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주호 Oct 31. 2020

빈자의 경제학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 아비지트 배너지 & 에스테르 뒤플로

당신에게 가난이란 무엇인가요? 

 가난이란 단어를 처음 들으면 저는 "비가 새는 판잣집에 쭈그리고 앉아서 추위를 막아줄 이불도 없이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선 온 가족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2020년의 대한민국에서의 가난과는 약간은 동떨어진 모습일 테지만, 사실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이런 가난이 우리나라에 실재했었습니다. 요즘은 사회의 복지제도도 어느 정도 갖춰져 있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는 자선사업 등이 잘 발달되어 있지만,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뿌리 깊은 가난이 머물고 있습니다. 

 가난은 세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전쟁을 겪은 세대들에게 가난은 그야말로 비를 막아줄 지붕도, 바람을 막아줄 벽도, 허기를 달래줄 양식도 없는 그야말로 처참함 그 자체일 것이지만 전후세대인 우리들에게 가난은 또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영향으로 1980년대의 가난이 조금은 낭만적으로 그려지기도 했었지만 가난은 사실 잔인하게도 현실적입니다. 

 

가난과 정치

 이 책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의사결정을 하는지를 보여주고,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서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사실 이 책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기보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어떤 의사결정을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 제목도 "빈자의 경제학" 정도가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인도의 간호사들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인도에서는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이 근무시간의 절반을 자리를 비운다고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몸이 불편한 환자들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상태를 관리하고 처방을 해 준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이는 대부분 거짓입니다. 더욱이, 행정당국에서는 아무도 간호사들의 근무 여부를 신경 쓰지 않고, 심지어는 그들의 결근을 묵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몸이 불편한 주민들이 보건소를 방문할 때마다 번번이 간호사가 자리를 비우자, 주민들마저도 보건소에  아무런 기대를 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방 행정장관은 간호사들의 출근 규칙을 강화했고 그들이 자리를 비우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간호사들의 출근 상황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그들에게 날짜와 시간이 표시되는 스탬프를 지급하고 보건소 벽에 부착한 출근부에 하루에도 여러 번 도장을 찍게 했습니다. 이를 어기는 간호사들에게는 감봉 조치가 내려질 예정이었습니다. 

 초기에 이 정책은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간호사들은 편법을 찾아내서 다시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습니다. 정부의 채찍 효과가 실패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문제는 간호사들의 근무처우에 있었습니다. 간호사들은 보건소에서 약품들을 챙겨서 여러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왕진을 합니다. 인도의 뜨거운 무더위에서 하루에도 5km 이상을 걸어 다니며 환자들을 돌봐야만 합니다. 또한, 그들이 방문하는 가정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건강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을 일일이 만나서 설득하고 예방접종을 하도록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돌아다닌 후 다시 보건소로 걸어 돌아와서 퇴근 도장을 찍은 뒤에 한두 시간 가량을 만원 버스에서 시달리고 나서야 겨우 집에 도착합니다. 이런 살인적인 스케줄을 인도의 간호사들은 일주일에 6일 동안 소화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놀토가 없으니까요.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인도의 간호사들이 왜 그토록 출근을 거부하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또, 더 나아가 간호사들이 자리를 비우는 이유가 그들이 일하기 싫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는 것도 이해하셨을 겁니다. 문제는 간호사 개인이 아니라 그들의 근무처우, 즉 시스템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인도의 행정장관은 엉뚱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저축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예금계좌를 만들기도 쉽지 않습니다. 은행이 너무 멀리 있다는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당장 오늘을 버틸 식량과 돈이 내일을 위한 저축보다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온 가족이 돈벌이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늘 배가 고픕니다. 어쩌다 운이 좋아서 돈을 많이 벌어오는 날이면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식량으로 가족들과 함께 더 많은 음식을 먹으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잉여생산물을 미래를 위해 저축하라고 권하는 것은 간호사들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엉뚱한 대책을 내놓은 행정장관과 같은 어리석은 조언일 뿐입니다. 매일같이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그들의 처지를 하루 3끼를 배불리 먹고사는 사회지도층이 제대로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도자는 그들의 삶을 조금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이 책에서는 정치가 정책의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선의를 가진 정치는 반드시 그에 준하는 적절한 정책이 뒷받침되어야만 힘을 얻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선한 정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들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한 뒤에 적합한 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가난의 늪에 빠진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가장 현명하고 적절한 방법이며, 정치와 정책이 동등한 이유입니다. 


가난과 계급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는 계급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계급에 따라 어떤 이는 호의호식하며 살지만 또 어떤 이는 평생을 고역과 가난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갑니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도 반상의 법도가 엄존했고 현재 이 순간에도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가 있습니다. 계급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경제학적인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계급은 경제력의 유무로 집단을 나누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계급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수많은 특권과 부를 누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에서는 이러한 계급 발생의 원인을 생산수단의 유무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노동을 할 수 있지만 그들의 노동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생산수단을 가진 이들은 그들의 노동력을 투자하여 돈을 벌었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타인의 노동력을 사게 되었습니다.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대신 소정의 대가만을 취하게 되었고,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죠.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자본가라고 부릅니다.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을 통해 부를 이룬 자본가는 어느새 자신들과 노동자들을 구별 짓기 시작했고 그들을 차별하고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적인 부가 타인을 차별하는 근거가 된 셈입니다. 

 소수의 자본가들만 하던 이런 차별은 점점 우리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노동자들도 나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차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농사를 짓는 농민들 사이에서도 돈을 많이 버는 농민들은 그렇지 못한 농민들을 차별하게 되는 식입니다.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차별은 돈을 얼마나 버느냐의 문제를 넘어서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었습니다. 인종과 성별, 장애의 유무 등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들에서부터 직업, 종교, 사상 등에 이르기까지 차별의 분야는 날로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직업을 예로 들자면, 기술직 노동자들이 사무직 노동자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동경해 왔습니다. 혹은, 남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이들을 "딴따라"라고 멸시하기도 합니다. 이들이 나보다 돈을 훨씬 더 많이 번다고 해도 말이죠. 옛말에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했었지만 현실의 잔인함을 감추고 싶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했던 거짓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인 점은,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차별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점점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부의 유무를 통해 남들을 차별하는 행태만큼은 아직도 변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지금이야 내가 남들보다 돈을 잘 벌기 때문에 떵떵거리고 살 수 있지만 언제 저 아래로 추락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매일매일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는 처지인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더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언제 아래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자신의 부를 그들과 나누는 모습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나의 경계를 더욱 뚜렷하게 하는 방향으로만 발전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이런 가난을 해결하고자 사회의 구조를 바꾸자는 주장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생산수단은 오직 국가만이 소유할 수 있고, 노동자들은 같은 시간에 같은 노동을 하고 같은 임금을 받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사회체제라면 아무도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다고 믿었습니다. 한때는 이런 생각을 인류의 절반이 믿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 그들은 틀렸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사회는 모든 사람들을 가난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소수가 또다시 부를 독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탐욕을 간과했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차원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고 있으며, 개인 차원에서도 그들을 돕기 위한 봉사활동과 자선활동을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턱없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직도 우리 곁에는 가난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가난은 손쉽게 물리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어쩌면 온 인류가 함께 힘을 합쳐야만 물리칠 수 있는 상대일지도 모릅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한 싸움이 되겠죠.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승리할 날이 오리라 믿고 싶습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가난을 근거로 타인을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어쩌면 이런 차별이 가난보다 더 강력한 적일지도 모릅니다. 나보다 가난한 국가의 국민을 차별하는 행위, 나보다 가난한 우리나라 국민을 차별하는 행위, 내가 남들보다 부유하다는 이유로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오만한 착각은 반드시 없어야만 할 것입니다. 



- 참고서적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이비지트 베너지/에스테르 뒤플로)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채사장)

작가의 이전글 SAVE THE EARTH, SAVE THE HUMAN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