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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소개팅, 그 가볍고도 무거운 만남

by 셈케이


소개팅을 통해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은 역사를 함께 써 내려갈 상대지만 이뤄내지 못했다 해서 하루를 허비한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만남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며 무엇보다 소개팅을 통해 뭐라도 하나 얻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다. 좋아하는 과자를 사러 마트에 갔지만 품절로 구매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 우연히 싱싱한 사과를 보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자는 얻지 못했지만 사과를 얻었다면 아예 빈손으로 집에 온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심심한 위로가 아닌 넓게 받아들일 자세를 갖자는 의미다.

내가 소개팅을 통해 잔인하게 깨우친 것은 '거절'이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사랑 가득 받고 자라 만나는 남자친구마다 따뜻한 사랑만 받던 내가 누군가에게 '넌 아니야.'라는 의미의 거절을 처음 받았을 때 그간 느껴보지 못한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머리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한껏 꾸민 내 모습이 건물 유리창에 비치는 순간 왈칵 서러움이 밀려왔었다. 인생 첫 장기연애를 끝낸 직후 상처를 이겨내 보고자 나간 소개팅에서의 일이었다. 아직 채 여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이 뿌려진 느낌이었다. '그도 날 떠났는데 그를 대신해 줄 사람조차 없는 거라면 이 세상 내게 더 이상 사랑은 없는 것인가?'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맴돌았다. 상대에게 느끼는 호감의 정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그의 마음에 찬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선명한 평가가 나를 쭈구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머리와 마음이 완벽히 분리되어 제자리로 찾기까지 일정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는 정확히 그랬다.


물론 그 이후에는 같은 상황을 마주해도 겸허히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쉽진 않았지만 경험을 반복할수록 나 또한 상대를 거절해야 하는 순간이 왔고 서로가 애매하게 감정을 주고받다가 덜컥 연애를 시작해 해프닝 같은 이별을 맞기도 했다. 시간이 쌓일수록 사랑은 똑같은 부피만큼 커질 줄 알았다. 그러나 사랑은 물리적 시간이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들이 키워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또 한 번 알게 된 셈이다.


소개팅은 기꺼이 거절당한 용기와 스스로의 감정을 들여다볼 선명한 시선이 중요하다. 아무리 화려하게 꾸미고 역대급 아름다움을 장착했다 해도 그가 나에게 반하지 않을 이유는 시작부터 수십 개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근데, 우리 또한 수십 명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없지 않은가? 조금 더디더라도 한 명을 잘 만나 사랑을 주고받으면 그 모든 일련의 과정들은 즐거운 에피소드로 자리매김된다.


인생이, 소개팅이 그렇더라.




한 번은 신기했던 만남도 있었다. 취미며 사고방식, 삶을 살아가는 방향 그리고 최종 꿈까지 결이 비슷한 사람을 소개팅을 통해 만난 적이 있었다.


"전 멋지고 유쾌한 할머니가 되는 게 제 최종꿈이에요."

"와... 전 힙한 할아버지가 되는 게 제 최종꿈인데."


그는 연신 내게 '신기하다.', '비슷한 게 참 많다.'라 말했다. 나도 신기했다. 내가 말하는 족족 '어? 저도요.'라 말하며 몇 번 반복되니 본인도 민망했는지 '진짜 일부러 같은 척하는 게 아니라..…'라 덧붙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희한하리만큼 그는 내게 반하지 않아 보였다. 나 또한 그가 가진 나와의 교집합에 심장이 떨리진 않았다. 둘이서 서너 병의 소주병을 비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는 비틀대다 내 팔을 간신히 잡고 걸음을 이어갔다. 나는 곧 쓰러질 듯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를 택시에 욱여넣고서야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거 맞아?'


확률적으론 사랑에 빠지기 손색없었다. 선선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4월이었고 무엇보다 말도 안 되게 비슷한 점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하지 않는 이유마저 똑같아 입을 틀어막던 두 남녀는 알딸딸하게 취한 채 각자의 길을 다시 걸어갔다.


결국 남녀는 무수한 공통점이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꽂힘이 이어주는 것이라는 걸. 사랑은 복잡해 보이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단순하고 선명하다는 것을. 공통점이 차고 넘치던 그를 안전귀가 시킨 날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다 보면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새로운 사람을, 사랑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애당초 말이 안 됐다. 그렇게 혼자의 삶에도 점차 익숙해지고 떠난 사랑의 자욱도 서서히 희미해져 갈 무렵 나는 또 한 번의 소개팅을 하게 됐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다지 특별한 시작이 아니었지만 뜨거운 사랑을 하고 나니 그와의 첫날도 황홀한 운명의 시작점으로 기억된다. 그는 내가 소개팅으로 만나 처음 연애를 했던 남자였다. 나를 처음 보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그 어떤 날보다 특별히 더 꾸미지도 않았는데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엄청난 걸 발견한 듯 보였다. 그렇게 그와의 짧은 저녁식사가 끝나고 우물쭈물하는 그에게 '맥주 한잔 하실래요?'라 말하자 그는 갑자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진짜요?'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후에 듣기론 저녁을 먹는 내내 너무 떨려 연신 자기 이야기만 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려 당장에라도 내가 집에 가겠다 말할 줄 알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반대였다. 처음 보는 내게 자기가 살아온 삶을 장황히도 그리고 재밌게도 말하는 모습이 귀엽고 신선하고 유쾌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삶을 비집고 들어가고 싶은 욕심까지 드는 찰나였다. 차마 이 이야기는 그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됐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랑을 했다. 여전히 내 삶에 고맙고 또 고맙고도 미안한 사람으로 자리하고 있다.


비록 소개팅을 통해 연인이 되는 해피엔딩이 쉽게 찾아오진 않지만 앞서 말했듯이 설령 인연이 닿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무조건 '사과'와 같은 또 다른 무언가를 얻게 된다.

그중 하나가 나의 취향을 제대로 알아가는 여정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관계적 부담을 부여하지 않은 채 사람을 알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소개팅을 통해 나는 '무언가에 집요하게 빠져 사는 사람'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떠한 것에 매료되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일상 속 골고루 삶의 무게들을 포진시키는 것을 더 선호하기에 하루에 러닝을 3시간 무조건 해야 하거나, 일주일에 책 세 권을 기필코 읽어내야 하거나, 헬스를 갈 때 상대 즉 연인이 꼭 함께 가 운동을 했으면 한다거나 등등 개인의 삶에 '꼭' 그래야 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사람들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삶은 그날그날 새롭고 삶은 늘 변수투성이니까 말이다. 살아가는 방향만 흔들리지 않으면 된다는 나의 가치 또한 더 선명히 알게 됐다. 소개팅을 통해서 말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제의 소개팅에서 상대의 마음에 들지 못해 속상해하고 있다면 그럴 시간에 맛있는 밥을 먹는 것을 추천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며 애끓을 필요가 없으며 세상엔 당신의 존재 자체에 설렘 가득 흔들리는 눈빛으로 마주할 누군가가 기필코 있음을 말해주고 싶다.


다만 과정일 뿐 지금도 조금씩 닿아가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꿈꾸는 그 사랑에.

벚꽃이 휘날리는 봄 날. 사랑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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