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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Mar 15. 2023

빌어먹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 인사이드 르윈(2013) -




1. 선택을 배제함으로써 얻은 위로



    르윈은 일이 잘 안 풀리는 음악인이다. 솔로 음반은 당연히 알 팔리고, 소속사는 사기꾼 같고, 누울 곳도 없어서 지인들 집을 전전한다. 그러면서 지인들 숫자도 점점 줄어든다. 그래도 르윈은 일이 꼬일 때마다 즉각적인 대책을 세운다. 그 대책들이 타개보단 연명에 가깝지만, 르윈은 지인들에게 무시받고, 자기감정을 못 이겨 실수를 할 때마다 바로 다음을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주인공의 선택에 대한 단호함이고, 이를 통한 따뜻함이다. 르윈은 어렵게 도착한 시카고 기획사에서 참담한 평가를 받는다. 솔로는 무리고, 혼성 3인조 팀을 꾸릴 예정인데, 외모 관리 잘하면 받아주겠다고. 이 말을 듣고 퉁명스럽게 거절한 르윈은 뉴욕으로 돌아와 정리할 것들을 정리하고 뱃사람이 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내러티브는 이 선택을 거절한다.


    연체된 조합 비용을 내고 보니, 항해사 자격증을 잃어버려서 재발급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돈을 요구받는다. 배를 타지 않기로 맘을 바꾼 르윈은 몇 시간 전에 낸 조합 비용을 돌려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하고, 꿈을 포기한 미래와 돈을 모두 잃고 결국 다시 클럽으로 돌아온다. 클럽 사장이 전 연인에게 성상납 비슷한 걸 했다는 언급을 하자, 클럽 쇼에서 깽판을 치고 쫓겨난다. 다른 깽판을 친 교수님 집에서 다시 신세를 진 후, 클럽 사장은 왜인지 르윈을 받아줘 공연 기회를 줬다.


    이 영화는 르윈이 꿈을 좇는 과정에 갖가지 역경을 주면서, 동시에 르윈이 현실을 깨닫고 예술을 포기하려고 할 때는 능청스럽게 거절했다. 인사이드 르윈 같은 서사의 영화들은 이분법에 갇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꿈을 선택하느냐, 현실을 선택하느냐. 그 이분법이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실제로 예술을 포함한 꿈이 그런 식으로 영화 바깥 삶에서 작동했고, 이런 대립에서 겪는 주인공들의 고뇌가 충분히 진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엔 형제는 고통을 진실되게 다루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소 단호하지만 확실히 따뜻한 서사를 풀었다.  



2. 르윈과 고양이



    고양이는 르윈이 영화에서 겪는 어려움을 환기하면서 르윈의 꿈 자체를 상징한다. 처음 르윈이 교수님 고양이와 엮이고,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줄 알았더니 뒤늦게 성별부터 다른 녀석이었다는 게 밝혀지는 사건들은 꿈을 좇는 어려운 예술가라는 진부한 서사에 매력적인 특징을 부여했다. 동시에 어이없어하는 르윈의 심리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줬고, 르윈이 겪는 갈등들을 확연하게 시각화했다.


    자기가 운전하는 조건으로 히치하이킹에 성공한 르윈은 눈 오는 밤길 실수로 고양이를 치어 버린다. 이때 르윈은 상처받을 대로 받아 음악을 포기할까 내심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시카고 기획사 사장의 말에 음악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클럽에서 깽판을 치고 다시 찾아간 교수님 댁에는 잃어버린 줄 알았던 고양이가 알아서 집으로 돌아와 있었고, 막말을 한 노파에게 되려 사과를 받는다. 그리고 깽판을 쳤던 클럽에서 멋진 무대를 선보인다.


    고양이라는 이미지는 위태로움과 끈질김을 담고 있다. 주인에게 버려지면 바로 얼어 죽을 것 같지만 악착 같이 도시 생활에 적응하고, 귀여워 보이지만 성깔 부릴 때는 맹수의 유전자를 확실히 상기시킨다. 르윈의 꿈도 이와 비슷하다. 머저리, 루저라고 욕을 먹어가면서도 꿋꿋이 기타를 메고 다니며, 전날 대판 싸웠어도 넉살 떨면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3. 성찰을 통한 새 출발



    이 영화는 똑같은 시퀀스로 열고 닫힌다. 르윈이 노래를 성공적으로 연주하고, 자신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불려 나가 폭행을 당하는 장면이다. 이는 르윈이 항구 사람에게 돈을 뜯기고 클럽에서 깽판을 친 다음날 일어나는 일인데, 이 남성은 그때 르윈이 연주를 망친 노파의 남편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인사이드' 르윈이다. 르윈의 솔로 앨범과 동일한 이름이며, 단어 그대로 르윈의 내면을 의미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퀀스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르윈의 성찰을 영화적으로 연출한 것일 수도 있다.


    르윈의 사고관은 꽤 딱딱한 편이었다. 세속적인 가치를 극도로 거부하면서 자신의 어려움을 변호하는 일이 잦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자기는 급전도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 철없는 문제아 취급을 당했다. 초기 미국의 모던 포크가 상업주의에 대한 반발을 이념으로 삼았고, 작중 배경이 1960년대임을 감안하면 르윈이 왜 하필 포크송을 부르는 가수였는지 알 수 있다. 르윈의 외길 인생이 패배주의에 가까운 이유는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키기 때문이다. 남편이 있는 진과 아이가 생겼을 때, 르윈이 박수도 짝이 맞아야 소리가 난다며 잘못을 재수 없게 나누려 한다거나, 진이 클럽 사장에게 성적인 보상을 해줘서 자기 공연 기회가 생겼음을 알았을 때, 자기 불쾌함을 아무 상관도 없는 무대 위의 노파에게 돌린다거나 말이다. 르윈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쾌함들은 자신의 신념이 어그러지는 것을 감당하지 못했거나, 어렵지만 숭고한 삶에 취해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르윈이 자신을 폭행한 얼굴도 안 보이는 남자가 택시를 타고 골목을 떠나자 바이바이라며 손을 흔들어 주는 장면이다. 이는 지금까지 열심히는 살았을지언정 제대로 고민하지 않았던 자신을 떠나보내는 성찰을 의미한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선택을 내비게이션처럼 억압하면서 따뜻한 서사를 보여줬고, 그 따뜻함에 취하지 않고 주인공을 포함한 다른 예술가들에게 무게감 있는 물음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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