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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Sep 16. 2022

수도권에 사니까 월세 아끼고 얼마나 좋아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먼 곳

7살 때까지만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기억의 대부분이 지금 사는 도시가 배경이다. 서울에서의 기억은 흐릿하게 떠오른다. 하교 시간에 맞춰 엄마 손을 잡고 언니를 마중 나가던 기억도 희미하다. 하지만 마중 나가던 길에 넓은 도로가 하나 있었고 도로 한쪽에 분식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다는 것은 비교적 뚜렷하게 기억한다. 어렸을 때만 해도 엄마께서 절대 길거리 음식을 사주시는 법이 없어서 늘 갈망만 하던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엄마께서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파는 핫도그를 사주셨다. 빨간 케첩이 현란한 춤사위를 벌이듯 핫도그에 뿌려져 있는 장면을 지금도 기억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이었던 어느 늦가을에 지금 사는 도시로 이사를 왔다. 내 기억 속 첫 이사라서 지금도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도시에 들어서던 순간을 기억한다. 원래 살던 곳은 서울의 동쪽이었고 새로 이사 갈 곳은 경기도의 북서쪽이었다. 서울의 절반을 가로질러 가면서 참 멀다고만 생각했지 행정구역이 완전히 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신도시에 첫 발을 내디뎠던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 이사는 꽤 다녔지만 전부 같은 도시 안에서의 이동이었기 때문에 주소지의 자치구조차 변한 적이 없다.




신도시로의 이사는 나의 유치원 졸업을 방해했다. 늦가을에 이사를 왔으니 새로운 유치원을 다니기도 애매했기에 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집에 있었다. 서울에서 다녔던 유치원의 배려로 졸업 학예회에는 참여할 수 있었지만 이미 이방인이 되어버린 나는 학예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내가 떠난 이후 친구들이 꾸준히 준비한 무대를 관람자로서 지켜봐야 했다. 친구들이 모두 무대에 올라가면서 대기석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던 그 순간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를 혼란스러워하며 엄마께서 앉아 계시는 뒤편만 자꾸 응시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유치원을 졸업하지 못한 것이 서러웠다.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미니 학사모를 쓰고 찍은 유치원 졸업 사진이 걸려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학교-학원-집'을 반복하던 학창 시절에는 서울을 갈 일이 자주 있지 않았다. 학교에서 현장학습으로 남산 한옥마을이나 경복궁을 가기도 했지만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이벤트였다. 오히려 엄마와 버스를 타고 광화문을 가거나 지하철을 타고 충무로를 지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3호선 충무로역에서 출구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 위 천장이 돌로 덮여있었다. 물론 진짜 돌은 아니었겠지만 지하 세계를 뚫어놓은 지하철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느낌이라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공사를 거쳐서 매끈하게 바뀌었더라. 울퉁불퉁한 벽을 올려다봤던 기억은 지금도 충무로에 내릴 때마다 떠오른다.


우리 집에서 종로구나 중구를 가는 것과 잠실을 가는 것은 같은 서울이지만 다른 느낌이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롯데월드를 갈 때만 해도 잠실역이 우리 집에서 얼마나 먼 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들뜬 마음으로 아침 일찍 출발해서 퍼레이드까지 보고 늦은 시각이 되어 집에 돌아오더라도 지치지 않았다. 지금 하라면 퍼레이드까지 볼 체력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수도권의 불편함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때까지는 살면서 필요한 행위들을 모두 내가 사는 도시 안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달라졌다. 서울로 학교를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통학 거리가 길어졌고 그만큼 시간도 늘었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던 중학교를 졸업하고 버스로 20분을 걸려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버스를 타고 통학한다는 것이 낯설었는데 이제는 지하철로 1시간을 달려야 닿는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다.


시험기간에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거나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어 늦는 날이면 밤하늘이 까맣게 되고서야 집에 도착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견딜 수 있는 불편함이었다. 매일 오전 9시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었고 늦게까지 밖에 있는 날이 자주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먼 거리를 통학하는 것에 적응돼서 나중에는 나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게다가 굳이 자취할 필요 없이 학교를 통학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마침 대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모두 지방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수도권살이가 더 큰 장점으로 느껴졌다. 당시 수도권에서 10년 넘게 살았던 내게 집에서의 통학은 당연한 일이었고 큰 혜택이었다. '수도권에 사니까 월세 아끼고 얼마나 좋아'라는 부모님의 말씀이 하나 틀린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장을 다니면서 수도권에 산다는 사실이 내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장을 구할 때부터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서울을 포함한 경인권을 동서남북으로 나눴을 때 남쪽과 동쪽에 위치한 회사들에는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자취할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곤 했다. '수도권에 사니까 월세 아끼고 얼마나 좋아'라는 말은 이제 내게 독으로 다가왔다. 서울까지 통근이 '가능'하다 보니 자취를 한다는 것이 낭비처럼 보이지만 그에 따른 모든 가치를 경제적으로 환산한다면 과연 낭비인지에 대한 물음이 생겼다. 그러면서도 자취를 하지 않을 경우 모을 수 있는 돈을 계산해보면서 '통근의 가능성'이 수도권의 혜택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1기 신도시라는 타이틀에 현혹되어 많은 신혼부부들이 '아메리칸드림'처럼 '신도시 드림'을 꿈꾸며 신도시에 정착했다. 하지만 신혼부부로 입주했던 이들은 중년이 되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어엿한 성인이 되어 직장이나 결혼을 이유로 도시를 떠났다. 내 친구들 중에도 아직까지 신도시에 남아있는 친구들은 많지 않다. 중학교 때만 해도 한 학년에 16개의 반이 있었으나 저출산과 다른 도시로의 이주 등을 이유로 이제는 한 자리 수로 내려갔다. 공원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사람들보다 반려동물을 산책시키는 중년과 노인들의 수가 더 많다. 내가 나이가 들었듯 도시도 나이가 들었다.


엄연히 따지고 보면 사실 나는 지금의 도시를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독립을 하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도시에 정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넓고 깨끗한 도로, 완벽하게 갖추어진 생활편의시설, 수도권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넓은 녹지의 공원.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삭막하고 시끄러운 곳으로 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어떤 도시든 불편함과 편리함이 공존할 것이다. 불편함을 감수할 정도로 편리함이 더 큰 지를 스스로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계산이 섰기에 정들어버린 도시,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도시에 남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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