀석을 고르지만, 식물의 이름조차 모르고 데려오는 경우가 생긴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꽤 신중히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대략 네 바퀴 정도 돌았던 것 같으니 ‘신중히’라는 말을 붙여도 무방할 것 같다. 


거실 천장에 걸 행잉 플랜트 하나, 안방 가습기 옆에 둘 화분 하나, 키가 큰 스투키 화분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백 화분 하나를 구입해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식물을 겨울에 사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보통 식물들은 겨울이 되면 휴식기를 갖는데 그때 분갈이와 같은 대규모(식물에 있어) 활동을 하게 되면 식물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한참 잘 자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이사나 가자며 짐과 나를 동시에 싸맨다 상상해보라. 식물이 받을 스트레스가 저절로 몸에 생기는 것 같다.)


하지만 신정이란 날의 특수성은 이성적 판단 회로를 정지시켰고 그렇게 새 가족이 늘었다. (가족이 생긴다는 것은 이성이 개입하지 않을 때 주로 일어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애초에 계획으로는 가게에서 화분도 사고 분갈이를 마친 후에 데려오려 했지만, 우리가 들어간 가게(다시 말해 신정에 문을 연 유일한 가게)에서는 화분을 팔지 않아 그대로 와야 했다.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화분을 주문하고 분갈이 흙도 함께 주문했다. 새로운 집의 공기에 익숙해질 시간으로 이틀은 적당해 보였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약속한 택배가 도착했다. 독일 토분(왜 독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통설처럼 전해지는 “독일인은 재미없다.”라는 말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재미없게 생긴 화분이다) 세 개와 받침대, 그리고 흙이 있어야 했는데 배송오류인지 분갈이 흙이 들어있지 않았다. 대략 난감해진 상황에서 재미없는 독일 토분 친구와 한참을 마주보고 있다 토분에 원래 화분을 그대로 얹었다. 묘하게 들어맞는 크기 덕에 어색함이 없어 흡족했지만 새 식구들이 더부살이 신세가 된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났다. 


집 근처에는 분갈이 흙을 파는 곳이 없어 결국 다시 인터넷으로 화분과 마사토 등을 주문하고 가지와 잎, 그리고 흙에 물을 주었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난 아침. 새 식구들은 별 문제 없다며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동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지가 조금 길어진 것 같았으나 순전히 기분 탓이라는 생각을 하며 해야 할 업무를 시작했다. 토요일이어서 5시에 스스로 업무를 종료하고 퇴근을 했다. 인터넷 지도로 퇴근길 교통 상황을 알아본 후, “흐음. 토요일인데도 조금 막히는군.” 하며 작업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장 거실로 향해 소파에 앉았다. (프리랜서의 퇴근길은 늘 그런 식이다) 그런데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풍경이 바뀐 기분.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변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창밖을 봐도 바뀐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그저 기분 탓이려니 하며 커피나 한잔 할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제야 볼 수 있었다. 봉우리를 터뜨리고 나온 분홍 잎을. 


동백은 겨울에 데려온 주제에 집도 제대로 마련해주지 못한 나를 질책하기는커녕 “각자가 바쁘니 나는 내 할 일을 할게요.”라고 조용히 말하듯 꽃을 피웠다. 괜히 기분이 들뜨고(이때는 발뒤꿈치가 땅에서 자주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할 수 있다면 계속 칭찬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무엇이 그리 반가웠는지 알 수는 없지만, 무엇도 그것만큼 반갑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그저 하루가 다 반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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