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새월 Mar 09. 2023

고통이 곧 영광이다  

- 페인 앤 글로리(2019) -



    괴로움은 당면한 직후에는 사라졌으면 하지만, 지나간 즈음에는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두 정서는 수평적인 관계가 전혀 아니고, 보통 전자가 크게 이기기 마련이다. 예술가는 이 패배에서 가장 큰 메리트를 얻을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고, 후자의 정서를 자기애와 연결시키기 위한 청사진이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페인 앤 글로리(2019)는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겼다. 영화 속 명감독인 살바도르 말로는 신체적인 제약과 심리적인 두려움으로 영화를 찍을 수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삶의 태도와 방향성을 단정 지었지만 여전히 살아있기에, 그는 당연히 사람과 만나야 하고 잉여 시간과 싸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고 다시 예술의 세계로 돌아오는 정신적인 여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예술가에 가까운 예술가이다. 이 말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선으로 다가가기 어려운 영역에 속해 있고, 외로움과 괴로움에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뜻이다. 성정체성, 종교, 감정, 모성애, 예술관 등 알모도바르는 통용되는 주제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영화에 적극적으로 반영해 그 입지를 쌓았다. 그의 관찰은 인간의 모습들 중 가장 날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이를 아무런 가감 없이 화면에 담는다. 그의 초기작 나쁜 버릇(1983)에서는 수도원 수녀임에도 불구하고 제한 없이 욕망에 사로잡히는 캐릭터들을 통해 욕망의 미추와 시비를 막론하고 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감각적으로 연출했다. 나쁜 교육(2004)에서는 욕망을 대하는 캐릭터들의 행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감정의 전파가 어떤 악순환을 불러일으키고 그 픽션에서 감독 자신은 무엇을 느꼈는지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페인 앤 글로리에서 살바도르의 고통은 크게 영화인으로서 겪는 고통과 사람으로서 겪는 고통으로 나뉘지만, 이 둘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결국 거대한 복잡함을 선사하고 만다. 살바도르는 전작의 주연 배우 알베르토와 해후하는데, 30년이 지났어도 둘 사이 감정의 골은 풀리지 않았다. 알베르토가 촬영 중엔 끊으라던 헤로인도 계속 해대며 자신의 연기지도를 부정했지만, 영화 자체의 평가는 훌륭했기 때문이다. 알베르토는 호평 때문에 자신의 잘못이 용납 가능한 것이라 생각하고, 애초에 영화 제작 과정 자체를 완전히 생각대로 이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 살바도르는 영화의 성공과 별개로 알베르토의 독단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리마스터링 GV에서 알베르토의 치부를 드러내고 만다. 알모도바르는 영화감독으로서 작품에 대한 자신의 비전이 동료들에게 어그러지는 과정에서 큰 비애를 느꼈다. 나쁜 교육에서는 감독인 엔리케가 자신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담은 각본을 오랜 친구 이그나시오에게 받고 그와 함께 영화를 찍게 된다. 그러나 이그나시오가 과거의 엔리케와 과거의 이그나시오 중 누구를 연기할 지에 대한 논쟁 때문에 엔리케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 기저에 깔린 고집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어 하는 이그나시오의 이상화된 모습이었다. 결국 엔리케는 이그나시오가 원하는 배역을 연기하게 해 줬지만, 그의 연기가 어느 수준까지 올라갈지, 그 연기가 자신에게 어떤 불쾌함을 유발할지 같은, 그를 배우로서 인정하기보다는 감정의 실험적인 장기말처럼 사용하게 된다. 이를 통해 알모도바르의 연출 고집은 예술적인 재현임과 동시에 자의적인 규정에서 기인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살바도르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잘 돌보기 위해 애썼는데, 어머니는 대화 중 살바도르는 좋은 아들이 전혀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신학교를 중간에 그만뒀다느니, 한창 바쁠 때 같이 살아주지 않았다느니 같은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결국 예술인 살바도르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과 진지하게 대화하다가 살바도르에게 이야기꾼 표정을 짓지 말라며 질색하고, 마을사람들을 영화에 담지 말아 달라고 강요한다. 살바도르 입장에서는 존경과 정성을 담는 시도들이 주변사람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일이고, 살바도르의 이기심으로 보이는 것이다. 살바도르는 자기 본연의 모습 그 자체가 어머니를 실망시켜서 미안하다고 나직이 읊조렸다. 


    이 같은 과거와의 직면은 헤로인을 매개체로 소화되며, 이야기의 구조는 우연을 통해 발전된다. 살바도르는 늦게 배운 마약에 힘입어 무미건조한 삶에 침입하는 필연성들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우연히 만난 지인을 통해 알베르토의 집주소를 알게 되어 수평선 같던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고, 헤로인에 헤롱 대느라 누워있는 사이 우연히 살바도르가 묵혀 둔 글에 알베르토가 관심을 갖게 된다. 알베르토의 부탁을 받아줘 그 글이 연극으로 연출됐기 때문에 살바도르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전 연인과 해후하게 된다. 그렇게 혼자서 결정지은 아픈 옛사랑의 감정들을 정리하게 되자 진지하게 치료에 힘써 예술에의 의지를 되찾게 되었다. 그때부터 헤로인을 끊기로 결심하게 되는데, 더 이상 과거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모도바르는 언어적인 구조로만 영화를 찍지 않았다. 시종일관 출현하고 유지되는 빨간색으로 영화의 톤과 메시지를 확연히 잡았다. 나쁜 버릇에서는 주연 욜란다의 드레스가 빨간색인데, 이는 다른 수녀들과 욜란다를 구분 짓는 시각적인 연출이다. '치욕으로 구원하사' 수도원의 수녀들은 각자 고집하는 욕망이 있고, 몇몇은 이를 치욕이라 여기며 죄의식을 갖는다. 그들은 그 자기 비하에 중독되어 자신들의 가능성을 전면 부정하는 반면, 욜란다는 자신의 죄와 욕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미래를 준비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페인 앤 글로리에서 빨간색은 고통으로, 살바도르의 일관되는 정서를 추상화하는 동시에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야기 전반부가 가지는 의미를 전환시킨다. 알베르토가 어렵사리 살바도르에게 허락받은 연극 중독은 빨간색 벽면에 하얀 스크린으로만 무대가 구성된다. 그 연극의 후반부에, 스크린 중간에서 독백하는 알베르토를 줌 인하는데, 그러면서 스크린을 액자처럼 감싸던 빨간 뒷배경이 사라지고 스크린 자체가 배경이 된다. 알베르토는 그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후 자신의 유년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영화가 자신을 구원했다는 마지막 대사를 날린다. 결국 그 시퀀스는 대본의 원작자인 살바도르 말로가 대본 속 자신의 과거에 대한 고통을 이겨내고, 그걸 이겨내게 해 줬던 영화에 대한 사랑을 상기하는 것을 시각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삶의 괴로움들을 이겨내고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된 살바도르의 미래를 암시하는 복선이다. 페인 앤 글로리의 빨간색은 영화 초반부에서 살바도르 말로의 고통을 강조하는 장치지만, 이윽고 과묵한 무용담으로 승화하게 된다.       

    예술가에게 자신의 고통이란 가장 성가시지만 가장 매력적인 소재다. 그 고통을 광택 서린 포장지로 감싸든, 가능한 한 분해해서 전시회를 열든 진실되게 표현하기만 했다면 그 작품은 자기 치유에 종착하게 된다. 알모도바르는 페인 앤 글로리에 지금까지 영화를 만들면서 사람에게 상처 주고 상처받으면서 느낀 모든 고통을 담았고, 그 자체가 하나의 개인적인 성과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페인 앤 ‘글로리’인 것이고, 자신과 어머니의 과거를 똑같이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컷사인을 날리는 씬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당신의 멸망을 선사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