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요안나 콘세이요
노인의 이름은 앙리다.
앙리는 왜 이렇게 투명한 푸른색으로 그려졌을까. 그는 사라지는 것일까. 혹시 이건 영혼인가. 그런데 그는 웃고 있다.
왜 까치밥나무일까.
한국에서도 까치밥은 모든 열매가 떨어진 뒤에 가지에 하나 둘 남겨둔 열매를 말한다. 까치를 위한 남은 몫, 즉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정'을 의미한다.
삽질 끝에도 남는 것이 있을까?
그 끝에 나는 웃을 수 있을까? 내가 사라지면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혹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도 괜찮을까?
말이 별로 없는 그림책을 보고 나는 말이 많아진다.
요안나 콘세이요는 제목의 까치밥나무 열매로, 또 말없이 그림으로 그 답을 대신한다.
그 모든 삽질이 한 선 한 선이 되어 밀도가 쌓인다. 화려한 색채 없이 연필선 만으로도 햇살과 바람의 펄럭임을 나타낸다. 헛수고 같던 연필선 긋기가 필압에 따라 앙리의 흔적을 남긴다. 그가 여기 있었음을, 그리고 지금은 없음을.
왜 자꾸 무언가를 남기고 싶을까, 그것도 거창한 것으로. 까치에게 먹히든 사람에게 먹히든 혹은 먹히지 않든, 나무에서 떨어지든 매달려 있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저 익어가면 된다. 익어가는 자체로 나는 하나의 작품이다.
삽질이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