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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Mar 10. 2023

오렌지색 타임캡슐

- 시계태엽 오렌지(1971) -


    시계태엽 오렌지(1971)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샤이닝(1980)으로 저명한 스탠리 큐브릭의 문제작이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난해함과 감정 이해의 낯섦 때문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니체의 철학을 음악에서 출발시켜 쌓아 올린 작품이라 당연히 깊은 이해가 쉽지 않고, 장르 영화로써 출중했던 샤이닝도 나치의 악행을 연결 지어야 큐브릭이 그 영화에서 구조화한 진짜 공포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두 영화는 구조를 숨겼어도 지극히 단순한 감정선을 보여줬다. 로리타(1962)는 지금도 논란이 되는 소아성애에 대해 다뤘지만, 사랑과 집착을 이성만으로 구분하려다 망가진 험버트와 그의 손아귀에서도 본성을 잃지 않은 아름다운 로리타로 대비를 극대화했다. 그러니 개봉했을 당시 소아성애가 낯설었던 사람들도, 소아성애범죄가 들끓어 경계하는 우리들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플롯이었다.


    반면 시계태엽 오렌지는 주인공부터 매우 강도 높은 피카레스크이며, 스크린 곳곳에는 여성의 나체와 남성기가 널려있고, 피해와 가해는 선악을 배제한 인과관계로 엮여있을 뿐이다. 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은 알렉스가 끝내는 갱생되거나, 본성을 억누르지 못해 응징당하는 결말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중간중간 나오는 알렉스의 나레이션은 캐릭터에게 몰입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몰입하게 하는 장치가 돼 버린다. 따라서 이 영화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몇 미터 뒤에서 바라보며 알렉스의 객기에 집중하기보다는 스탠리 큐브릭의 일갈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1. 루드비코 실험에 대하여


    루드비코 실험은 조작적 조건화의 일종으로, 천성적이든 환경적이든,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악한 범죄자를 개조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이 실험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선택의 부재다. 교도소 신부는 선과 악에 대하여 선택은 인간의 필수적인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그 의견에 따르면, 선택에 의한 악행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글러먹고 모멸을 유발하는 악인들은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여전히 인간인 것이다. 하지만 루드비코 실험은 그 선택을 거세함으로써 인간의 능력을 상실케 한다. 한창 냉전 중일 때 나온 영화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실험은 사회에 부합하는 인간을 강제적으로 만들려 한 당대의 모습을 투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루드비코 실험은 정확히는 선택의 능력을 빼앗는 조치가 아니라 선택의 기회를 빼앗는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알렉스는 실험을 받고 석방한 뒤로 폭력을 선택하려 할 때마다 몸에서 극심한 거부반응으로 실패하고 만다. 만약 루드비코 실험이 선택 능력 자체를 거세했다면 알렉스가 주먹도 쥐지 못해야 하지만, 알렉스는 주먹을 꽉 쥐고 내지르지 못했다. 결국 루드비코 실험은 본 저의도 충족시키지 못한, 세뇌 수준까지 못 미치는 일개 제약에 그치는 것이다. 루드비코 실험을 필요악이라 결정지어도, 이러한 특성 때문에 루드비코 실험은 실존적인 강제성이 아니라 피험자의 불편함에 그치고 만다. 그래서 알렉스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자신은 치유되었다는 말은 호오와 선악을 막론하고서도 사실이다. 




2. 악은 마초이즘에서 기인하는가? 


    이 영화에서 주로 다루는 배경 이미지는 노골적인 선정성이 주를 이룬다. 여성성은 글자 그대로 배경처럼 전시되는, 망가진 사회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남성성은 이를 구축한 대상으로, 폭력을 진두지휘하는 악으로 표상된다. 알렉스 패거리는 15~16세기 때나 유행한 코드피스를 차고 있고, 자주 가는 술집에서 여성의 가슴 모형에서 우유가 나오며, 알렉스의 첫 살인 흉기는 남성기 조각상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개인의 악함과 거시적인 모순을 동시에 화면에 담는다. 


    알렉스가 집은 남성기 조각상은 피해자인 늙은 여자가 높이 사는 예술품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남성성을 악한 가해자, 여성성을 약한 피해자로 설정했지만, 냉전 시대의 날 선 거시성 앞에서, 성별을 막론한 개인은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알렉스 패거리의 만행으로 아내를 잃은 작가가 근육질 남성을 보디가드로 고용한 점은, 악랄한 마초이즘 때문에 아내를 잃고 자신도 불구가 되었지만, 되려 마초이즘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게 치면 악으로 대변되는 지나친 마초이즘은 냉전 시대 자체의 특성을 투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언급된 정보로 추측하면, 알렉스 패거리였던 쩌리 둘이 경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전시행정으로 인한 선처에 불과하다. 그래서 오랜만에 본 둘의 모습은 알렉스에게 있어서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니라 체제의 부당함을 의미한다. 다른 근거로, 루드비코 실험 때문에 알렉스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들을 수 없게 되는데, 이는 대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개인에 대한 학대다. 그리고 마지막 씬에서, 알렉스는 겨울 눈밭 한복판, 빅토리아 시대 복장을 한 귀부인들 앞에서 섹스를 한다. 이는 과거 세대들이 냉전 시대를 바라본다면 얼마나 추하다 여길지 상상한 씬이다. 큐브릭 감독의 재치 있는 강설이다.    



3. 시계태엽 오렌지, 제목의 의미  


    나는 개인적으로, 제목에 의미를 담지 않은 작품을 싫어한다. 하일권의 네이버 웹툰 삼단합체김창남의 경우, 그 제목은 그냥 로봇 만화의 제목으로써 인상적이다는 이유로 작품과는 관련 없이 채택되었는데, 솔직히 불편했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작품을 끝까지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제목으로 유명한데, 그 설들은 여러 가지 있지만 최대한 내재적인 단서들로 풀어보고 싶다. 시계태엽은 초침이 움직이도록 강제하는 시계 부품이다. 영화 속 설정으로 대입하면 개인을 강제하려는 사회의 조치, 혹은 본성을 거부할 수 없는 악인들의 메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렌지는 무엇인가? 설들에 의하면 인간을 의미하거나, 역설을 위한 오브제로 해석된다. 조금 더 확대해석해 보면, 오렌지는 시계태엽을, 정확히는 시계의 작동을 어그러뜨릴 수 있는 불순물이다. 오렌지 조각을 시계태엽 자리에 부품과 함께 쑤셔 넣고 조립하면, 당연히 시계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오렌지색 피를 흘리며 폐품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오렌지는 영화에서 구조화한 악과 거시성을 거스르는 혁명을 의미한다. 하지만 영화 스토리를 보면, 그런 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알렉스라는 초침이 자신의 템포에 맞게 한 방향으로 돌진하는 결말을 맞았다. 따라서 오렌지는 이 영화를 보고 영감과 자극을 받은 관객들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이 냉전 시대, 갖가지 제약으로 영화를 찍으며 받았던 스트레스를 의협심으로 빚은 타임캡슐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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