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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Mar 14. 2023

지구를 바라보는 남자

- 맨 온 더 문(1999) -

    

    맨 온 더 문(1999)은 미국의 엔터테이너 앤디 카우프먼의 전기영화다. 이 영화는 아마 보다가 중간에 멈춘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코미디언을 다룬 영화인데, 웃긴 장면이 전혀 없다. 앤디가 코미디를 하는 장면조차 말이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관객을 속이고, 영화는 이를 즐기니 주인공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면 이 영화는 재미도 없는 주제에 바통은 많이 요구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나도 솔직히 꽤 피로했다. 그래도 확실히 짚어야 할 부분은 앤디는 코미디언이 아니라는 점과 이 영화는 확실히 코미디라는 사실이다.  



1. 가뿐히 접어버린 전기 영화의 딜레마



    전기 영화는 비교적 만들기 쉬운 영화에 속한다. 이미 스토리가 실화라는 매력 만점의 해시태그와 함께 존재하고, 투자도 상대적으로 받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기를 다뤄 좋은 영화를 만들려면 두 가지 쟁점을 정리해야 한다. 얼마나 각색할 것인지와 각색한 내용을 어느 강도로 연출할 것인지. 전자를 잘못하면 전기 영화라는 의미가 퇴색된다. 후자를 잘못하면 실존인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반발을 크게 살 수도 있고, 반대로 팬들을 위해 만든 영화라는 오명을 쓸 수도 있다. 맨 온 더 문은 플롯의 대상인 앤디의 캐릭터를 강화함과 동시에 이런 쟁점들을 싸그리 날려버렸다. 


    시작하자마자 검은색 배경에 흑백으로 화면에 나온 앤디는 자신의 영화를 보러 와줘서 고맙다고 관객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넋두리를 시작한다. 이 영화는 끔찍하고, 자신의 중요한 부분들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이 영화를 재밌게 만들기 위해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하며, 차라리 쓸데없는 말들을 다 빼버렸다 하고, 그러니 영화가 이제 끝났다고 한다. 그러고선 옆에 있는 작은 턴테이블을 작동시키더니 음악과 함께 좌측 상단부터 엔딩크레딧이 나온다. 그 와중에 크레딧은 내려가지 않고 올라가고, lp도 길이가 짧아 여러 번 다시 재생한다. 검은 화면이 나오고, 왼쪽에서 다시 등장한 앤디가 아직도 안 갔네? 라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쫓아내려고 그랬다며 영사기를 작동시키고 영화가 시작된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앤디라는 특이한 캐릭터를 강조하고, 메타픽션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면서 상술한 전기 영화의 딜레마를 정리하는 효과를 가진다. "이 영화는 실화에서 기반함" 같은 딱딱한 문구를 사용하지 않고 각색을 내 맘대로 할 것임을 분명히 전달했다. 그리고 작품의 골자가 되는 앤디의 설계와도 연관성을 부여했다. 이 시도는 전위적임과 동시에 상당히 기능적인데, 꽤 어려울 수 있는 영화의 흐름을 관객들에게 미리 일러준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웨스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2021)에서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이 영화는 여러 액자 이야기를 차례로 풀면서 예술에 대한 사랑을 논하는 데, 흑백과 컬러가 수시로 바뀐다. 그 흐름에 확실한 일관성은 없고, 단지 등장인물들의 감정이나 행동이 극에 달했을 때 환기용으로 바뀐다고 이해했다. 즉 기존에 우리가 이해했던 과거는 흑백, 현재는 컬러라는 구조와 전혀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관객이 그 전환에 집중하다 되려 스토리를 놓칠 수도 있는데,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잡지회사가 있는 동네를 설명한다. 그 동네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는 장면은 장소마다 화면을 반으로 갈라 왼편의 과거는 흑백, 오른편의 현재는 컬러로 빠르게 표현했다. 다여섯 곳 중 단한 곳만 과거와 현재의 색상이 바뀌었다. 이는 감독의 명백한 힌트였고, 관객에게 건네는 일말의 배려였다. 



2. 앤디가 예술가로서 원한 것



    앤디는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뽐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양상이 조금 다르다. 앤디가 아버지에게 토크쇼 놀이를 해서 혼난 이유는 관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래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중요한 건 자신의 쇼를 보는 사람이 명확히 있어야 한다는 게 앤디 아버지의 입장이었고, 벽에다 대고 혼잣말을 하는 앤디는 그의 관점에서 이상함이었다. 혼난 앤디는 자신의 여동생을 방으로 데리고 와 마저 놀았다. 


    어렸을 적 앤디와 영화 중반부까지의 앤디는 딱히 관객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저 관객의 반응을 통솔하는 것을 원했고, 그 과정에서 안 좋아질 자신의 이미지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쉽게 말하면 강도 높은 예술병에 걸린 셈이다. 그러니 앤디도 앤디가 키우는 또 다른 자신인 토니 클립튼도 유쾌한 개그를 날리지 못한 것이다. 애초에 앤디는 한 번도 개그맨이 아니었다. 말로는 진짜 재미를 주고 싶다고 했지만, 그건 자신이 선민사상을 통해 느끼는 재미일 뿐 관객의 감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앤디는 코미디언도 엔터테이너도 아닌 행위 예술가다. 그런 그에게 시트콤 출연은 자신의 신념과 완전히 반대되는 행위다. 짜인 각본에 자아를 구겨 넣고 관객들이 말초적으로 원하는 질 낮은 광대짓만 하는 건 앤디에게 고문과 같았고, 그래서 시트콤에서 여러 난동을 부렸다. 여성 차별을 지휘하면서 진행했던 레슬링쇼로 안 좋아진 이미지와 함께, 그 시트콤은 앤디 때문에 종영됐다. 


    그리고 앤디는 행위 예술이라는 렌즈로 파악해도 상당히 독특한 캐릭터다. 사람들을 속이려 여러 독창적인 시도들을 하지만 이를 공개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속였다고 공개하지 않고 단순히 속이기만 하는 것은 앤디 입장에서야 예술이고, 실제로 노이즈 마케팅이 되겠지만 결국은 패악질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이 의도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행위 자체가 의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이런 독특한 캐릭터에 인간적인 약함과 성장이라는 요소를 추가했다는 점이다. 앤디의 아집은 순도 짙고 지독하지만, 앤디는 돈을 벌어야 한다, 계속 사람들 앞에 서고 싶다 같은 인간적인 욕망과 유혹에 흔들린다. 앤디는 영화 후반부에 폐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는데, 원래부터 믿던 사이비 종교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필리핀으로 날아간다. 암세포를 몸에서 뽑아준다는 실력 있는 주술사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앤디는 기대를 갖고 평범한 간호복을 입은 주술사의 수술대 위에 눕지만, 주술사는 앤디의 몸에 손을 대기도 전에 이미 암세포를 쥐고 있었다. 결국 그건 사기였고, 앤디는 자신이 한 엔터테이닝과 주술사의 손장난이 다를 게 없음을 깨닫고 헛웃음을 쳤다. 그 후에 정말로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무대를 펼치고 죽었다.


    그 무대는 지금까지의 앤디를 완전히 부정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기존의 작법을 따르면서 관객의 감정을 신경 썼다. 마지막 카우걸 배우인 노파를 불러다 당시 췄던 춤을 시키는데, 노파가 갑자기 쓰러진다. 앤디의 동료 작가인 즈무다가 혹시 의사가 계시냐며 소리치고, 관중석 맨 앞에 있던 의사는 노파를 보더니 자신의 자켓을 덮어버린다. 잠시 무대 뒤에 있던 앤디가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노파가 다시 일어나고, 와이어로 산타클로스를 부르더니 창작한 캐럴송을 부른다. 무대가 끝난 뒤 모든 관객들에게 쿠키와 우유를 대접하고 고맙다고 인사한다. 이 무대 내용은 깨달음을 얻은 앤디가 자신의 아집을 이겨내면서 자신의 특징을 잘 살린 기획이었다. 



3. 완성된 행위 예술



    성공적으로 유종의 미를 거둔 앤디의 장례식은 그가 생전에 찍은 영상과 함께 따뜻하게 진행됐다. 조문객들에게 어깨동무를 시키고, 자신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했는데, 그 가사는 지금까지 앤디가 내뱉던 천박한 비방과는 대조적으로 세상을 예찬하고 사랑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1년 후 토니 클립튼이 공연을 하게 된다. 관객들은 토니를 앤디라고 부르며, 토니는 앤디를 보고 싶냐는 물음과 함께 공연을 시작한다. 공연 장면을 얼추 보여주고 관객들을 훑는데, 즈무다의 흐뭇한 미소와 벽에 네온사인으로 그려진 카우프만의 캐리커쳐를 보여주며 끝난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이 토니 클립튼은 앤디도 즈무다도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점과 앤디가 원하던 명성을 사후에 손에 넣었다는 점이다. 앤디와 클립튼이 동시에 연출에 필요할 때는 즈무다가 분장을 하고 클립튼 연기를 했기 때문이고, 이 공연은 여러 단서들을 종합적으로 따졌을 때 앤디의 추모 공연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공연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이 공연까지 앤디가 기획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즈무다가 계획한 것으로 추정되고, 관객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열려있다. 사람들이 앤디가 죽다가 살아나서 이 공연을 한다고 이해하는지, 아니면 관객들도 이 기획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영화 중반부였다면 이 구분은 영화 감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앤디의 철학이 어디까지 구현되었고, 그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그래야 이 영화의 메시지를 따져볼 것 아닌가. 하지만 이미 앤디의 이야기는 앤디의 깨달음과 함께 완성되었고, 더 이상 속고 속이는 승패에 연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 설정은 열어도 무방하다. 결국 그의 추모 공연은 완성도 측면이 아니라 의미의 측면에서 이미 완성된 작품인 것이다. 



4. 달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이 영화는 앤디라는 실존인물 바탕의 괴상한 캐릭터를 잘 연출함과 동시에 그 캐릭터에 인간미와 성장극을 담았다. 영화 속 앤디의 공연을 보면서 시종일관 느껴졌던 찝찝함과 이질감은 앤디가 영화 속에서 다루려는 사람들과 영화를 보는 실제 관객을 동일시하는 시도였다. 이 영화는 영화적인 요건들을 잘 지키면서 관객에게 지독한 물음을 던지는 훌륭한 '코미디'다. 마지막으로 왜 제목이 맨 온 더 문일까? 사실 짐과 앤디(2017)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이를 보면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이 글을 마치기 전에 그 다큐를 보는 것은 재밌지도, 딱히 맞지도 않은 일 같아서 내 이야기부터 먼저 하련다. 


    문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앤디가 무대에서 받는 원형 스포트라이트와 글자 그대로 지구랑 동떨어진 달. 전자는 무대에 서 관객에게 자신을 뽐내고 싶다는 앤디의 집념을 표현한 것이고, 후자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닌 앤디의 외로움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구 위에 있을 수 없어서 달 위에 있지만, 지구를 주시하면서 언행을 고르는 앤디의 이야기와 잘 맞물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지구로 내려와야 한다는 메시지도 느낄 수 있다. 앤디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속이려 들지는 않았다. 자신의 고용주인 샤피로, 작가이자 주파수 맞는 동료인 즈무다, 아내인 롤러까지. 그들은 진짜 앤디의 모습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에게서만 앤디가 마음의 위로를 얻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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