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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Sep 15. 2022

회사가 멀어서 자취하려는데 재직기간이 필요하다고요?

불가항력적이라 믿었던 독립을 포기하다

첫 직장은 아주 운이 좋았다. 집에서 회사까지 편도로 칼 같이 한 시간이 걸렸는데 그마저 5시 퇴근이라 붐비는 시간대를 피할 수도 있었다. 두 번째 직장은 그것보다 조금 더 늘어나서 편도로 한 시간 반이 걸렸다. 환승 횟수 역시 한 번에서 두 번으로 늘었다. 그래도 시간을 잘 맞추면 1시간 15분 컷까지도 가능했기에 그런대로 적응하면서 3년이 흘렀다.


한 직장에서 3년을 보내면서 미운 정 고운 정 가릴 것 없이 들었지만 '정'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순도 100%의 불만도 생겼다. 결국 이직을 결심하게 됐고 본격적으로 준비한 지 반년 만에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여기만 아니면 됐어'라는 마음으로 이직 준비를 시작했으나 막상 채용 공고를 들여다볼 때면 현 직장에서의 좋은 점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선 점까지 갖췄는지를 따져보며 까다롭게 굴었다. 나의 까다로운 기준에 부합함은 물론이고 예전부터 눈독 들이고 있던 회사에 합격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운이 통근 시간에 미치지는 못했다.


집에서 회사까지 왕복 4시간. 어느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부지런하게 일어나서 출근해도 집에 돌아오면 해가 떨어진 지 오래라 저녁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통근 시간이다. 새로운 회사에서의 첫날, 한 시간 반이 지나도록 지하철 안에 갇혀 있으면서 다짐했다, 기필코 독립을 하겠노라고.




가장 먼저 휴대전화에 부동산 앱부터 설치했다. 원하는 동네를 선택하자 지도 위에 숫자들이 등장했다. 주거 형태를 오피스텔로 좁히고 보증금 범위를 확 낮추자 호객 행위를 하듯 과시하던 숫자들이 사라졌다. 내가 현실적으로 고려해볼 수 있는 매물은 기껏해야 10개 안팎이었다. 그중 놀랍게도 염두에 두고 있던 오피스텔이 매물로 올라왔다. 확인하자마자 부동산에 전화로 문의해보니 계약이 가능하다는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부동산은 집주인과 연락 후 다시 전화를 주기로 했다. 전화를 기다리는 1시간 동안 나는 자취의 꿈에 부풀었다. 침대는 어떤 것이 좋을까 책상은 새 걸로 들여놔도 될까 등등.


1시간 후에 다시 전화가 와서 냉큼 받았을 때만 해도 부동산에서 나의 꿈을 완전히 무너뜨릴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부동산에서는 그 사이에 매물이 나갔다면서 방금 앱에 올려뒀던 매물 정보도 전부 내렸다고 했다. 암담한 결과였지만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비슷한 가격대의 다른 매물을 훑어보며 찜을 해두고 몇 번이나 들어가 보며 고민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쳐 부동산에 연락해보면 구두 계약이 됐다는 허무한 말만 되돌아왔다.


휴대전화로만 매물을 둘러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결국 직접 부동산을 찾아갔다. 내가 살 집을 보러 부동산을 방문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내가 주체가 되어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동산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내 예산에 맞는 2개의 매물에 대한 정보를 들었고 그 길로 바로 매물을 보러 갔다. 오피스텔로 걸어가는 길부터 정신을 바짝 차렸다. 편리한 출퇴근을 위해 집을 알아보는 것이기 때문에 지하철역까지의 거리가 가장 중요했다. 물론 주변 상권과 대로와의 인접성 등 주변 환경에 대한 부분들도 부동산을 나설 때부터 꼼꼼하게 살폈다. 건물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것은 엘리베이터였다. 엘리베이터가 깨끗하면 곧 들어갈 집도 깨끗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부동산 중개인은 정중하게 문을 두드린 후 안에 아무도 없음이 확인되자 안으로 들어갔다. 집을 방문하기 전 세입자에게 전화를 걸어 외출했음을 확인했으면서도 중개인은 집을 방문할 때마다 매번 문을 두드린 후 아무도 없음을 재확인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왔다. 수압, 수납장, 신발장, 화장실 구조, 채광 등도 눈여겨봤다. 하지만 마음에 쏙 드는 곳은 없었다. 어떤 집은 너무 낡았고 어떤 집은 창문 바로 앞이 건물로 막혀 있어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중개인에게는 고민해보겠다는 말을 남긴 뒤 집으로 돌아왔다.




구경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예산을 조금 올려 매물을 검색하니 마음에 드는 집이 등장했다. 바로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퇴근길에 매물을 보러 갈 약속을 잡았다. 지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신도시에 들어서서 주변 상권 또한 잘 갖춰져 있었다. 건물의 첫인상을 담당하는 엘리베이터부터 이미 마음에 들었는데 집 내부는 더 마음에 들었다. 수납장이 많은 것은 물론이요 화장실도 넓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채광이었다. 앞이 뻥 뚫려 있어서 저 너머 아래로 중앙대로가 펼쳐졌다. 더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바로 여기가 내가 찾던 곳이다.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기존 예산을 초과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집을 발견했는데 돈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집을 보고 나오자마자 보증금 대출을 문의하기 위해 은행으로 달려갔다. 은행 접수 키오스크에서 '대출'을 눌러본 것도 처음이었다. 금세 띵동 하며 벨이 울렸고 상담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월세 보증금 대출을 상담받고 싶은데요."

"재직기간이 얼마나 되세요?"

"이제 다닌 지 일주일 정도 됐어요."

"그러시면 대출은 어려우세요. 최소 한 달은 다니셔야 해요."

재직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 단칼에 거절당하니 도대체 무슨 말을 이어서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당황한 나와 다르게 상담원은 자연스럽게 버팀목 대출 안내문을 건네며 상품을 설명한 뒤 나의 재정 상황을 물었고 한 달 후에 다시 도전해볼 것을 권유했다.

"중기청은 안되세요?"

"공공기관에 다녀서요."

대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부동산 앱 매물 설명란에 종종 눈에 띄던 '중기청 100'이라는 문구가 머리를 스쳤다. 중소기업에 다닌다면 전세금의 100프로를 전세자금대출로 받을 수 있는 상품을 의미한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많지 않고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집은 먼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상품은 없는 걸까? 이제까지 나는 뭐하느라 원룸 전세자금 하나 마련하지 못했는지 스스로가 너무 원망스럽고 지난 시간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결국 부모님 집에 남기로 결정했다. 보증금을 낮추고 월세를 올려서라도 자취를 할까 생각했지만 공공기관의 적은 월급을 떠올리면 어떻게 머리를 굴려봐도 무리였다. 못해도 100만 원을 땅에다 버린다고 생각하니 독립은 한 여름밤보다 짧은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고백하자면 독립을 꿈꿨던 이유는 단순히 통근 시간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이가 서른이 넘으니 나만의 독립적인 공간에 대한 욕구가 조금씩 솟아올랐다. 오로지 나의 취향과 필요에 의해 꾸며진 나만의 공간. 집을 알아보면서 나만의 공간을 어떻게 꾸밀지 상상해보곤 했다.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한 일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예쁜 와인 잔이나 케이크 그릇만 봐도 우울해졌다. '저런 거 사고 싶었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질 수 있는 것'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과정에 힘겹게 적응했다. 부모님 집에서 할당받은 작은 공간인 내 방에 가만히 앉아 방을 둘러봤다. 그러다 선반에 있는 양초와 장식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쓰지도 않는 물건이라 정리를 하며 방을 치우는데 문득 머릿속에 불꽃이 일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그 순간부터 나는 부모님 집에 살면서 독립한 것처럼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한 달 후면 버팀목 대출을 받을 수 있으며, 대출이 안 되더라도 2년만 버티면 새로운 지하철 노선이 뚫려서 통근 시간이 절반으로 줄 것이다. 그때까지 부모님 집에 얹혀살면서 독립하지 못한 것을 비관하며 시간을 낭비할 것인가? 아니면 마치 독립한 것처럼 나만의 자유를 누릴 것인가?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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