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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들은 어째서 '서브컬쳐'로 밀려났는가?

25.03.29 단상

by 새현

최근 문화적으로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문화 콘텐츠들이 서사에 방점을 두었다면, 점점 캐릭터성에 무게를 두는 콘텐츠가 유행하고 있다. 가령 과거의 서사시, 소설 따위의 핵심은 서사였다. 하지만 최근의 서브컬쳐 콘텐츠들은 캐릭터성에 치중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10년이 넘게 서서히 진행되어 온 일이었다. 다만, 이젠 서브컬처가 메인스트림 혹은 하이컬처를 넘어섰다는 말까지 나오는 시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유독 두드러져 보인다.


서브컬처에서 캐릭터성에 집중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바로 돈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캐릭터성을 강화하는 일은 팬들의 충성심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한국의 아이돌 문화에 대해 떠올리면 이해하기가 쉽다. 과거에는 H.O.T와 젝스키스의 팬들 간의 난투극이 있었다. 최근에는 앨범깡이라는 문화가 논란이 되었다. 앨범깡이란 아이돌의 앨범에 딸려 오는 포토 카드와 팬 사인회 응모권을 얻기 위해, 한 명의 팬이 다량의 앨범을 사는 경우를 일컫는다. 물론 팬 사인회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보니 한 명이 수백 장의 앨범을 사기도 하며, 앨범 대부분은 그대로 버려진다. 여기서 아이돌이 서브컬처냐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렇다고 답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들을 따라 부르고 즐겨 부른다고 하더라도, 아이돌 시장의 고객은 대다수가 오타쿠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돌 사인회를 가겠다고 앨범 60장을 샀다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모든 사람은 그 누군가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볼 것이다.


서브컬처가 메인스트림과 하이컬처를 넘어섰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서브컬처의 주된 향유층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시선을 받는 경우가 많다. 더불어 소위 ‘오타쿠’들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사회가 그들에게 부과하는 모멸감을 자신 안에 내재화시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타쿠들은 계속 오타쿠로 남는다. 또 그들은 자신의 취미를 위해 남들이 볼 때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으로 재화를 낭비한다. 어째서 그런 모든 단점을 감수하고도 사람들은 오타쿠가 될까?


모든 인간은 타인과 애착 형성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실존적 욕구다.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살아있는 몸을 가진 사람 몇 명 정도와는 건전한 애착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도 어찌 보면 사회적 특권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특별한 과오 없이도 다른 사람과 건전한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계에는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가진 실존적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욕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어야하고, 조금이라도 충족되어야만 한다. 살아있는 육체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에게 애착을 가지는 건 이러한 맥락하에서 이해되어야한다. 즉 ‘오타쿠’들이 가상의 캐릭터를 좋아하는 건, 가상의 캐릭터와 애착형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가상의 캐릭터성을 판매하는게 연예계, 특히 아이돌 시장 -아이돌은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팬들이 좋아하는 건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점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과 아이돌을 좋아하는 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일본 문화도 한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문화라고 볼 수 있는 웹소설과 게임들도 캐릭터성을 강화했다. 국내 게임산업의 수출액은 2022년 약 90억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취는 캐릭터성에 호소한 서브컬처게임의 덕이 컸다. ‘뤼튼’ 등의 한국 IT 기업들도 AI를 이용해 가상의 캐릭터들과 대화할 수 있는 콘텐츠 등을 출시했다. 이런 캐릭터챗 (혹은 AI챗) 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가상의 캐릭터들과 인간적인 교류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우가 대다수로 보인다. 코로나 시대를 기점으로 하여 폭발적으로 확장된 인터넷 방송, 특히 버츄얼 방송인에 대한 급진적인 수요 증가도 이런 맥락과 상통한다. 타인과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힘들어지자, 간접적으로라도 그러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노력해 왔다. 캐릭터산업은 다양한 분야로 크게 확장되었다. 어쩌면 이가 오늘날의 시대정신으로까지 보인다.


필자에게 가상의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과 부모 자식간의 애정의 애정은 ‘애착’으로 묶인 관계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해 보인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주인공인 잎싹은 본래 자신의 아이도 아니고, 종도 다른 청둥오리에게 애착을 느끼고, 모성애를 가진다. 우리는 그런 잎싹의 모습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우린 왜 그런 모습에는 감동하면서, 가상의 캐릭터를 좋아하는 일에는 경멸감을 갖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상의 캐릭터와 애착 형성을 하는 일은 장기적으로 건전한 일은 아니다. 이는 가치의 우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이것이 건전한 관계인지를 가져오는 일일 뿐이다. 최선은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과 양방향적인 관계를 맺는 일이다. 물론 어떤 오타쿠들을 이런 말을 들으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필자는 그런 부류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가상의 캐릭터와 애착 형성을 하는 일은 차선책 이상은 아니라는 점 말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유에 대해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캐릭터를 제공하던 사업이 종료된다면, 캐릭터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또 변수도 많다. 아스카라는 캐릭터를 좋아하던 데프콘은, 캐릭터 디자이너 중 한 명이 혐한파라는 걸 알게 되고는 이른바 덕질을 포기하기도 했다. 또 이런 관계는 양방향적이지 않다. 인간에게는 애정을 베풀려는 욕구도 있다. 즉 사랑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제공함으로서도 만족을 얻는다. 또 사랑하는 사람과 동반으로 성장해 가면서 만족감을 얻는다. 하지만 가상의 캐릭터와는 그러한 교류가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이러한 산업이 정녕 도덕적이냐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전술한 사업들은 ‘애정’을 사고파는 사업이다. 설령 자본주의라는 체제 하에서도 모든 것이 돈에 의해 거래되고 평가받아서는 안 된다. 필자는 ‘애정’이 결국 돈으로 치환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애정’을 파는 회사는 고객과의 관계에서 갑이 된다. 상품과 고객들이 충분히 애착 형성이 된 경우에는 말이다. 서브컬처게임을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반적인 회사라면 발생할 수 없는 정책을 시행하거나, 유저를 쥐어짜 내려고 하더라도 고객들은 함부로 그 제품을 불매할 수 없다. 전술한 앨범깡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소위 아이돌판의 경우, 회사의 고객 학대는 게임보다 심하다. 아이돌의 팬들은 정말 살아있는 대상과 관계 맺기 때문-그것이 설령 일방향적이라도- 에 그들의 기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인기 아이돌의 팬들 개개인은 충성심과 구매력이 인기 아이돌의 팬들보다 높은 편에 속하기도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멤버의 기가 죽을까 봐 더 사력을 다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보통 그들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비합리적인 사람들로 치부함으로써 문제해결을 피해 왔다. 애시당초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태도의 장점은 물론 있다. 첫 번째로는 경제적이라는 점이다. 생각하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들 그리고 충분한 지적, 도덕적 소양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런 태도보다 매력적인 선택지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상대방에 대한 우월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오타쿠들을 비합리적이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일, 또 타자화하는 일은 비뚤어진 우월감을 채워주고 비도덕적인 파괴 욕구도 해소해 준다.


하지만 여기서 논의를 멈춘다면, 단층적인 차원에서 멈추는 일일 뿐이다. 만약 고객들에게 갑질을 하는 회사들을 충분히 처벌하고, 또 법을 개정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해결이 되는 건 아니다. 건전한 애착 형성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양산될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과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일 자체를 사회적으로 허락받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이는 사회의 대대적 변화 없다면 결코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임이 자명하다. 또 21세기는 기술이 발전하여 그 어느 때보다 타인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시대라는 점도 지적해야한다. 이런 시대에 일반적인 애착 형성을 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것, 또 캐릭터산업이 가장 융성하다는 건 변증법적인 모순이다. 독일 관념론자들은 이러한 변증법적인 모순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역사가 진보해 나간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필자 역시 이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즉 오타쿠들이 서브컬처로 내몰린 이유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그들이 타인과 애착 형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건 문인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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