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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Mar 11. 2023

인간을 넘어선 휴머니즘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 -



1. 행복이란? 그리고 선행되는 것



    행복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전에 행복이 어떤 타입인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코딩 세계에서는 숫자인 int인지, str의 문자열인지 같은 문제다. 내가 생각하기에, 행복은 감정이다. 행복하고 싶어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행복을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행복을 합의된 사회적 기준으로 인정되는 성공의 갈래 중 하나라고 인지한다. 하지만 행복은 자신의 처지와 미래에 대한 감정론으로 그 여부가 결정된다. 그래서 부자들이 앓는 우울증과 빈자들의 희망찬 눈빛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 선행되는 조건은 자기 자신과의 합의라고 생각한다. 그건 일종의 납득이고, 나쁘게 말하면 분수를 아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다룬 행복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에서 강조하는 것은 행복의 조건이고, 가족애와 연결 지은 것은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행복하기 위한 조건은 역설적으로 실패다. 정확히는 실패에 대한 어느 시야다. 조이가 조부 투파키가 된 이유는 자신의 모든 가능성, 정확히는 존재하는 모든 경우의 수를 전부 느끼고서, 인생에 대한 감정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성공과 실패 모두 정신적인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데, 다른 조이들의 데이터들을 비교했을 때 성공과 실패 중 무엇이 더 많든, 감정 소모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로 추론된다. 하지만 그런 플러스 마이너스 계산과는 별개로 조이는 삶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정도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조이는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서 어거지로 자신의 자아를 돌에 부여하고, 베이글이라는 자살 수단을 강구했다.


    에블린은 조이와 비슷한 능력을 갖게 된 이후에도 조이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조이의 추종자들과 알파버스의 요원들에 혈혈단신으로 싸우면서 말이다. 에블린의 입장은 이와 같다. 다른 세계관의 자신 때문에 망가진 조이를, 지금의 조이를 구하면서 구하고, 이윽고 모든 조이를 구하는 것이다. 에블린은 다른 에블린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많은 실패를 겪었고, 그것은 에블린들 중 가장 무능력하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에블린들이 능력자가 되었다고 좀 과하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있긴 하지만, 에블린은 일반적인 행복관에 의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에블린은 여러 평행 우주의 자신들의 삶을 마주 보면서 조이와 반대되는 시야를 가지게 된다. 모두 사랑스럽다는 것. 그러니 비교적 가장 볼품없는 자신의 삶도, 망가져버린 조이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철학을 강압적 대화로 억지로 주입하는 게 아니라, 그저 진심을 다해 몸으로 전달하고 선택은 오롯이 조이에게 맡겼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고전적이고 비루한 양육관에서 벗어나 부모와 자식 양쪽이 행복해지기 위한 각성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2. 장난감 눈



    웨이먼드가 애정하고 습관적으로 붙이는 장난감 눈. 에블린의 시선에 이는 굉장히 거슬리는 대상이다. 능력도 없고 실실 쪼개기만 하는 남편의 철 안 든 모습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장난감 눈(웨이먼드의 시야)은 사건 해결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발전된다. 웨이먼드가 에블린과 이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이 시야차이 때문이다. 웨이먼드는 삶이 어려워도 따뜻함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에블린은 잦은 실패로 따뜻함을 잃어 대화도 마땅히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에블린이 비로소 조이와 같은 능력을 얻었을 때, 에블린은 자포자기하며 자신의 모든 다른 삶을 망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웨이먼드의 호소 덕분에 웨이먼드의 따뜻함을 이해하게 되고, 이를 조이에게 전달하게 된다. 에블린이 장난감 눈을 이마에 제3의 눈처럼 붙인 것은 노골적인 시각화라고 볼 수 있다. 돌 밖에 없는 세상에서 장난감 눈을 붙이고 다른 돌(조이)에게 다가가는 것도 비슷한 연출을 의도한 것이다.  



3. 왜 하필 베이글일까? 



    조이는 삶에 대한 관점을 상실하고,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시야를 찾다가 베이글에 봉착했다. 조이는 베이글 위에 모든 것을 올려놨더니 블랙홀 비슷한 무언가가 됐다고 했다. 근데 왜 하필 베이글일까? 다른 글을 읽어보니, 일본 선불교에 엔조라는 검은 고리가 있는데, 이게 무존재라는 관념을 뜻한다고 한다. 분명 그쪽이 맞는 해석이겠지만, 모퉁이 영화관이라는 이름에 맞게 정답에 개의치 않고 생각해 볼 것이다. 왜 베이글일까? 면적도 널널한 피자는 안 될까? 일단 베이글의 특성을 살펴보자. 베이글은 단독으로 먹기에는 좀 부족한 음식이다. 퍽퍽하고, 밍밍해서 음료는 물론이고 크림치즈나 다른 재료와 곁들여 먹어야 한다. 하지만 베이글은 제빵 자격증에서 가장 중요한 종목이기도 하고, 공신력 있는 매체와 투표 방식은 찾지 못했지만, 베이글은 인류 10대 발명품 중 하나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5661515)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베이글은 조이의 철학에 대한 역설을 상징한다. 삶을 포기하는 자세로 착안했지만 여러 부분에서 삶을 상징하고 있다. 조이가 베이글을 보여주거나, 현실 세계(에블린이 살고 있는 우주)에 갖고 오기 위해서는 에블린과 손동작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결국 타자와의 교류가 필수 불가결한 대상이고, 조이도 이를 어렴풋이 느꼈는지 베이글이 완성된 이후 에블린을 이해자로 꼬시려 했다. 결국 조이가 원한 것은 자신이 거시성에서 느낀 절망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대상이 필요가 없다면, 조이는 조이의 추종자들과 동반 자살하면 되는 일인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실되고, 진실되게 느낄 수 있는 이해자가 필요했고, 결국 그건 자신을 그렇게 만든 어머니였다. 



4. At once???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결말을 보면, 에블린은 조이의 마음을 구하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잡음(다른 세계의 삶)도 계속 느끼며 살기로 했다. 여기서 변형된 수미상관을 발견할 수 있는데, 에블린이 알파 웨이먼드에게 기본적인 설정을 설명받을 때는 디어드리의 말을 못 듣고는 들었다고 하는데, 산전수전을 겪고 통달한 에블린은 디어드리의 말을 못 듣고는 솔직히 못 들었다고 한다. 에블린의 각성을 시나리오론적으로 적절히 연출한 셈이다. 영화의 결말은 영화의 취지와 구조적인 결정론 상 전혀 문제가 없다. 그냥 내가 의문을 표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세 가지다. 첫째로, 에블린뿐만 아니라 조이도 다른 모든 삶을 동시에 살게 되었다는 점. 둘째로, 에블린과 조이의 능력은 절대 인간일 수 없다는 점. 마지막으로 셋째는 삶에 대한 일반론이다. 삶은 단 하나이기 때문에 삶으로써 느끼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브린과 조이는, 확고한 철학으로 뒷받침하고는 있지만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이 결말이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안다. 어렵고 야박한 시대에, 자기 긍정에 대한 휴머니즘을 전파한 것은 높이 살 만하다. 하지만 나는 욕하고 소리 지르더라도 그게 삶 다운 것이라면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이 관점에서 에블린과 조이의 선택은 냉철하게 보면 오만에 가깝다. 과연 정상적으로 감정을 느끼고 선택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결말은 찜찜한 문제들도 안고 있다. 


    에블린과 조이는 필연적으로 의존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유일한 이해자이며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웨이먼드도 기억을 잃지는 않았으니 같이 술안주 삼아 대화를 할 수는 있겠지만, 초인간적인 시야는 너무나 강력한 법이고, 그렇기에 감정으로 인한 미세한 마찰에 취약하다. 만약 에블린과 조이가 크게 싸우게 된다면 애써 해결한 난장판들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 이를 암시한다고 하기는 좀 뭐 하지만 께름칙한 장면이 있는데, 가족끼리 단체로 국세청에 갈 때, 에블린이 베키에게 머리를 기르라고 한다. 조이와 베키 둘 다 개의치 않았다. 이 장면은 에블린이 각성하긴 했지만 여전히 도사리는 편견에 대한 위험을 언급하고, 그래도 괜찮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상술한 관점에 대입해 보면, 에블린과 조이가 감정싸움을 시작하게 될 트리거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영화는 무협과 평행우주 세계관을 연결 지어 거의 가장 세련된 무협물을 보여줬으며, 담고 있는 메시지도 전혀 얄팍하지 않았다. 대중과 매니아 양쪽을 만족시키는 수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이야기를 담는 '영화'에서, 인간을 넘어선 그들의 위험에 몰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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