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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Mar 10. 2023

성냥공장에서는 불이 붙지 않는다

- 성냥공장 소녀(1989) -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는 측은함을 통해 사회를 비판한 작품이다. 성냥이 안 팔리는 추운 날에, 외삼촌에게 맞을까 봐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안나는 방치된 사회적 약자들 중 가장 약한 부류의 인간이다. 직업과 돈이 없는 와중에 어리고, 곁에 있어줄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성냥공장 소녀(1989)는 핀란드의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성냥팔이 소녀를 재가공한 영화다. 카우리스마키는 성냥팔이 소녀의 요소들을 재해석하면서 사회 비판의 메시지를 강화했고, 원작에서는 없었던 카타르시스를 구축했다. 



    이리스는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퇴근한 후 집에 와서는 모든 가사를 도맡는다. 그녀의 어머니와 의붓아버지는 학대에 가까운 태도로 그녀를 대한다. 이리스가 식사를 차려도 물은 자기들 컵에만 따르고, 어머니는 이리스 스튜에 있는 몇 안 되는 고기조각을 뺏어 먹는다. 이리스가 어느 날, 끌린 원피스를 사서 월급이 적은 걸 들켰는데, 의붓아버지는 이리스의 뺨을 때리며 창녀라는 심한 말을 했고, 어머니는 환불해 오라는 말만 했다. 힘든 가정에서 시작된 힘든 삶이지만 그녀에게도 꿈은 있었다. 운명적인 남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하지만 부모들의 반대에도 환불하지 않은 원피스를 입고 만난 회사원은 그녀를 원나잇 상대 정도로밖에 대하지 않았다. 첫 경험으로 임신한 그녀는 애새끼를 지워버리라는 회사원의 편지에 복수를 결심하고, 회사원과 양 부모를 쥐약으로 죽인 후 공장에서 형사들에게 연행된다. 



    성냥팔이 소녀가 죽기 전 단말마에 가깝게 피운 성냥은 4~5개에 불과했다. 이 말은 안나가 팔 수 있는 성냥이 애초에 많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그 몇 번 안 되는 행인들의 무시가 안나의 동사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카우리스마키는 이 성냥을 공장단위로 늘려 사회의 차가움을 표현했다. 이 영화는 성냥공장의 공정을 고정된 카메라로 담으면서 시작된다. 퇴근한 이리스가 가사에 시달리고, 뻔뻔한 부모들이 식사 후에 보는 뉴스 내용이 이 영화의 첫 대사다. 내용은 차례로, 천안문 시위의 참극, 시베리아 철로 가스관 폭발 사고, 이란의 종교 분쟁 강화다. 이리스는 모든 강제적 의무들을 이행하고 클럽에 가는데, 이리스를 포함한 다섯 여성이 남성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씩 짝을 찾아 떠나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 든 노파에게 남자를 빼앗기고, 이리스는 음료수만 멍 때리면서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화의 첫 음악이 나온다. 


    이 영화는 낱개였던 성냥팩을 거시적인 성냥공장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리스가 받는 학대의 책임을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을 태우며 희망을 가지는 부분은 이리스가 희망을 가지고 힘겹게 살다가, 모든 긍정적인 미래관을 포기하고 살인을 결심했을 때 처음으로 성냥을 사용하면서 뒤집었다. 그리고 그 성냥으로 처음으로 담배를 피우는 것은 동화 속 요소를 영화 속 화소와 맞물리도록 유려하게 변용했다. 



    이리스의 좌절이 분노의 표출을 넘어 미래관의 포기까지 악화되었다는 점은 살인의 구체적인 양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리스는 자신을 원나잇 상대로 여긴 회사원을 살해한 후,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성의 맥주에 쥐약을 푼 물을 넣은 후 자리를 뜬다. 이리스는 그 남성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방금 처음 만났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들이대는 남자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쥐약을 풀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세상의 모습으로 앞으로의 세상도 판단하겠다는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실제로 그녀가 부모를 죽이기 전에, 영업이 끝난 식물원에서 달빛에 의존해 책을 읽는데, 이는 이리스가 모든 욕구와 희망을 포기한, '식물'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음을 상징한다. 


    이리스는 모든 분출을 끝내고 태연하게 성냥공장에 출근했다. 미래를 포기한 이리스는 당연히 경찰에 연행된 후 뒷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집이 아니라 성냥공장이 그녀의 연행장소라는 것은 감독의 마지막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리스의 비극은 단순히 멀리서 볼 걸 가까이서 봤기 때문에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파악해야 할 누군가의 이야기인지 말이다. 안나의 성냥처럼, 이리스가 출근하는 성냥 공장에는 다른 누군가가 불을 붙여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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