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만의 재회
글, 사진, 영상. 콘텐츠라고 불리는 것들로 먹고 산 지도 10년이 됐다. 직업이 뭐냐는 질문에 어릴 때는 자아실현이라든지 드라마에 나온 멋있는 배우 역할을 고르듯 다소 추상적으로 생각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결국 내 한정적인 시간과 체력을 무언가 타인이 원하는 것들로 바꿔주면서 돈을 버는 것이구나 피부로 느낀다.
화요일 영주로 가는 기차에서 몇 시간이나 고개를 숙이고 영상을 편집했다. 엊그제 급하게 찍은 소스를 정신없이 자르고 이어 붙이며 고작 2분짜리 데이터가 남았다. 나무를 베고 장작을 패듯, 가축을 도축해 살을 남기듯, 모래 사이에서 금을 찾듯, 창작이라는 것도 다분히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내게 마지막 영주는 2019년 4월, 지금으로부터 6년 전으로, 그때도 이미 여느 지방 소도시와 다르지 않게 극도로 소멸해 가는 중이었다. 아마존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호미의 영주대장간이며, 낡은 가죽 의자 너머로 면도 거품 냄새가 가득한 이발소, 구성마을의 폐가 자리를 정리하고 들어선 할매묵공장과 그 옆에 할배목공소까지. 영주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글을 쓰던 에디터는 더 넓은 세상으로 가겠다며 회사를 나와 개인사업자가 되어 다시 영주로 돌아왔다.
*그때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링크에서 https://www.kocis.go.kr/eng/webzine/201905/sub02.html
대전에서 탄 4량짜리 무궁화호가 영주역에서 멈췄다. 갈라진 페인트 틈으로 녹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그래도 잘 달렸다. 얼마나 낡았는지, 부서졌는지, 버려지는지. 결국 그만큼 쓰였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정말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을 만나기로 약속된 시각은 15시. 역에서부터 직선으로 15분이면 닿을 목적지를 향해 일부러 골목을 끼고돌며 빛이 바래가는 도시를 걸었다. 아마도 지금 보는 이 길이 내가 며칠간의 영주에서 마주할 전부일 것으로 생각했다. 일단 숙소에 들어가서는 마음에 정해둔 일을 끝내기 전에는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니까.
영주에는, 물론 6년 만에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도시재생이라는 다소 식상한 단어 이상으로 신선한 시도와 모임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원래는 꽤 알려진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하려고도 했고, 예술행사나 인터뷰할 예술가가 있다면 소개해달라는 메일을 이곳저곳에 보내기도 했었다.
나를 다시 영주로 부른 곳은 스택스(STAXX)였다. '작업 탐험대의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3박 4일간의 워케이션 기회를 제공받았다. 참여자 모집 공고를 볼 때만 하더라도 여느 여행처럼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진주처럼 영롱하게 여물은 구도심과 요즘 사람들이 모인다는 신도심을 넘나들며 탐험하고 싶었다. 그치만 몇 주 사이에 마음엔 무거운 짐이 생겼고, 역에서부터 스택스까지는 아무리 빙빙 돌아도 금방 닿았다.
라운지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는 몇 시간의 시간이 남았고, 그런 김에 영상 편집도 대강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남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미세한 오디오 음량이며, 비디오의 색과 어둡기를 조금만 더 내 마음에 쏙 들기까지 고치는 일은 단순노동과 다를 바 없는 외로움과 성취감이 있다. 노트북을 덮고는 옥상에 올라갔다. 길 건너 활짝 핀 벚꽃과 당장 빨래를 널러 누가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을 구옥의 지붕들을 살폈다.
약속된 오리엔테이션 시간에는 스택스의 이번 워케이션 담당자님과 나 말고도 두 명의 참가자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입실한 방은 305호. 1인용 매트리스가 깔린 침대 위로 전기장판과 가볍게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보니 일단 좀 누워있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푹 쓰러져 한참을 있었다.
영상 썸네일을 만들어 달라는 문자에 몸을 일으켰다. 라운지로 나와 종일 매달렸던 영상을 다시 켜서 썸네일 배경으로 쓸만한 장면을 찾아 글자를 얹었다. 어떤 버전은 이래서 좋고, 그러면서 두 세 버전만 만들려던 게 아홉 개가 되었다. 그래도 처음에 만든 게 마지막에 고를 때 제일 좋았다. 영상 소개 글도 적었다.
창밖은 어느새 밤이 됐다. 벚꽃은 하얗다 못해 보랏빛이 됐다. 문득, 내 하루치 값인 영상 한 편이 직장인들의 눈엔 합당하게 보일지 궁금해졌다. 일반적으로는 이해받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출퇴근을 회사가 아니라 온갖 곳으로 하기도 하고.
영주 워케이션이 확정되고 며칠 후. 내가 용역비를 뜯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말 공교롭게도, 6년 전 영주에 오면서도 함께 작업했던 작가님들과 만난 자리였다. 일 얘기, 매체 얘기. 그러다 우연히 그 회사의 이름을 들었다. 올해 초부터 사무실 문을 닫았다고 했다. 내가 2년 넘게 사진과 글을 납품했던 곳이고, 대전이랑 서울에서 꽤 큰 규모의 매체를 수주해서 포트폴리오도 다양하게 확보하고 있는 나름 큰 홍보대행사였는데, 진짜 문을 닫았다고?
부랴부랴 거기 소속이자 내 매체를 디자인하고 있는 팀장님한테 연락해 사실관계를 확인했는데 정말이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며칠 전까지도 지면 교정을 보고 있었는데. 3월 말이면 모든 직원이 다 퇴사한다고 했다. 회계담당자는 물론이고 대표자와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못 받은 돈은 1,500만 원.
1월부터 직원들은 재택근무로 돌리며 법인 폐업 준비를 했으면서, 나에게는 2월 중순까지도 수십 여 곳으로 취재를 다니게 만들고는, 돈을 안 주고 연락이 두절이라니. 법인 등기부등본을 떼보고 회사와 대표의 집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다. 이사불명으로 반송됐다는 우체국의 알림을 받고는 결국 생에 첫 형사소송을 준비하기로 했다. 이번 여행은 밖을 돌아다닐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완벽한 고소장을 작성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선, 다소 서늘한 마음으로 기차에서 내린 터였다.
그런데 영주에서의 첫날을 마칠 무렵엔 맘이 좀 달라졌다. 겨우 영상 한 편이지만 혼자서 또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성취, 하루를 제대로 살았다는 느낌 때문인지. 아니면 오디오를 한 땀 한 땀 깎으며 한껏 예민해졌던 탓인지. 고소와 창작과 여행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압박이 비현실적으로 커서였는지.
매체 발행이 왜 늦어지는지, 언제 될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의 얼굴이 덜컥 마음에 떠올랐다. 내가 인터뷰한 수십 명의 사람들. 나는 고작 몇 주간 민사니 형사니 준비하며 회사의 행방을 궁금해했지만, 인터뷰이들은 길게는 반년도 넘게 콘텐츠가 언제 발행되는 것인지를 내게 묻고 있었다.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돈을 위한 고소보다도 내가 만났던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일이 먼저임이 여행의 첫날 밤이 되어서야 선명해졌다.
다음 날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서 씻고 라운지로 나왔다. 따끈한 토스트가 쿠킹호일로 포장되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스택스에서 준비해 주신 아침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종일 포트폴리오를 갈아엎었다. 도메인도 새로 구입해서 달아줬다. 인터뷰 콘텐츠 발행을 문 닫은 홍보대행사에서 완결할 능력이 없음도 알았고, 발주처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아예 새로운 인터뷰이를 섭외해 새로운 버전의 매체를 만들고 있음도 업계 관계자를 통해서 전해 들었다. 발주처와 직접 메일과 전화로 두 차례의 연락을 주고받았으면서도 내겐 공유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홍보대행사가 멋대로 하도급을 준 상황이라, 나와 발주처 사이에는 직접적인 계약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세세히 진행 경과를 내게 알려줄 의무는 없겠다고 이해는 했으나, 사진과 글의 저작권을 모두 가진 작가이자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제작을 전담했던 PM 입장에서는 콘텐츠가 버려지는 걸 가만히 기다릴 수도 없었다. 포트폴리오 사이트에 직접 콘텐츠를 게시할 자리를 만들어 비우고, 오래도록 들어가지 쓸모를 찾지 못했던 브런치 채널의 게시물도 좀 정리했다.
인터뷰이들께 보낼 메일의 뼈대를 세우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본격적인 첫 외출이었다. 벚꽃과 개나리가 핀 길을 지나쳤다.
영주시민체육관에서 일일권을 끊어 운동을 해보려고 했다. 실내운동화가 있어야만 출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집에서 신발을 챙겨 왔겠지만 애초에 이 외출도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안에 어떻게 생겼나만 구경하고 나왔다. 일일권을 키오스크로 결제하고, 게이트도 달려 있는 최신식의 출입 시스템을 태어나서 처음 봤다. 한국에서 가장 최신식의 공공체육관이 아닐까. 야외의 트랙 근처에 철봉이라도 있나 두리번거리다가 돌아섰다.
돌아오는 길엔 꼭 행운처럼 작은 공원에 설치된 체육시설을 봤다. 모니터를 쳐다보며 일하느라 뻣뻣해진 신체를 펴기에 매달리는 운동이 좋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오래 일하기 위해서 생존 운동을 시작한 건 몇 년이 채 안 됐다.
그립이 고정된 철봉이 아니라 자유자재로 잡을 수 있는 쇠고리가 어깨에는 편한 듯하면서도, 두께가 너무 얇아서 손가락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감사와 불평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교차하는 것이 나다. 쇠고랑을 채울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내가 아니다.
하늘은 금방 어둑어둑해졌다. 스택스로 돌아가는 길에 바라본 제방 위로 어젯밤 창 너머로 봤던 그 빛나는 벚꽃길이 빛나고 있었다. 영주 사람들이 다 저기 나와서 다니는 건가 싶을 정도로 북적였다. 벚꽃이 저렇게나 만개하고도 비 내리지 않은 날이 얼마만인지.
그리고는 벌써 목요일이 됐다. 스택스에 택수라는 강아지가 있다고만 들었지 커튼 뒤에 있을 줄은 여기 온 지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몰랐다. 요즘엔 잠깐 카페가 임시휴업 상태라, 택수는 주인장 대신 스택스에서 산책도 시켜주고 그런다고. 얘가 자길 좋아해 주는 사람이 아니면 마구 다가가거나 보채거나 하지 않는데, 차분히 인사하고 만져주면 그래도 고개를 들면서 어디가 좋다 싫다 표현은 하는 것 같았다. 젖은 휴지로 눈곱을 문질러 떼주려고 했는데 장난을 치는 건지 싫은 건지 입을 벌렸다 닫으면서 텁텁 소리를 내서 포기했던 것이 수요일 밤의 일이었다.
영주에서의 3일 차, 예정대로라면 스택스를 떠나기 전 온전한 마지막 날이었다. 고소장을 다 쓰기 전에는 방에서 나오지 않겠다던 계획은 진작 사라졌고, 먼저 챙겨야 할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인터뷰했던 분들께 이번 매체 진행 경과부터 발행 지연 등의 이슈에 대해 법적으로 문제 되지 않을 만큼만 상세하게 공유했다. 제작 발주처와 홍보대행사 사이에는 계약과 대금지급이 완료되었지만, 홍보대행사와 나 사이엔 저작권 양도가 완료되지 않았고, 2월에 모든 취재가 끝나고도 매체 발행이 4월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나 때문은 아님은 일단 충분히 소명한 것 같다. 일단 내 개인 채널에라도 사진과 글을 업로드하고 발주처와의 저작권 이슈는 따로 푸는 편이 기사 발행을 기다린 분들께 도의라고 생각했다. 80여분께 메일을 보내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외출했다.
마음을 어지럽혔던 일들이 실제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벚꽃이 핀 제방길에 한 골목 더 가까이 다가섰고, 새들과 사자와 고양이도 스마트폰 카메라로 몇 장 찍어뒀다.
길을 걷는 동안 메일을 수신했다는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인터뷰이로부터의 안부와 위로 전화도 여럿 받았다. 발주처와의 관계를 고려해 개인 채널에 콘텐츠 게시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메일도 한 통 있었다. 사진 작업을 따로 맡기시겠다고 해서 견적서를 보내드리기도 했다. 내가 그냥 개인적으로는 만날 수 없는 귀한 분들과의 대화야말로 이 일을 하면서 얻는 가장 큰 혜택임을 종종 까먹는데, 다시 감사했다.
어떤 골목으로 들어서도 비슷해 보이는 길을 지나며, 이 도시는 오래 전의 계획 단계에서부터 나름 구획과 도로를 잘 구성한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이번에 스택스에서 만난 참가자분과 대화에서 1961년에 영주 대수해에 대해 들었는데, 이 사건 이후로 다시 도시를 재건하면서 이런 모양이 된 것은 아닐까 추측만 스쳤다.
그러다 금세 밀라플라라는 카페에 닿았다. 영주에서 난 사과가 들어간 사과라테를 먹었다. 빨간 봉제인형이 달린 키링도 하나 샀다. 라테는 너무 뜨거우면 사과가 흐물흐물해져서 그런 것인지 약간 미지근한 온도였다. 갈지 않고 잘게 썬 사과가 라테에 들어있는 건 처음이라 생소한 맛이었는데 아이스였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봉제인형은 내가 좋아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가격은 약간 비쌌지만 그래도 사고 싶었다.
카페에 앉아 받은 편지에 다 답장을 하고는 시장이 모여있는 원도심을 향했다. 끈질기게 뿌리내린 풀과 꽃, 흩날린 벚꽃 잎이 대낮에도 사람을 기우뚱거리게 했다.
2025년 12월 31일까지 임대료를 면제해 주겠다는 주인백의 공지가 붙은 공실이 열몇 개, 점심시간을 피해서 와달라는 의원과 약국들, 이름이 여럿인 전통시장이 맞물린 교차로. 이것은 영주의 또 다른 얼굴일 것이다. 어떤 일은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고, 모두가 잘 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또 제법 잘 되기도 하는 것이 사람 일이라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돌아가는 길엔 제방길 위를 따라 벚꽃을 봤다.
그리고 돌아온 스택스에서 다시 택수와 마주쳤다. 혹시 평소에 산책을 자주 하는지 몰라도, 벚꽃 잎이 저렇게나 피었는데 구경을 좀 시켜주고 싶었다. 스택스 오피스에 남아있는 분이 있나 올라가서 산책시켜도 되는지 물어보고 배변봉투도 챙겼다.
목줄을 집어 들기만 했는데 세상 얌전한 줄 알았던 택수가 앞발을 들고 난리가 났다. 내가 널 오해했구나. 겨우 목줄을 채워 나갔더니 줄을 물고 으르렁대길래 솔직히 좀 무서웠다. 가만 보니까 신나서 터그놀이를 하듯이 몸을 흔드는 거였다. 내가 널 오해했구나.
택수는 산책 속도가 꽤 빨랐다. 사람을 물거나 짖거나 하지 않는 얌전한 골든리트리버였지만, 혹시나 사람이 많은 길에서는 목과 가까이 매달린 손잡이를 쥐었다. 기특하게도 가만히 서서 기다리기도 잘했다. 나는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다. 그래도 택수와는 약간 말이 통하는 것 같았다. 응가를 사람처럼 하는 택수의 뒤처리를 하면서는 이것이 생명을 키우는 무게인 것이겠거니 짐작도 했다. 배변봉투를 버리러 스택스에 돌아와서 택수한테 급수를 하고는 다시 한번 산책을 했다. 택수는 마치 처음 나온 것처럼 또 좋아했다. 택수와 함께 걷고 달리는 동안 더 좋았던 건 마주친 사람들이 택수에게만큼이나 나에게도 친절한 인사를 건넸다는 점이었다.
이날 밤, 스택스에서의 워케이션에 참여했던 두 분과 떠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여서 함께 야식으로 치킨을 먹었다. 열 시쯤부터 새벽 두 시까지 서로 영주의 무엇을 보았는지 얘기하면서 이렇게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같은 곳에 모인 것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오리엔테이션에서 내가 홍보대행사를 고소하겠다며 칩거 계획을 밝혔던 것과는 달리 택수와 산책도 하고 인터뷰이들과 대화를 먼저 택했다는 이야기를 나누고는 내 표정도 더 느긋해졌다기에 정말 그런가 싶었다.
6년 전에는 취재를 위해 영주를 방문했던 내가 여행으로 홀로 영주에 왔다. 이제는 떼인 1,500만 원을 곁들인. 무의미한 법정다툼 같은 것에 휘말리거나, 아니면 마음이 꺾이거나, 그도 아니면 돈이 더 잘 되는 일을 찾아 당장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주는 여기 계속 있겠지.
영주에서 옛날의 나를 바라본다. 6년이 지나서 이렇게 용역비를 떼일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좀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지금껏 내가 해 온 일들이 마이너스 1,500만 원이 된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할 것인지, 다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을 것인지, 앞으로도 콘텐츠라고 불리는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나뿐이기에. 나중에 다시 찾아올 영주에서 또 나는 어떻게 달라져있을까.
늘 처음하는 산책처럼 즐거운 택수처럼. 우리도 다시 새로 만날 수 있길.
2025년 영주에서의 4박 5일을 미래로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