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리고 살리고 Jan 03. 2018

어디든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 (다이 시지에, 현대문학, 2017)

가깝고도 먼 나라, 흔히 일본이 거론되지만 중국도 빼놓을 수 없다. 대륙이 맞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사는 그 들을 ‘보이지 않는 선’에 의해 갈라놓았다. 채택한 정치이념이 달라서다.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자 경제교류를 시작으로 물꼬를 트긴 했지만 최근 ‘사드(THAAD)’ 보복 논란에서 보듯 밀고 당기기를 반복할 뿐 좀처럼 가까운 나라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선입견’도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 복잡한 성조와 된소리로 구성된 중국어 발음으로 인해 ‘중국인은 시끄럽다’라는 인식이나 ‘중국인은 잘 안 씻어 더럽다’는 편견. 그들과 더욱 멀어지고 싶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일깨워주는 소설이 있다. 바로 다이 시지에의 소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 (현대문학, 2017)다. 


“마오와 그의 당원들의 저서, 순수한 학술서를 제외한 모든 책이 금서였다.”(p.71) 마오쩌둥이 지배한 그 시대는 ‘지식인’이란 이유만으로 ‘죄 값’을 치러야 했다. 이 소설은 ‘지식인의 재교육’ 명목으로 두메산골에 보내진 청년들의 사랑과 모험 이야기다. 금서인 ‘책’은 사랑의 메신저다. 그들이 몰래 접할 수밖에 없었던 발자크, 위고, 톨스토이 등의 서양 문학은 그들이 금서를 훔치는 모험을 감행하게 했고, 바느질 소녀와 사랑에 빠지게 했고, 세계를 이해하게 했으며, 때론 질투하게 했고, 다른 세계를 꿈꾸며 탐할 수 있게 했다. 어쩌면 책이 주인공일 수 있겠다.   


어두웠던 시대를 풍자한 이 소설은 다이 시지에가 직접 겪은 문화 대혁명(1966년~1976년)을 배경으로 한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정치적 위기에 빠진 마오쩌둥은 문화 대혁명을 일으킨다. 경제 개혁을 추진하던 인물들을 홍위병을 동원하여 몰아내고 권력을 더욱 강화한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전통문화가 파괴되고 수만 명의 예술인과 지식인이 억압을 받는다. “중학교 교과목이 공업과 농업에 국한되었고 ‘기초 지식’에 속하는 수학과 물리, 화학 등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p.14)의 대목은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지식 보급을 통제했는지 알 수 있다.   


‘금연’은 들어봤지만 ‘금서’는 생소하다. 그러나 권력이 문화를 통제하는 것은 우리 역사에도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일반 시민이 교양의 일환으로 읽는 것은 무관하나 노동자나 학생이 읽으면 처벌한다는 판결이 있어 논란이 된 점, 유신 독재 시절, 학생운동에 저항가로 불리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 제창이 금지된 것, 집권여당과 정치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활동의 제약을 받은 ‘블랙리스트’ 사건 등. 최근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었다.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반혁명 인사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 중인 주인공들의 부모는 소위 이념 폭력을 일삼는 일부 정치인의 ‘빨갱이 몰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들도 우리도 사람 사는 세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 시절을 직접 겪은 다이 시지에는 이렇게 말한다. “마오쩌둥이 주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동쪽의 어느 나라처럼 살풍경하지 않았어요. 사회 체제는 늘 가혹했는데도 사람들은 착한 아이로 남아 있을 줄 알았지요. 그들은 삶의 기쁨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고, 공산주의도 그것만은 결코 뿌리 뽑지 못했지요.”(p.257) 그의 렌즈는 어두울수록 작은 불빛이 영롱하게 보이듯, 고달픈 시대 안에서 평온하고 행복한 인물을 찾아낸다. 학술서와 달리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 지점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법한 무명 씨 들의 삶을 특별하게 조명하여 시대의 요구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점. 다이 시지에는 이 소설을 통해 실현했다.  

  

소설은 우리가 놓치는 것을 발견한다. ‘지식인’은 무엇이기에 고작 중학생을 ‘지식인’으로 분류하는가. 지식인의 자식이라고 모두 지식인인가에 대해 보편타당한지 질문한다. “우리가 가장 불행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 이전에도 수백만 명의 젊은이가 그랬고, 앞으로도 수백만 명이 그 뒤를 이을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뤄와 내가 고등학생이 아니었다는 것, 그것만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말할 만했다. 우리는 고등학교 교실에 들어가 본 적도 없었다. 중학 3년 과정을 마쳤을 뿐인데도 마치 ‘지식인’ 이라도 되듯 산골로 보내진 것이다.”(p.14)   

 

소설은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웃음과 행복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주인공 뤄가 치과 의사의 아들이란 이유로 촌장에게 치료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때 우리는 재봉틀이 충치 치료기가 될 것이라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뤄가 재교육 과정에서 겪었던 온갖 고통을 재봉틀 페달에 실어 촌장의 이를 바늘로 뚫는 장면은 독자의 배꼽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촌장을 향한 복수심과 하나가 되어 독자 또한 사디즘 충동을 느낀다. 어려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과 유머다. 비참한 시대 배경 속에서도 그들의 삶에 공감하고 동지애를 느끼며 우리가 다 같은 인간임을 일깨운다.

  

그리하여 소설은 모든 경계를 허문다. 경계란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르는 기준을 말한다. 눈에 보이는 국경, 인종을 비롯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 사상, 종교, 선입견과 같은 것이다. 또 다른 주인공인 화자가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전집 1권을 읽고 난 후 교육받은 공산주의 사상이 더 이상 이전 같지 않음을 배운 것이다. “그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개인주의라는 것이 그토록 탁월하고 폭넓은 것인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둑질을 해서 『장 크리스토프』와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재교육까지 받은 나의 빈약한 머리로는 한 개인이 전 세계와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장난 삼아 시작한 연애가 위대한 사랑으로 바뀌었다.”(p.153)   

 

역사적으로 독재를 추구하는 사람 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다. 작가의 생각을 표현하는 문학은 권력자의 ‘겁’을 상징하며, 권력과 맞바꿀 정도의 힘을 의미한다. 독재자는 문학을 통한 독자의 연대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인간이 갖는 공통점에 근거해 경계를 허물어야 연대가 구축되고 이는 ‘책’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책은 우리의 희망이자 혁명이다. 우리가 문학 작품을 더 열심히 읽고 배우고 표현해야 할 이유를 이 소설은 주인공 ‘인물’과 또 다른 주인공 ‘책’을 통해 말한다. (사족. 함께 읽으면 더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유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