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소리 없이 흐르고 있다. 그것은 나라는 개인을 만나서 나와 동거하며 나를 변화시킨다. 일시적인 조우가 아니다. 너무도 밀접하게 모든 순간을 함께 하고 있다. 그는 붓을 들고 어제와 다른 나를 그리고 있다. 내 마음과 몸의 변화를 정확히 체크하면서 조심스럽게 조금씩 다가와 나를 색칠한다. 난 시간을 인지할 수 없다. 은밀한 동거인 이기 때문이다. 내 얼굴의 주름과 피부는 그가 그려 놓은 것이다. 그의 붓이 피부를 터치하면 내 속의 세포와 화학 물질은 다르게 변해간다. 막걸리가 시간에 따라 발효하면서 다른 맛을 내듯이. 내가 모르는 사이 나는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젊은 시절의 내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다른 것은 그의 붓길이 만든 작품이다. 매일 내 모습을 보는 나는 나를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몇십 년 만에 처음 보는 친구라면 나의 변한 모습에 얼마나 깜짝 놀랄 것인가? 검은 머리카락을 시간은 투명한 색으로 지워 없애 버렸다. 몇 개 남겨 놓은 것들도 윤기 없는 회색 은빛으로 만들어 버렸다. 잔 주름에 이어 거친 주름을 좁은 얼굴에 짙게 그려 버렸다. 곱고 좋은 인상도 변해 버렸다. 덕지덕지 붙은 검은 주근깨도 깊이 새겨졌다. 시간의 교묘한 조작 때문에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온갖 분장을 한 가면무도회의 사람들처럼 나도 알아볼 수 없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시간은 세월과 함께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젊음에서 노년의 공간으로 강제 이동 시켰다. '삶은 이 무대에서 저 무대로, 아이가 청년이 되고 성인이 되고 그러나 무덤을 향해 기울어지는 요정극과도 흡사해 보인다.'는 푸르스트의 말은 얼마나 적절한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실재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추상적인 관념밖에 갖지 못하는 것이' 바로 늙음이라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추상적인 관념이란 모호해서 알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자기가 늙어가고 있다는 분명한 현실이 본인에게는 언제나 추상적인 관념처럼 흐릿하고 모호하다. 그래서 시간이 훨씬 지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때 그제야 늙음을 인지하고 후회하며 아쉬워한다. 나도 그랬다. 젊음의 시간이 지나가는 길을 보지 못했다. 어느새 갑자기 노년이라는 웅덩이 곁에 실려와 버렸다.
며칠간 '작은 이룸'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살아가야 할 길에서 꼭 만나야 할 필수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상의 생활 속에 숨어 깃든 이 작은 보물을 깨내어야 한다. 습관으로 굳어지지 않고, 새로운 눈으로 관찰하며, 이루고 싶은 것을 열심히 찾고 노력하자. 그리고 하나씩 그것을 건져내자. 똑 같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똑같은 시간은 없다. 다시 쳐다보고 작은 것을 얻어내고 즐거워 하자. 큰 것 기대하지 말고 요행도 바라지 말자. 작은 것들이 내가 사는 일상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며 나와 함께 할 때 큰 행복은 찾아들 것이 분명하다.
푸르스트는 말했다. '아주 작은 것만으로도 삶의 시든 모습을 지우기에 충분하다고.' 난 아주 작은 그것이 일상에서 만나는 작은 이룸(성취)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말했다. '죽음이 깃든 얼굴에 젊음을 돌려주는 일은, 얼룩 때문에 예전처럼 반짝거리지 않는 그런 초상화에 낀 얼룩을 제거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일지 모른다'라고.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일상에서 길어지는 순간 그의 말대로 우리는 죽음의 얼룩을 쉽게 지울 수도 있을지 모른다.
젊음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노년의 시간에 들어가고 있는 나. 나는 어떻게 남은 시간을 살아내야 하나?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살자. 잔잔한 즐거움이 스며들 수 있도록 나를 낮추자. 작은 행복을 날마다 거둬들이자. 시간이라는 선물을 두 손으로 받들며 모시고 살자. 그러면 그 시간은 나의 인생을 열심히 그려 낼 것이다. 내 속에 숨은 섬세한 감성과 선한 진심을 그려낼 것이다. 마치 화가가 그림 하나를 평생토록 붙들고 매해마다 완성해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