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셈케이 Feb 22. 2024

03 원래 어려운 일 (feat.소개팅)



 장기연애의 마침표를 찍고 최근 소개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친한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 남자에게 수년 사랑받다 돌연 가판대의 물건처럼 느껴지는 상황이 썩 달갑지 않다는 내용을 수차례 토로했다. 소개팅 경험이 비교적 많던 내게 그럴싸한 공감을 듣고 싶어 보였다. 편의점에 들러 과자 하나를 골라도 이거 살까 저거 살까 고민하면서 나의 삶에 중대한 역사를 함께 할 누군가를 마주하는 순간이 쉬울 리가. 나의 가치를, 나에 대해 모르는 타인에게 어필하는 과정이 매번 즐거울 수만은 없지만 그저 이성을 만나고자하는 의지를 넘어 나에 대해 알아가는 귀중한 시간이 되어주기도 한다. 물론 즐겁지만은 않았던 소개팅을 끝내고 돌아와 느끼는 헛헛함에 이러한 가르침을 몸소 새기기엔 버거울 수도 있다. 그럴싸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많이 많이 해. 그러다 보면 끝나.'라고 말하자 그녀는 그게 끝이냐 이어 물었다.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보다 더한 위안이 없다. 결국 언젠가 만나게 되어있으니까. 단지 그게 언제쯤 일지 가늠할 수 없는 것이 문제다. 애석하지만 그렇게 어렵사리 만나도 이별의 확률은 또 존재한다. 다시는 사랑 따윈 하지 않겠노라 다짐해도 머쓱하게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사랑 한다. 쉽게 말해 관계는 의지만으로 형성되기 힘든 영역이고 다짐을 가뿐히 뛰어넘는 영역이다. 그저 인연이 아니었을 뿐인 상황에 구태여 장황한 생각들을 더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 순간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될 인연은 된다.


 그러나 드라마의 주인공 친구처럼 '넌 있는 그대로 아름다워. 주눅 들지 마!'라는 말은 차마 해주지 못했다. 모든 이성의 기준에 부합될 순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굳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앞세워 위로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매력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소개팅 시장은 냉혹하다.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르면 냉정히 돌아설 준비가 된 이들이기에 때때로 자기 객관화가 소개팅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나의 단점을 꼬집어 비하하라는 것 또한 아니다. 나는 어떤 점이 매력적이고 어떤 점이 부족한지 명확히 알면 허황된 기대치가 눈 녹듯 녹고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자연스레 억울함과 불안함이 사라진다. 덤으로 의도치 않게 이성들에게 비치는 나의 새로운 장점을 발견하기도 한다. 구구절절 말하지만 남는 장사니 손해 볼 거 없다. 즐기라는 말을 이어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인연이라는 것이 사실 멋없게 들릴지 몰라도 별거 없다. 하늘이 정해준 둘도 없는 숭고한 관계가 아닌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관계로 시작해 특별한 관계로 발전시켜가는 그 과정을 함께하는 사람이 고로 인연이라 생각한다. (운명적인 시작을 경험하지 못해서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당장 가판대의 물건이 되든 수조의 활어가 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가판대 같은칸 과자와 만나고 같은 수조의 생선을 만나면 결국 해피엔딩이다.


 다소 울적해하는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진짜 너의 사람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라 여겨보면 어떠냐고. 사실 인생이 재밌는 게 학생 때 운동장 10바퀴를 돌고 오라는 선생님의 벌에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나가 헉헉거리며 운동장을 한참 돌고 교실로 돌아왔을 때 '오늘 단축수업이래!'라는 친구의 말에 순간 미소가 지어지는 참 우습고도 허망함의 연속이다. 그토록 지치고 힘들어도 결국 끝끝내 행복이 치고 들어오면 아픔도 고통도 시련도 다 이 순간을 위한 과정으로 치부된다.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의 존재도 잊을만큼.


 F 80프로 육박하는 내가 하는 말치곤 다소 T스러웠는지 그녀는 한참을 투덜댔지만 다행히도 목소리가 한결 밝아진 듯 보였다. 희한하게 나이가 들수록 차분함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적정 온도를 정해 그 온기를 잃지도 더하지도 않으려 부단히 애쓴다. 그런 이들의 사랑이 격정적이고 한없이 순수할리가 없다. 삼십대의 낭만 속에는 달콤함보다 다소 딱딱하더라도 진한 향과 차분한 음악이 더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더 안정적이고 보다 진심을 다할 수 있다. 머지않아 그녀에게도 그러한 사랑이 찾아와 그녀를 떠난 과거의 그를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