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번지점프를 한 적이 있다. 안전장치를 하고도 스스로 허공에 뛰어내려야 한다는 공포가 생각보다 컸다. 덜덜 떨면서 딱 떨어져 내려가는데 온 몸에 기댈 곳 하나 없이 붕 뜨는 철렁한 기분에 숨이 턱 막혔다. 그러다 줄이 나를 톡 당겨주고 그 이후로는 스템펄린에 몸을 맡긴 것처럼 튕튕튕 하는 끈을 느끼며 그 순간을 즐겼던 기억도 난다.
아기를 낳고 나선 번지점프를 하는 느낌이다. 남편은 교대근무자라 며칠 있다 며칠 쉬다 하는 직업이라 육아휴직 중인 나도 아기와 둘만 남겨졌다가 동업자인 남편이 돌아왔다가 하는 상황이 반복이다. 병원과 조리원을 거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처음 번지점프를 하던 때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몸을 맡기는 기분이었다. 출퇴근 산후관리사님이 계셨지만 두세 시간마다 깨서 우는 아기를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출산 후 무너진 몸으로 돌보는 건 내 몫이었으므로.
50일 즈음에 산후 관리사 방문도 모두 끝나고, 100일 좀 넘어선 취업 준비 중이라 간간이 날 도와주던 동생도 취직을 하고 난 이후에는 정말 아기와 나 둘만 남겨지곤 했다. 막막한 상황에 눈물이 났다가 남편과 동반휴직하지 못하는 현실에 화가 났다가 돌아오지 않는 관절의 통증과 출산 후 몸에 남은 여러 흔적들에 좌절했다가 체력적 한계에 부딪쳐 숨이 턱 막혔다가 하며 내 몸과 정신이 휘청거렸다.
그러다 어느 날 저녁 아기를 달래며 창밖을 보니까 문득 저 아래로 떨어지고 싶단 충동이 내 온몸을 뒤흔들었다. 저곳이 마치 내 안식이며 종착지인 것처럼. 하지만 아니야, 아니지 하며 뜨뜻하고 묵직한 아기의 체온과 무게를 되새김질했다. 아기는 내가 없으면 큰일 나니까. 아기는 나에게 모든 걸 의지하고 있으니까. 뛰어내리더라도 남편이랑 교대한 뒤로 넘기자. 대신 온몸이 간지러운 것처럼 몸을 긁곤 했다. 어릴 때부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마다 내가 나를 붙들어놓는 방식이었다.
보다 못한 남편이 2주간 휴가를 냈다. 몸과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임시방편인 것을 나도 알고 그도 알았다. 남편은 나에게 2주간 휴가를 내보니 진이 빠진다고 했다. 며칠보다 안 보다 하는 것과 달리 나처럼 관절이 아프고 갑갑하고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며.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러면 그동안 힘들어하던 내 모습은 그에겐 sos 신호가 아니라 약해서 징징거리는 걸로 보였을까. 하는 조금 꼬인 생각만 들었다. 아기와 둘만 남겨져 본 적이 몇 시간 정도뿐이면서 내가 느끼는 걸 간접체험했다 느끼는 것도 맞나? 물론 그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 알지만 매번 궁지에 몰리는 쥐가 되는 건 나지 그가 아니니까.
모르겠다. 내가 힘든 속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위로랍시고 우리 아기 귀여운 이야기를 꺼내는 게 얼마나 끔찍한 소린지 그는 출산 후 망가져 본 몸으로 육아하는 게 아니니까 모를 것이다. 동네 친구나 가족 하나 없는 곳에서 매일 아파트 단지나 길가를 빙빙 돌면서 사람 소리라도 들으려 밖을 나가는 기분도 그는 모를 것이다. 쉬는 날 나 대신 아기와 문화센터 다녀오라니까 당연히 문화센터 교실 코앞까지 내가 같이 가는 줄 아는 그는 내가 무슨 마음으로 매주 거길 챙겨 가는 줄도 모를 것이다. 같이 선택한 길이면서도 그 길이 나에게만 절벽이었는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그에 대한 원망이라기보단 우리 사이엔 크고 깊은 골짜기가 하나 있구나 알게 됐다.
이제 나는 몇 번을 더 혼자 뛰어내려야 이 챗바퀴가 끝나는 걸까. 내 관절은 언제 돌아오고 망가진 수면 패턴은 되찾을 수 있을까. 복직을 하면 나는 잘 버틸 수 있을까. 아기는 행복하지 못한 엄마 아래서 행복할 수 있을까. 고통과 죄책감 없이 육아할 수 있을까. 답을 구할 수 없는 고민들만 무수히 반복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