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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Mar 09. 2023

사랑은 데칼코마니가 아니다

- 더 랍스터(2015) -


     모든 이야기 작법에서, 압도적인 설정은 곧 되는 판을 의미한다. 더 랍스터(2015)는그 위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한 영화다. 무대가 카네기홀이면 이미 운수가 트인 것인데, 거기서 무형문화제 수준의 윤무를 보여줬으니, 찬사는 당연한 처사다. 보통 이 영화를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실이다. 이 영화의 카피도 "사랑에 관한 가장 기묘한 상상"이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 이 영화의 무대라고 생각한다. 거기서 선보인 아크로바틱은 '자기애'와 '사상'이다.


1. 사람은 솔로로 살아갈 수 있는가?


    인간이 사랑을 원하고, 성관계를 바라고, 가족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사유 이전의 본능적인 원망이다. 진화심리학이든 일반 심리학이든,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방향성이고, 극단적인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면 대부분 이를 따른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는 사랑을 할 수가 없는 상황에 빠지는 시기를 맞으며, 누군가는 그 시기가 생애와 일치한다. 그들의 결핍은 고향에 대한 기억을 잃은 타지인과 맞먹는다.


    하지만 그 누군가도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살아야 하고, 상술한 결핍은 필연적이다. 이는 혼자 지내는 법을 잘 배우는 것이 생존과 직결된다는 의미다. 이 영화는 한 경기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사랑 실패자들에게 자신의 능력 발휘 기회를 앗아가는 것에서 출발한다. 선악과 과실 여부를 막론하고, 결혼관계를 실패한 이는 강제로 호텔에 가야 한다. 유예 기간 안에 다시 사랑에 성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한다면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렇기에 호텔에 오게 된 대다수는 자신의 실패를 음미할 새도 없이 관성적인 발버둥을 치게 되고, 호텔의 시스템은 이를 명확히 긍정한다.

  

2. 이데올리기에 필적하는 이분법


    영화 속 사회는 개인의 자아를 오롯이 거시적인 체제의 것으로 삼는다. 개개인들의 가족관계 유지는 곧 사회의 힘을 의미하게 되고, 사회는 이들이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도록 구조를 설계했다. 호텔에서의 유예기간을 늘리기 위해서는 외톨이(루저)를 잡아야 하고, 호텔 바깥 세상에서도 외톨이를 단속한다. 사회는 개인에게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강제하며, 도움이 되는 능력의 기본이 바로 사랑이다. 정확히는 정상적인 가족관계인데, 사회는 이걸 사랑의 '주입'으로 완결지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한 능률은 가장 고차원의 공리가 되며, 그걸 따르기 위해서는 수감자와 다를 바 없는 호텔 투숙객들의 권리 따위는 동물만도 못하다. 사회는 부품이 되지 못한 실패자들을 동물로 만들고 케어도 제대로 안 한다. 영화 속 숲 장면에서 계속 등장하는 뜬금없는 동물들은 공리주의의 희생자들을 훌륭하게 연출한 것이다.


    이 구속의 사회에 저항하는 세력이 바로 외톨이들이다. 이들은 호텔 투숙객 출신으로, 호텔의 시스템에 전면으로 반항한다. 그래서 문제가 됐다. 사회는 사랑의 가치를 외면한 반면, 이들은 사랑의 의미를 묵살했기 때문이다. 사회가 인위적인 투약으로 강제로 짝짓기를 시킨다면, 외톨이들은 모두를 거세해 강제적인 건강함을 조성한다. 그리고 이는 지극히 신체적, 능률적인 방면에 한정된다. 결국 사회와 외톨이들은 철저히 대립되는 사상이지만 공통점이 많다. 양쪽 다 진정한 사랑에는 가치를 두지 않으며, 효율에 집착하고, 사랑과 비사랑의 중간 관계인, 소위 말하는 썸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사회는 썸을 공장 돼지들처럼 억지로 연결시키고, 외톨이들은 썸을 관상용 나무의 가지를 치는 것처럼 잘라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 데이비드는 어떤 캐릭터일까? 사실 데이비드는 환경에 휩쓸리는 캐릭터다. 잘 구축된 캐릭터지만,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한다기 보다는 외부의 자극에 느릴지언정 확실히 반응하는 인간 군상이다. 데이비드가 호텔 생활에 질려할 때 이런 나레이션이 나온다.


 '감정이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감추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


    전자는 호텔에서 살아남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상대에게 마음이 생긴 외톨이들의 삶을 의미한다. 결국 이 나레이션은 데이비드의 탈출의 복선이 된 셈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관점은 동물과 인간의 모호한 구분이다. 사회의 구부정한 체계에서 기인하지만, 작중에서 동물보다 못한 인간이 있고, 인간이랑 다를 바 없는 동물을 추론할 수 있다. 후자는 당연히 재사랑에 실패한 루저들이다. 전자는 이 영화에서 등장하지 못한 가망 없는 미혼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 굉장히 합리적인 의문을 떠올릴 수 있다. 아무리 영화가 쟤네들을 루저라고 치부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기혼자들이다. 그러면 이 세계관에서 모태솔로는 어떠한 위상을 나타내는가? 호텔 투숙객들은 돌싱이다. 현대사회에서 모솔보다는 나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 영화 속 사회에게 미혼자란, 가능성의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잘 되면 사회의 일원이 되고, 안 되면 관심을 줄 필요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괜히 호텔이 기혼자들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형벌인 동물화는 쓰레기들보다 조금은 나은 기혼자들에게 차가운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영화 속 사회는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리하면, 이 영화는 두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며, 이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대상은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한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한 여성이 두 마리 검은 당나귀 중 한 마리를 사살하는 것인데, 이도 몇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한 마리가 사회의 사상, 한 마리가 외톨이들의 사상이라면, 이 둘은 구분할 수 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똑같이 뭐가 묻은 개들이라는 거다. 그 와중에 한 마리가 총에 맞아 쓰러지고, 다른 당나귀가 쓰러진 당나귀에게 다가간다. 이는 한 사상의 파멸 혹은 그 사상에 대한 통찰을 통한 이분법에서의 탈출을 유도하는 메시지라고 볼 수도 있다.


3. 랍스터의 두 집게


    왜 제목이 랍스터인가? 일단 기능적으로 따지면 상당히 훌륭하다. 시선도 잘 끌리며, 시놉시스와 대조해보면 흥미도 유발한다. 영화를 다 본 우리는 랍스터가 데이비드의 가능성들 중 하나인 말로를 의미한다고 단순하게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봐도 참 잘 지은 제목이지만, 랍스터의 특성에 더 집중해보자. 랍스터의 가장 큰 특징은 집게다. 번식, 나이 다 필요 없고 눈으로 딱 들어오는 신체적인 특징! 하지만 두 집게는 크기가 다르다. 한쪽이 크면 한쪽이 작다는 소리다.


    이 영화는 자기애에 대한 영화다. 영화 속의 모든 커플들은 자신과 비슷한 짝을 만나고 싶어한다. 절름발이는 코피가 잦은 여자를 꼬시기 위해 억지로 코를 박아 피를 흘렸고, 비스킷을 좋아하는 여성은 데이비드에게 작업을 걸 때 그의 강아지에게 비스킷을 먹이라고 권유한다. 모두 공통점을 억지로 만들려 하는 시도들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등장인물들이 요구하는 비슷함은 이내 동일함이 돼 버린다. 냉혹한 여자는 데이비드가 자신과 똑같이 사이코패스이기를 바랐고, 근시 여자는 데이브드도 장님이 되기를 바랐다. 우리는 사랑에 빠질 때, 전혀 다른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보통 비슷한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는 빠르게 가까워지는 정공법이기도 하며, 상대에게 기대를 강요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이게 심해진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랍스터인 것이다. 랍스터의 집게들처럼, 사랑하는 상대가 자신과 똑같아 보이지만 사실 다르다는 진실을 외면하는 이들이 얼마나 기형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지 그 과정을 너무나 극적으로 묘사했다. 이 포인트가 영화의 열린 결말의 핵심이다. 데이비드는 왜 랍스터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집게발을 제외한 특징들을 읊는다. 데이비드가 전혀 통찰하지 못한 상태를 보여줬다. 반면 스테이크 용 칼로 눈을 찌를까 말까 고민하는 데이비드는 어떠한 강도든 어느정도 진리를 깨달았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오프닝 시퀀스를 다시 살펴보면, 완벽히 똑 같은 두 당나귀는 자기애를 사랑에 투영하는 어리석은 개인 혹은 커플에 해당하며, 이를 사살하는 것은 이 유혹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4. 왜 열린 결말인가?


    그래서, 이 영화의 메시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얼추 안 것 같다. 근데 왜 결말을 열었을까? 왜냐하면 데이비드는 우리를 포함한 관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상술한대로, 조금씩 적극성을 보이지만 상황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이비드는 마치 영화를 보며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우리와 닮았다. 그리고 우리도 영화에서 보여준 이분법적인 사상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애초에, 왜 어떤 작품은 결말 혹은 설정을 열어버리는 걸까? 독자의 해석을 유도하고, 더 두꺼운 작품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당연하고, 또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 작가의 확실한 의지 표현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이미 사랑을 찾았고, 앞으로 적절하게 사랑하는 일만 남았다. 생존은 그 중요한 일환이겠지. 그리고 데이비드와 동일시되는 우리도 영화를 보면서 답을 찾았다. 그렇다면 데이비드의 망설임과 선택은 우리의 행동적인 가짓수를 의미하게 된다. 정확히는 자극이다. 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은 다 보여줬고, 캐릭터도 설계한 바 제대로 구축됐으니, 마지막으로 관객을 어루만져 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더 랍스터는 이 영화의 결말이 필요 없기 때문에 결말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더 고전적인 관점으로 열린 결말을 살펴보면 확률론이 돼 버린다. 그래도 해 본다면 아마 데이비드는 눈을 찌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근시 여자에게 설득을 하든, 그녀로부터 도망을 가든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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