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르는 밤

제14화 │ 공개 낭독회 준비

by seomar

해가 저물기 직전, 윤서는 무대 뒤 대기실 복도 끝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오늘은 그녀가 그토록 준비해온 ‘이름을 부르는 시간’—무대 위에서 첫 공개 낭독회를 여는 날이었다.


“기다려, 네 차례야.”
스태프의 목소리가 머리 위 스피커에서 낮게 들려왔다.
윤서는 손에 든 노트 몇 장을 펴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사진, 지도, 증언 메모—모두 오늘 낭독될 것이었다.
그 사이로 무대 조명 준비가 움직였고, 객석 의자는 하나하나 제대로 정돈되고 있었다.

“무대 뒤라고 해서 조용할 거라 생각했지?”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침묵 뒤엔 또 다른 소리가 있어.”
윤서는 코트를 여미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대 준비가 한창일 때였다.
프로듀서가 다가와 물었다.
“윤서 씨, 혹시 오늘 낭독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윤서는 고개를 들었다.
“네? 어떤 거요?”
“이름들 중… ‘병연’이라는 이름이 있다면서요? 그 부분을 어떻게 풀어낼지요?”
윤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솔직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어요. 사실과 기억 사이를 건너는 순간이니까요.”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진짜 중요한 건 ‘부르는 일’이에요. 이름이 울릴 수 있게.”
윤서는 고요히 미소 지었다.

무대 위에서 마이크 테스트가 시작됐다.
윤서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조명이 얼굴에 닿았다.
“한 — 경 — 수.” 그녀가 연습으로 이름을 불렀다.
메아리가 조용히 뒤쪽 무대 커튼을 타고 갔다.
다음엔 “진수”, “순옥”…
그리고 마지막, “병연.”
마이크에서는 ‘탁’하는 잡음이 잠깐 새어나왔다.

그 순간, 윤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름은 이렇게 울려야 한다.”
스태프의 속삭임이 귀에 들어왔다.

대기실로 돌아온 윤서는 노트를 펼쳤다.

우리가 이긴 날, 후손들이 자유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를.
그 문장은 오늘의 휘장이자 시작이었다.

할머니가 다가와 손을 얹었다.
“너… 준비됐어?”
윤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할머니, 오늘부터는 저의 말이 누군가의 밤을 조금 덜 어둡게 할 거예요.”
할머니는 눈가가 붉어졌지만 미소를 지었다.

곧 무대 점등 시간이 다가왔다. 무대 뒤 난간 너머 객석이 어렴풋이 보였다.
“좋아, 이게 시작이다.”
윤서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무대로 걸어 나갔다.
첫 발이 뗴졌다. 관객 한 줄, 두 줄… 조명이 그녀를 비췄다.

마이크 앞에서 윤서는 노트를 펼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잔잔히 퍼졌다.
“오늘, 잊힌 이름들을 부릅니다.”
손끝이 조금 떨렸지만, 그 떨림은 시작의 떨림이었다.

그 순간, 무대 뒤 상자 속 금속 부품이 아주 작게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조명이 바뀌는 순간과 맞물려,
마치 시간이 멈추고 또 움직이기 시작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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