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후도우미 이모님 - 100일 간의 은인
백일 간은 정말 혼돈의 시기였다. 아기 낳고 호르몬이 미쳐 날뛰어 가만히 있어도 제정신이 아닌데 거기에 잠까지 못 자니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 하는 시기이다. 아기가 땀띠만 나도 다 내 잘못인 것 같아 눈물을 쏟고, 늦게 퇴근한 남편에게 밑도 끝도 없이 불을 뿜는다.
이모님은 조용하고 차분하신 편이었지만 아기에게도 조용하고, 다른 말로 하자면 조금 어두우셨다. 뭐 그 당시 나도 만만치 않게 어두웠으니 우리 집은 어둠의 기운이 가득한 상태였겠지. 원래의 계약기간에서 조금 더 연장을 해서 100일을 채우고 작별 했는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계약 연장을 했을 때 이모님이 꽤나 힘드셨다고 했다. 날은 춥고(11월부터 1월까지였으니), 집은 지하철역에서 먼데다 언덕배기이고, 그렇다고 본인이 중간에 그만 두면 저 불쌍한 애기엄마는 어쩌나 눈에 밟히기도 하고, 책임감에 끝까지 버티셨던 것 같다. 된장찌개에 파뿌리를 넣어야 맛있는데 깜빡했다며 다시 꺼내 끓이시는 모습을 보고 지금 정녕 파뿌리가 중요한가요 하고 속으로 혼자 열을 냈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보니(제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조금만 더 너그러웠다면 좋았을텐데 싶다. 호르몬 탓을 조금 더 해 보며, 참 고마웠던 나의 첫 번째 은인.
2. 시터 이모님 - 10개월 간의 은인
산후도우미 기간이 끝난 뒤에는 업체를 통해 시터 이모님을 고용했다. 새로 오신 이모님은 연세는 좀 더 있으셨지만 에너지가 넘치고 아주 쾌활하셨다. 아이들에게 이런 저런 말도 많이 하시고, 어쩌다 아이들이 귀여운 행동을 하면 깔깔깔 하고 뒤로 넘어가며 웃으셨다. 이전과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더 이상 나를 위해 밥을 차려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대신 내가, 이모님의 점심메뉴를 담당해야 한다는 것! 파뿌리 넣은 된장찌개 끓여줄 사람은 이제 없다.
만사가 다 귀찮은 날에는 시리얼이나 한 사발 말아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이모님에게 뭘 차려드릴지 고민하는 것은 생각보다 은근 스트레스였다. 초반에 간식으로 빵 같은 것을 준비 해 드렸더니 빵은 잘 안 드신다 해서, 그 때부터 밥솥에 계란도 찌고, 나가서 가래떡도 사 오고, 60대는 간식으로 무얼 드실까, 매일 고민했다.
이모님은 경력 있는 베테랑이었다. 아이들이 하루에 낮잠을 길든 짧든 세 번 정도 잘 때였는데, 하루에 한 번은 꼭 2시간 반 정도 푹 자게 해 줘야 한다고, 안아서 재우든 업어서 재우든 지금 2시간 이상 푹 재워 놓으면 나중에도 똑같이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잘 자게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항상 점심 쯤이 되면 이모님과 나는 각각 애 한 명씩을 안거나 업은 채로 2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아이들은 낮잠을 2시간 이상씩 꼬박 꼬박 자는 어린이로 성장 했으니,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이론인 것 같다.
이사를 앞두고 긴장이 되었다. 이제 나도 육아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고, 이모님이 9시부터 계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제 곧 따뜻해지고 우리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니까, 드디어 유모차를 끌고 산책도 하고 커피도 마시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전 정도야 나 혼자 거뜬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긴장한 학생처럼 멘트를 준비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았다. 이모님, 저희 이사 가면 오후에만 와 주시고 대신 얼마얼마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시급으로 따지면 이모님의 손해는 아니었지만 고작 32살 짜리가 섣불리 딜을 넣을 상대는 아니었다. 결전의 날, 각자 한 명씩 아기를 안은 상태로 내가 먼저 선제공격 멘트를 날렸다. 가만히 들으시던 이모님은 글쎄요, 하며 확답을 주지 않으셨다. 역시 이모님은 고수였다. 결국 나는 기존에 이야기를 꺼낸 금액에서 20만원 정도를 더 올려 2차 제안을 했고, 그럼 그러죠 뭐, 고수는 답을 주었다. 그렇게 쾌활한 이모님과의 생활은 이사 후에도 이어졌지만, 아이들이 점점 커 가며 기고 잡고 서고 활동반경이 넓어지고 점점 힘에 부쳐 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아이들 돌을 앞두고 건강 문제로 이모님은 그만 두셨고, 우리는 마지막 날 동네 중국집에서 다 같이 요리를 먹으며 이모님과 작별했다.
2.5 깜짝 게스트 - 호락호락하지 않다.
경상도 사투리가 짙은 이모님이 오셨다. 면접도 봤고 뭐 이만하면 되었다 싶어 그 분으로 결정했다. 첫 날 아이들 책도 읽어 주고 낮잠도 재워 주셨는데, 이제 돌 지난 아이들은 낯가림이 있어서 어떻게 적응 시킬까 고민하던 차였다. 다음 날 갑자기 시아버님이 위독하셔서 일을 못 할 것 같다며 하루 일한 것만 쳐서 보내달라는 문자가 왔다. 심지어 실내복 바지는 그대로 두고 갔다. 하아, 바지까지 버리고 하루만에 도망 간건가. 대체 왜 이모님들의 시부모님은 갑자기 위독해 지시는 것이며, 다리는 왜 그렇게 자주 부러지는지. 우리 아이들 이름을 부르던 모습이 참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일한 건 일한 거니 일당을 계산해서, 그것도 괜히 원 단위 절사하기 뭐 해서 끝자리 반올림 한 돈을 이체하고, 눈에 보일 때마다 나를 더욱 화나게 하는 그 바지는 버려 버렸다.
3. 이모님 우리 이모님 - 6년째 은인
이모님 중도하차 사건 이후 세상 믿을 사람 하나 없다며 많이 의기소침해져 있었지만 배신감은 배신감이고 이모님은 다시 구해야 했다. 지금 당장도 문제였고 코로나가 시작 되면서 복직 시점을 이미 최대로 늦춘 상태여서 새로운 이모님과 미리 조금 합을 맞추다가 안정적인 복직을 했어야 했다. 이모님을 면접 차 뵈었다. 남자아이 둘을 꽤 오래 보셨다고 했다. 그럼 쌍둥이에 질려 도망 가실 확률은 적으려나. 그런데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기는 하나 보름 정도는 쉬었다가 다음 달 1일부터 시작하고 싶다 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보름 간 나는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안 오시면 어쩌지, 더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찾으시면 거기로 가시겠지, 아아 아무래도 우리 집에는 안 오실 것 같다, 나는 이제 큰일 났다. 하지만 우리 이모님은 약속한 날 약속한 시간에 우리집에 오셨고, 나는 버선발로 마중을 나갔다.
이모님은 너무 좋으신 분이다. 아이들에게 명절에 세뱃돈이라고 용돈을 주시면, 늘 빳빳한 신권이 들어있다. 조용하고 인자하신데, 신기하게도 사교성도 좋으셔서 어린이집 같은 반 친구들 엄마, 이모님, 할머니들과도 친하게 지내시면서 알짜배기 정보도 나에게 꽂아주신다. 요즘 어느 학원을 많이 간다더라, 어디에 생긴 체육학원이 좋다더라, 내가 사진을 찍어 왔어요, 하면서 워킹맘의 가장 아쉬운 부분을 기가 막히게 채워 주신다. 단편적인 에피소드들만으로는 표현되지 않을 6년의 시간. 이모님이 있어 나는 복직도 하고, 늦은 과장 승진도 하고, 무려 초등학교 1학년을 육아휴직 없이 보내고 있다.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남편에게도) 귀중한 은인인 나의 이모님. 이모님 3부작의 피날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