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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Mar 09. 2023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당신의 멸망을 선사한다

- 파이트 클럽(1999) -


    우리는 각기 다른 강도로 상대와 사회를 믿는다. 그 믿음의 크기가 행복을 결정짓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 느끼는 안정감에는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파이트 클럽(1999)은 ‘신뢰’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익히 아는 영화 속 신뢰는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상응하는 행동에 초점이 맞춰진 서사적인 관념이었다면, 이 영화는 더 넓은 의미로 표현했다. 신뢰와 비슷한 분위기인 관념들도 신뢰의 광의 안 쪽으로 집어넣어 햄버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신뢰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로 관계적 의미의 신뢰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느끼는 신뢰를 의미한다. 친구를 만나면 우정이 쌓이고, 이성에게 끌리면 사랑이 싹튼다. 그리고 서로 공감하지 못하거나, 합이 잘 안 맞으면 사달이 나기도 한다. 주인공이 고환암 모임에 참석해 환자들의 슬픔과 유대감을 빌린 것은 신뢰를 이용한 사례이고, 말라가 타일러의 기행에 상처받은 것은 자신에 대한 신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체계적 의미의 신뢰는 내가 아까 비유한 햄버거 위아래의 빵 같은 것이다. 우리는 사람만이 아니라 거시적인 개념도 신뢰할 수 있다. 인간들이 모여 이룬 사회나, 다수의 사람들이 쫓거나 외면하는 다른 관념도 이에 포함된다. 월급이 적은 서비스직 종사자가 외제차 보유자에게 치를 떨거나, 거듭된 사랑 실패로 비자발적인 독신주의를 고수하는 것은 각각 자본주의와 사랑에 대한 신뢰를 잃은 모습이다. 


    타일러는 상술한 두 신뢰 관계에서 전부 좌절해 버린 캐릭터이며, 주인공의 내면에 쌓인 부정적인 욕망들의 의인화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흐름, 희망적인 자기 계발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 도피처인 파이트 클럽이 점차 커지자, 그의 사상은 단순히 과격한 넋두리에서, 비문명을 지향하는 야만성으로 확대된다. 편안함을 거부하고, 고통을 숭배하며, 자포자기의 알리바이로 우연성과 암울한 전망을 차용했다. 현대 사회와 다른 현대인들에게 소외받는 하층민들의 관점에서는, 타일러의 사상과 리더십은 한소끔의 손쉬운 구원처럼 느껴질 것이다. 


    우리는 신뢰가 그리 아름답기만 한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신뢰를 저버리면 그 긍정적인 에너지가 정확하게 전복되기 때문이다. 즉 신뢰는 리스크에 구애받고, 좌절된 신뢰는 항상성 있는 두려움이 된다. 그래서 주인공이 어렵사리 구한 마음의 보금자리가 말라에 의해 어지러워질 때 타일러가 탄생했다. 아무런 신뢰도 하지 않아 절대 상처받지 않는 자유의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타일러는 그 자유를 ‘진실’이라고 믿는다.  신뢰를 지표로 타일러의 사상을 살펴보면 초토화 작전이 왜 굳이 신용 카드 회사를 불꽃놀이 장소로 골랐는지 알 수 있다. 신뢰를 통해 운용되지만, 경제적 능력이 떨어진 사람들은 철저히 외면되는 곳이기에, 신용 경제 시스템을 무너뜨리면 타일러의 진실은 자신에게만 고수되는 것이 아닌 거스를 수 없는 '사실'로 변모하게 된다. 


    파이트 클럽은 그런 타일러의 작은 진실의 시작점이다. 문명사회에서 하면 안 되는 물리적인 폭력을 휘두르지만 여타 폭행 사고처럼 강제성이 없고, 남자들의 자존심이 걸리는 승패 개념도 없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어그러지면서, 폭력 자체에 심신을 담그는 곳이다. 만약 타일러가 초토화 작전을 계획하지 않고 주인공과 잘 타협해서 지냈다면, 파이트 클럽은 정상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해소의 장에서 변질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스토리를 곱씹어서 파악해 보면, 파이트 클럽은 피 끓는 일탈의 시발점에 불과하다. 현대 문명사회는 여러 신뢰가 위협받는, 사람답게 살기 힘든 곳이라는 주장에 이견은 없지만, 방법론 고찰에 대한 완전한 불식은 윤리적 허점을 숨길 수 없다. 결과적으로 파이트 클럽은 공연한 상호파괴의 산실이 돼 버렸다.  


    주인공은 결말에서 타일러를 물리쳤고, 밀라에게 마음을 전했다. 건물이 폭발로 부서지고, 자기 턱관절도 날아간 판국에 둘이 맞잡은 손은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영화 초반부의 주인공은 지극히 일반적인 현대인이었다. 직장이 있지만 재미가 없고, 일상이 있지만 낙이 없는, 전형적인 삶에 찌든 어른. 몸도 멀쩡한 그가 병환 모임에 참석할 정도로 깊은 감정에 메말랐던 이유는 전반적인 신뢰의 부재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신뢰, 즐거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신뢰, 그리고 현재 행복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신뢰 말이다. 그 모든 좌절이 응축된 타일러를 무찔렀다는 것은 주인공이 내면의 패배주의를 이겨냈음을 의미하며, 이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관통하는 건강한 자기 파괴와 연관된다. 결국 주인공과 우리를 포함한 모두는 안일하게 세상이 변했으면 하고 바랄 게 아니라,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자아상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강설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은 영화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을 투영했기 때문이고, 타일러의 필름 장난질과 흔들리는 화면은 제작진들이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다. 이미 상영 중이라면 조작한 필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이 영화의 지향가치로 사회를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그 답답한 사회 한편에 강렬한 족적을 남기겠다는 집념이 느껴졌다. 그래서 결말의 무너지는 신용카드 회사와 잠깐 비집고 들어온 포르노 이미지는 완성도 있는 대비와 설득력 있는 포부를 동시에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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