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

결핍의 순기능

by 웬디

러 이유로 자주 참석하지 못해 마음만 무겁던 어느 모임에 모처럼 참석했다. 멤버 중 결혼을 앞둔 분이 계셔서 결혼에 관한 소소한 질문을 주고 받다 보니 어쩌다 주제가 그리로 흘러갔었나 보다. 질문은 흘러흘러 나에게 왔다.


남편 분이랑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뭐예요?


이유가 뭐였더라.

남편과 결혼을 결심한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왜인지 잠깐의 고민 끝에 제일 먼저 떠린 말은 이것이었다.


결핍을 험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요. 건강하게 복한 사람을요.


편은 결핍을 경험하고 건강하게 극복한 사람이었다. 이전 연애를 하며 만나던 상대에게서 아, 이 사람은 결핍이 없이 자랐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물론 결핍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특성이지만, 그 연애 과정에서 내가 느낀 '결핍 없음'은 건 아닌데 싶은 상황에서 그 원인이 무얼까 찾아가다가 르게 된 나의 추정이자 결론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핍 없이 자랐었다. 넘치진 않았어도 딱히 부족함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황이 달라졌다. 우리 집이 망했구나,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뭔가 잘못되어가던 초기, 그 때 나는 집이 아닌 기숙사에 있었지만 다 알겠었다. 우리 부모님은 딸 걱정할까봐 아무 말 안 하는 드라마 속 부모님과는 달랐다. 엄마는 내가 없던 사이 일어난 일들을 마음 속에 담아두었다가 나를 만나면 내게 들려주며 마음을 풀어냈고, 아빠는 안 그래도 임용을 앞두고 불안한 내게 시험 떨어지면 어떡하느냐고 나를 걱정해주는 듯 아빠의 걱정을 덜었다. 대학 4학년이던 나는 당시도 꽤 고가였던 온라인 강의를 결제할 비용을 부모님께 달라기엔 차마 입이 떨어지 않아서 당시 30만원쯤인가 되던 기본 강의 비용을 일년치 강의 비용인 양 받아서 그것만 보 공부를 시작했다. 대신 학교와 집을 오고가는 버스 안에서 책만 주구장창 보았다. 그 때 적극적으로 알바라도 뛰지 않은 건 결핍없이 지낸 어린 시절 탓이자 결과였다. 마음 놓고 부모님 탓을 할 수도 없는 게, 나도 부모님 대신 생계를 짊어지던 드라마 속 딸과는 달랐다. 나서서 책임은 지지 못하면서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고립되었다.


교대 나오면 교사가 되던 시기에 입학했으나 교대생으로 지내는 동안 경쟁률이 차츰 높아졌다. 쟁쟁한 경쟁률의 다른 시험에 비한다면 절대적 수치는 높지 않았지만, 그 때의 나와 우리들에겐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두려운 현실이었다.


여러가지가 맞물려 두려움은 곱절이 되었고, 잔뜩 위축된 나는 스스로 고립을 자처했다. 마침 기숙사에서도 나왔던 시기였기에,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이 멀어서 먼저 간다는 이유로 친구들과도 조금씩 거리를 두었다.


가정 경제를 위해 뭐 하나 한 것도 없으면서도, 말하자면 또 딱히 별 거 없어서 부스러기만 껄끄럽게 묻어날 뿐인 시절이지만, 그 부대낌을 일상으로 겪어내는 건 왜인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방학에는 일부러 학교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있는 다른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는데, 그렇게 하등 별 일 없는 일상을 살면서도 뭐가 그렇게 날마다 서러운지 하루 공부를 마치고 도서관을 나서면 근처 교회에 가서 기도라는 핑계로 울다가만 나왔다. 그 때 알았다. 세상엔 울 곳이 참 없다는 걸. 그 해는 지독히도 길기도 길었다.


그 일 년 동안 그래도 큰 일들은 좀 봉합이 되었던 건지 그냥 내 일이 끝나니 심리적으로 덜 민감하게 느껴진 건지 그 해를 넘기자 우리 집 상황이 한숨 돌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임용에는 합격했다. 년 남짓한 시간이지만 십 년 같았던 시간. 아마 도합 일 년 반쯤이나 었으려나. 사실 우는 것 말고는 딱히 한 것 없이 낸 시절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니 그 시간은 나를 많이 바꾸었다. 했더라면 좋았을 걱정을 고, 안 겪었더라면 좋았을 감정을 겪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긴 해도 나를 성장시킨 것은 분명 결핍이었다. 다 때려치고 싶은 순간에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던 건 결핍 때문이었으니까. 결핍은 내게서 견디는 것 이외의 모든 선택지를 지웠고 결과적으로는 그 고통이 나를 키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통이 키운 성장도 장이라고 어느 날엔가 내가 기특하게 여겨졌다. 애썼다, 잘 버텼다, 많이 컸다...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할 적에 그 기도를 했었다. 결핍을 경험한 성숙하고 겸손한 사람. 바라는 배우자상이면서 또한 내가 도달하고 싶은 지향점이기도 했던 것 같다.


남편은 풍족하게 자라지 않았다. 나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할머니 할아버지 시대 어디쯤 아닐까 싶은 어릴 적 이야기를 하곤 한다. 아빠 어릴 적엔, 하면서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같은 잔소리를 시작할 적엔 일부러 영감님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남편이 그 시간을 감추지 않고 이렇게 꺼내놓을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럽다. 어린아이였던 남편도, 청소년이었던 남편도 시절마다 부러운 게 있었겠지. 고 싶은 것들도, 벗어나고 싶었던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막막했지만 막막한 줄도 몰랐던 시절이 키워온 남편의 단단한 내면을 나는 존경한다.


남편은 단단하다. 환경에 출렁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한다. 작심삼일인 나와 달리 마음 먹은 일은 꾸준히 실행하며 살아간다. 상냥하진 않지만 선하고 성실하다. 내인 내가 나가는 말로 한 말을 안 듣는 척 귀담아 들었다가 그 날에나 다음 날 들어오는 길 들고 나타나는 사람이다. 그러나 차마 간지러워서 애써 사와놓고서는 자기 먹으려고 샀다거나 남아서 들고왔다는 둥 말로 다 까먹는 사람. 그래도 그 마음을 아니까, 세상에나 아빠가 엄마 주려고 사왔다고, 아빠 같은 사람 만나야 한다고 내가 호들갑 떨며 장난을 치면 부끄러운 마음이 얼굴에 다 표가 나는 소년 같은 사람. 나는 그런 그가 좋았고 여전히 좋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