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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새롬 Apr 12. 2018

#110.다시 유럽, 낭만의 파리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프랑스 #파리 #한인민박

#에펠탑 #개선문 #오르세미술관

#2017년10월18일~19일


<모함메드의 아련한 뒷모습. 안녕!>

 시와 사막을 떠나던 날, 누군가 우리 뒤를 따라 새벽 버스에 올랐다. 며칠간 우리에게 마을을 소개해 주었던 모함메드였다. 그는 배웅하러 오겠다는 말을 이렇게도 성실히 지켜주었다. 짧은 덕담을 남기고 뒤돌아 버스에서 내리는 그의 모습을 보는 내내 마음속에 고마움과 아쉬움이 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성을 다해 시와 마을 안내를 맡아 준 모함메드. 한 달 간의 이집트 여행 중 이곳에서의 기억이 가장 진하게 남는 건 아마도 이러한 그의 마음 씀씀이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출처:파리투어민박 홈페이지. 여자 8인실 풍경.>

 누군가의 따듯한 배웅을 뒤로한 채 아프리카 대륙을 떠난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향했다. 수명 단축의 지름길인 고된 새벽 비행을 마치고 파리에 도착하니 한껏 차가워진 가을 공기가 몸에 한기를 마구 불어 넣었다. 우리는 미리 예약해둔 한인민박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램수면에 빠져들었다. 세 시간 정도 세상 다시없을 꿀잠을 자고 일어나니 저녁 6시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식당에 앉아 한 시간 반 뒤에나 시작될 저녁밥 시간을 애타게 기다렸다. 내가 이렇게 밥시간을 기다리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묵게 된 '파리투어민박'은 도시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대신 1인 23유로(약 30,300원)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하루 두 끼의 한식을 제공해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치킨 파티. 이모님 땡큐 쏘머치.>

 외출했던 민박집 투숙객들이 하나 둘 귀가하자 식탁 위로 이모님의 정성 가득한 음식들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첫날 저녁 메뉴는 바삭하게 튀긴 치킨과 칼칼한 육개장 그리고 각종 밑반찬이었다. 한기가 들었던 몸에 뜨끈한 육개장 한 숟가락이 들어가니 순식간에 손발이 따듯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 입 가득 베어 문 치킨은 그동안 항상 느껴왔던 2%의 부족함을 채우기에 충분했고, 간이 딱 맞는 밑반찬들은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주었다. 역시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맛있는 것을 먹는 기쁨. 이것이야말로 소확행이지. 암 그렇고말고.     

<넘나 예뻐. 저대로 열쇠고리 만들고 싶었다. 진심.>

 저녁 식사가 끝나고 야경을 보러 간다는 투숙객들과 함께 밤나들이에 나섰다. 해가 짧아지는 시기라 그런지 8시밖에 안되었음에도 거리는 온통 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우리에게 여행 중 밤마실은 흔한 일이 아니다. 안전을 위해 늘 해지기 전 숙소에 돌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섯 명이 함께 하니 두려울 게 없었다. 그래서 다 같이 지하철을 타고 에펠탑 인근 역까지 신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역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니 드디어 저 멀리 따듯한 주황빛 조명을 입은 에펠탑이 나타났다. 별 기대 없이 마주한 탑은 생각보다 컸고 화려했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탑 앞에 조성된 푸른 잔디에는 와인과 샴페인을 마시며 낭만을 노래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내 손에는 그 흔한 맥주 한 캔 들려있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싸한 가을의 밤공기와 눈 앞에 펼쳐진 지극히 이국적인 풍경들에 취해 마음이 붉게 상기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예쁘고 난리람.

<독립문 아치 아래 1년 내내 꺼지지 않는 평화의 불꽃.>

 격한 설렘을 안고 우리는 파리의 밤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다리도 건너고 인적이 드물어진 거리들을 지나 30분쯤 걸었때 세상에서 가장 큰 개선문이라는 '에투알 개선문'과 마주치게 되었다. 에투알 개선문은 나폴레옹 1세가 19세기 초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만든 문이지만, 1920년 1차 세계대전 무명용사의 묘비를 안치한 이후로는 평화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개선문 아치 아래 위치한 무명용사의 묘비에는 추모의 의미와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상징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항상 피어있다.

<인생샷 두 번 건지려 했다가는 요단강 건널 각.>

 개선문을 사진에 담으려고 휴대폰을 꺼내 드니 함께 간 일행들이 이곳이 아니라며 나를 끌고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리고 초록불로 신호가 바뀌자 길을 중간까지만 건넌 뒤 바닥에 그려진 중앙선을 따라 도로 한복판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이래도 되나?' '나는 어글리 코리안이 되는 것인가?' 등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심통을 느끼면서도 나는 어영부영 일행들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도로 한복판에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당당하게 작은 길이 나있었다. 그래서 나도 당당하게 인생샷을 건져왔다. 그리고 다음 날, 누구나 개선문에 오면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도로 한복판에 줄을 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딱히 통제하지 않는 것을 보면 금지된 행위는 아닌 것 같아.. 라며 오늘도 쫄보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태양의 융단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 세느강 풍경.>

 이렇게 첫날 다녀온 밤마실은 '도로 진맥진한' 극기 여행의 시작이 되었다. 우리는 동이 트자마자 아침밥을 챙겨 먹고 거리로 나가 최소 12시간 동안 굉장한 각성 상태를 유지하며 곳곳을 쏘다녔다. 이런 와중에 살인적인 식비를 아끼겠다고 외출 전 민박집 이모님이 챙겨 주신 토스트 하나로 점심을 때웠고, 저녁은 반드시 숙소로 돌아가 먹곤 했다. 그 결과 파리에 머문 5일간 2인 하루 평균 식비 8유로라는 기염을 토할만한 기록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우중충한 유럽의 가을 날씨. 그러나 그마저 낭만.>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늘 아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짠내 날만큼 처절하게 아낀 경비는 평소 궁금했던 이야기들과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들에 사용했다. 이러한 우리만의 기준으로 선택된 첫 번째 탕진 포인트는 바로 미술관과 박물관이었다.

<117년 전 세워진 기차역에서 떠나는 과거 여행.>

 오르세 미술관은 햇살이 나지막이 흘러드는 오래된 기차역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떠남의 시간을 알리던 거대한 시계와 둥그런 아치형 지붕들은 이곳에 배인 과거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기차와 승객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이곳은 여전히 수많은 여행자들에게 과거로 떠날 수 있는 티켓을 판매한다. 각각의 사연을 품고 있는 작품들을 타고 먼 과거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티켓을 말이다.    

<예술과 외설의 기준은 무엇인가. 참 어렵다.>

 우리는 미리 한국어 가이드 투어를 신청해 부족한 사전 지식을 채우며 과거 여행에 올랐다. 귀에 쏙쏙 박히는 서양 미술사 전공자의 설명을 들어서인지 만났던 모든 작품이 흥미롭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특히 예술과 외설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란의 주제가 되고 있는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프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충격 그 자체였다.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는 여성의 성기를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작품이라니. 사실 이 그림의 모델이었던 조안나는 당시 쿠르베 못지않게 유명했던 제임스 휘슬러라는 화가의 연인이었다. 그리고 제임스와 쿠르베 또한 평소 서로를 존경하는 막역한 사이였다. 하지만 자신의 연인을 모델로 이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안 제임스는 분노하게 되고,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쿠르베와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뭐 어디까지나 학계의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오르세에서 고흐랑 르누아르 작품 다음으로 좋았던 그림.>

 밭 갈던 소가 당장이라도 캔버스를 찢고 뛰쳐나올 것 같았던 여류작가 로자 보뇌르의 '니베르네에서의 쟁기질'은 정말이지 넋을 놓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흙의 질감부터 푸른 나무들의 생기와 일하는 소들의 미세한 근육까지. 그녀가 이렇게까지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관찰 때문이었다. 아뜰리에에서 직접 사육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근처 동물원과 숲, 농가를 찾아가 동물들을 관찰했다. 어떨 때는 남장을 하고 도살장에 가 해부학과 동물들의 움직임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 결과 그녀는 여성이 주목받기 어려웠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든 예술가들의 꿈이라는 살롱전에서 대상을 차지하게 된다. 1848년 26살의 그녀가 대상을 받았던 작품, 그것이 바로 '니베르네에서의 쟁기질'이다.

<몽글몽글 샤랄랄라 울렁울렁 울렁대는 르누아르의 예쁜 그림.>

 이밖에 배달의 민족 CF 때문에 유명해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도 보고, 몽환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도 만났다. 이렇게 하루 종일 고전주의부터 추상주의까지 미술사를 쭉 훑으며 가장 좋았던 것은 나도 몰랐던 나의 미술적 취향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행복의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죽는 그 순간까지 노력했던 화가 오퀴스트 르누아르. 그의 그림에는 사람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 물 위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감처럼 강렬하면서도 부드럽게 스며드는 르누아르의 따뜻하고 포근한 감성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그런 것들에 참 취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르세 관람을 마치기 전, 가이드님은 우리를 특별한 공간으로 인도했다. 살아 있는 동안 판매한 그림 단 한점, 광기와 결핍의 중간 그 어디쯤에서 끊임없이 삶을 표현하고자 했던 비운의 천재 고흐의 작품이 걸려있는 방이었다. 프랑스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는 고흐를 보고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남자는 미치게 되거나, 아니면 시대를 앞서 가게 될 것이다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 갔기 때문이었을까. 고흐는 결국 미쳐가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태양을 통째로 삼킨듯한 노오란 해바라기를 통해, 하늘을 가득 매운 별빛과 어둠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강렬한 결을 통해, 그에게 주어진 서른일곱 해라는 짧은 시간을 다해 그렇게 삶을 노래했다. 그래서 나는 늘 고흐의 그림에서 강한 힘과 강한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오르세에 전시되어 있는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별을 보는 것은 언제나 나를 꿈꾸게 한다. 왜 하늘의  점들에는 프랑스 지도의 검은 점처럼 닿을 수 없을까? 타라스통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듯이, 우리는 별에 다다르기 위해 죽는다.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中>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릴 무렵 그는 고갱과 싸우고 자신의 귀를 잘랐다. 마음 기댈 곳 없이 요양원에 머물고 있던 그에게 밤마다 뜨는 창밖의 별은 무한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이자 열망하는 이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별에 다다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서있는 동안은 말이다. 그만큼 무거운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800여 점이 넘는 그림들을 남겼던 빈센트 반고흐. 그는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다음 해, 서른일곱의 나이로 그렇게도 바라던 별에 닿게 되었다. 지상의 별이 하늘의 별이 된 것이다.

<마지막 그림까지 놓치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그가 마지막을 보냈던 파리 외곽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그린 작품까지 꼼꼼하게 챙겨 본 뒤 오르세를 나왔다. 그동안 그림은 글처럼 직접적 표현이 안 되는 간접적 표현의 매개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흐의 그림에서는 신기하게도 그의 기분과 마음이 오롯이 느껴졌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가 자신의 기분을 나에게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림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한 시각적 대화의 매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맛있는 음식을 포기한 대신 알게 된 새로운 소통의 방식. 파리 여행의 풍미를 살려줄 좋은 아이템 장착이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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