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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Sep 30. 2023

에필로그는 감사의 존댓말로

모국어 사전 2탄 '모음'을 마치며

  한글 모음 수에 맞춰 스물한 편의 글을 올렸습니다. 어후, 쉽지 않았어요. 마음 가는 대로 하고픈 말을 늘여놓았던 1탄 <자음>과 달리 여러 제약이 뒤따랐거든요. 전부 제가 설정해 둔 조건들이지만요. '모'라는 한 글자는 ㅁ과 ㅗ로 구성됩니다. 맨 앞은 무조건 자음이 위치하지요. 국어사전의 옆면엔 찾기 쉽게 움푹 파인 부분들이 있습니다. 부록을 제외하곤 ㄱ부터 ㅎ까지 적혀 있고요. 그러니 매거진을 고안할 땐 자음에 맞춰 글을 쓰려고 했습니다. 쌍자음까지 열아홉 자를 끝내니 다시 ㄱ으로 돌아갈 게 아니라 모음에게 시선이 향했습니다. 모음에 맞춰서도 글을 쓸 수 있을지 궁금해졌거든요.


  그러기 ㅟ해선 맨앞ㅔ ㅟ치한 자음을 없ㅐㅑ 했습니다. 앞 문장을 읽으시는 데 막히는 분들은 없을 듯합니다. ㅇ이 초성(初聲)에 쓰일 때는 음가가 '없음'을 한국어 화자들은 알고 있으니 '없애' 봤습니다. 2탄 <모음>에서는 모음의 존재만 두각 시키고자 아야어여오요… 등 ㅇ을 초성으로 택했습니다. 자음이 종성에 위치하지 않게 받침 없이 ㅏㅑㅓㅕㅗㅛ… 모음만을 바라보았고요. 1편인 [ㅏ] 다음으로 익숙한 [ㅑ] 대신 [ㅐ]를 쓴 건 1탄에서 지키지 못한 어사전 순서를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모음이 몇 자인지는 알아도 배열만은 도무지 외워지질 않네요. 맞는지 확인해 보는 게 글을 쓰기 전 습관이었습니다.




  '아'로 시작하는 단어는 많습니다. 아기, 아나바다, 아득하다, 아름답다, 아마도… 그리하여 2탄 첫 글을 쓸 때만 해도 의기양양했습니다. 갑작스레 소환된 짝사랑을 떠올리다가 감상(感想)에 빠진 나머지, '용례'를 대신하여 서간문 형식까지 집어넣었어요. 편지에는 받는 이가 필수지요. 무턱대고 시작한 <자음>과 달리 <모음>에는 '통일성'을 가장 큰 핵심으로 두고 싶었습니다. (1) ㅇ 외 다른 초성 X (2) 받침 X에 이어 세 번째 조건으로 수신자가 더해지고 말았습니다. 큰일 났다 싶어서 3일 동안 고민하다가 조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여덟 편을 쓰고 나니 또다시 사흘의 정체기가 왔습니다. 다음 글자인 [ㅗ]보다 이어 나오는 [ㅘ]와 [ㅙ]에 입이 자꾸만 벌어졌거든요. "와!"라는 감탄과 "왜?"라는 의문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와'와 '왜'로 시작하는 단어는 적지 않긴 합니다. 다만 '와'는 지나칠 수 없는 날짜(0904)에 맞춰 선생님에 대해 쓰고 싶었고, '왜'는 수신자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서 이리됐습니다…….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조회 수에 일주일 가까이 반성했습니다. 통일성만 고집할 게 아니라 흥미도 고려해야 됐는데 앞서 세운 세 조건을 깨트리지 않으려다가 재미를 아예 놓친 듯합니다. 어찌 됐든 반응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우선 제 마음에 들어야 했습니다. 자존감과 문존심(文尊心)을 높이면 되었지요. 다만 쓰는 과정을 좋아하는 거지, 그에 따른 결과물은 부끄럽고도 민망하기만 하여 빙빙 회피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ㅜ] 편을 그나마 흡족하게 써내, 이대로 완결까지 (제 마음 기준) 고공 행진을 노리려 했건만… [ㅝ]랑 [ㅞ]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닙니까.


  살면서 '워'와 '웨'로 시작하는 말은 딱히 쓴 기억이 없는 듯하여 두 모음 앞에서 얼어붙었습니다. 결국 은밀한 조건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한글 자모를 내세우는 게 목적이 외래어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거든요. 지난 고비인 [ㅘ]에서 생각나는 게 와플, 와인, 와이셔츠, 와이프뿐이라 어휘력도 반성했지요. [ㅝ]로는 '워낙'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조건 (3)인 수신자가 떠오르질 않아서 외래어를 찾았습니다. [ㅞ]는 조건 (1), (2)에 맞추려면 외래어가 가장 나았고요. 이에 '워딩'과 '웨이브'가 선정됐니다. [ㅝ]보다도 [ㅞ] 편이 유독 억지처럼 보이신다면 맞습니다. 웨지감자와 웨이퍼(웨하스) 말고 그나마 나은 웨이브를 쓰기 위한 최선이었습니다. 두 고비만큼의 힘듦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으나 마지막 모음인 [ㅣ] 편을 끝내기까지 숱한 고민은 계속되었습니다.




  또 다른 은밀한 조건은 '과거'의 인연을 지목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되도록 말이지요. [ㅠ] 편의 절친들만 일부러 의도했습니다. 이 친구들은 앞으로 최소 1년은 타국에 머물 거 같아서요.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도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편의 공간을 할애(割愛) 했습니다. 둘에게 반반 똑떨어지도록 나누려(割) 한 사랑(愛)을 이 친구들이 알랑가 모르겠네요. 현재 인연들은 만남이 끊기기 전까지는 고맙고도 감사하게만 대하려 합니다. 하나 과거에 만났던 이들에겐, 당시 바닥을 기던 사회성이 아무래도 타격을 입히는 바람에 미안하고도 죄송하더라고요. 갚을 요량이 없으니 글을 남김으로써 "저처럼 후회하지 마시고 일상과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잘합시다!"라는 자기반성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저 미성숙했던 10대 시절엔 미래만을 그렸습니다. 특히 중학생 때는 '명문대'가 목표이기도 했으니 지금의 저보다도 공부를 멀리 하기 바빴던 고3 때 제가 비웃을 감이지요. 고등학생일 적엔 '미래의 행복' 갈망했습니다. 중삐리의 목표는 이뤄주지 못했는데 스펙은 나름 착실히 쌓았습니다. 대학 졸업이 코앞이고, 성적도 관리했고, 대외활동도 했고, 수상도 있고, 자격증도 적게나마 따긴 했으니까요. 스펙에 더해 여태까지의 삶을 요약하자면 유치원은 중도에 관두었으니 "초등-중등-고등-대학"이 될까요? 곧 "-사회(회사)"가 더해질 텐데 취직한다 해서 고삐리의 소원에 도달한다고 볼 순 없을 겁니다. 애당초 이는 객관적인 요약이지, 제가 원하는 요약은 아니거든요.


  7월의 어느 날, 길목에서 장미 세 송이를 샀습니다. 생화도 조화도 아닌 영롱한 빛을 뽐내고 있는 홀로그램 장미(플라스틱)였습니다. 제가 첫 개시 손님인 듯했습니다. 아침 8시도 안 된 시각이었거든요. 시외버스를 제때 타려면 걸음을 서둘러야 했는데 장미뿐 아니라 판매하시던 할아버지에게도 걸음이 붙잡혔습니다. 할아버지가 자꾸만 장미를 들어놨다 내려놨다 하시는 겁니다. 귀가하고 나서야 꽃은 튼튼해도 잎사귀 부분은 약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안 그래도 박스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들이 많아 의아했더랬죠. 잎사귀가 봉지 안에서 분리된 걸 보고 속상도 했지만, 아침엔 쨍쨍하게 붙어 있었으니 세심함에 감사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잘 떨어지니 본드로 붙이세요"라는 말씀 대신 착 고정된 예쁜 장미들로만 골라주신 겁니다. 할아버지와 마주한 시간이 장미보다도 값어치 있게 다가오더라고요. 이러한 기억으로 하루하루 버팁니다. 이러한 순간들을 쌓고자 현재를 잘 보내려고요. 미래를 향해 분주히 달릴 게 아니라 매초마다 바뀌는 지금을 충만하게 느끼고 싶습니다. 이때 감사해야 할 건 현재를 채워주는 사건과, 그 시간에 있어주는 사람들일 테고요.


  미성년자 때는 현재의 소중함도 몰랐고, 타인의 감사함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사회성 없는 발언으로 초를 친 적도 많으니 입을 아주 그냥 꿰매어버렸다가 한참 후에 푸는 게 나았지요. 과거는 돌아갈 수 없고 제가 했던 말들은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바라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속으로만 바라지 말고 말로도 바라고 글로도 바라면 그 바람(欲)이 커질 것만 같아서요. 제 자신을 위해 바라는  딱히 없고요. 제때 고마워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더 좋은 날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를 동행하는 사람들미래에 만날 사람들도요. 제 몸보다 커다란 바람을 이루기 위해선 욕심(慾)에 걸맞게 마음(心) 먼저 가꾸어야겠지요.


  2탄 <모음>이 1탄에 비해 버거웠던 건 제 능력 부족입니다. 글쓰기 연습을 더 하 시작해야 됐나 봐요. 날이 갈수록 미흡함을 절감했지만 바라는 바를 오만 군데 남길 수 있으니 좋기도 했습니다. 사적인 데다 재미 대신 감성만 취한 스물한 편의 글들을 우연히, 어쩌다, 일부러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는 그간 놓쳤던 흥미를 주안점으로 두려 하는데, 아니 했는데… '한자어'는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부터 품던 소재 중 하나거든요. 연습이라 생각하고 조금만 더 멋대로 쓰겠습니다. 이후엔 다른 작가님들처럼 흥미롭고도 유익한 글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 여기서부턴 넘기셔도 무방합니다 ※


  첫 단락인 편지에서 수신인을 뭐라 부를지도 고민했습니다. 알파벳 이니셜은 겹칠 듯하였고, 대명사로 칭하기엔 너무 뭉뚱그리는 거 같아 마음을 담아 특정 한자를 호명으로 썼습니다. 이름 석자 중 한 자에 걸맞은 한자(漢字)를 찾은 거지요. 소설이라면 이 또한 숨겨둔 장치가 될 텐데 수필이니까 싹 다 제 입으로 밝히고 마치겠습니다. 글을 더 노잼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싶네요. 혹여 해당 한자가 궁금하셨거나 왜 꼭 한자를 내세웠는지 의아하셨다면 참고 부탁드립니다.


  [ㅏ] ~ [ㅖ]

  紅(붉을 홍): 제 얼굴 마음을 자꾸만 빨개지도록 하였어요. // 株(그루 주):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떠오르는 친구였습니다. 사시사철 달라지는 나무 같으면서도, 그늘 아래서 쉬는 기분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 某(아무 모)와 童(아이 동): 다수를 가리키니 대표성을 띠는 한자로 고르려 했습니다. 童을 연속으로 붙여 '童童이들'이라 한 건 어감을 귀엽게 하고 싶어서입니다. 동보다는 동동이들이 귀엽지 않나요? ㅎㅎ // 波(물결 파) 선생님: 물결과도 같은 분이신 줄 알았는데 파도마냥 더 큰 분이셨습니다. // 悟(깨달을 오) 선생님: '독서와 문법'을 담당하셨습니다. 과목도, 선생님도 어려워만 했는데 모두 뒤늦은 깨달음을 안겨주었지요. // 茶(차 다): 차를 마실 때면 깊이 우러나오는 게 좋아서 티백을 늦게 빼내는 편입니다. 이동하던 중 물병 속 티백이 터지는 바람에 한 모금도 못 마시고 비워낸 날이 있어요. 茶는 차와 같이 깔끔하면서도 깊은 매력이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상처를 주고 말았지요. 


  [ㅗ] ~ [ㅚ] 

  響(울릴 향) 선생님: 문학을 가르치셨습니다. 교과서 작품들이 선생님을 거치면 유독 여운 가득 다가왔어요. 그런데 성함이 떠오르지 않네요…. 이름을 정말 못 외우는 데다 금방 잊거든요. 몹쓸 기억력 때문에 별 수 없이 어울리는 한자를 택했습니다. // [ㅘ] 편과 [ㅙ] 편에서는 수신자를 한자로 부르는 대신, 한자를 비꼬아서 메시지를 전하려 했습니다. //  基(터 기) 교수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간과했던 기본을 깨닫게 해주셨지요. 賢(어질 현)과 柱(기둥 주) 언니는 서론에 썼습니다. 賢의 어진 행동은 매번 절 놀라게 하고, 柱 언니는 자꾸만 기대고 싶어지는 든든한 사람입니다.


  [ㅛ] ~ [ㅣ]

  緣(인연 연) 교수님: 시야를 세계로 넓 이끌어주셨습니다. // 智(지혜 지) 선생님: 지식보다 귀한 지혜를 일러 주신 역사 선생님이십니다. // 滿(찰 만) 교수님: 제 롤모델이세요. 머릿속과 마음속 특정 그릇이 메마를 일 없도록 해주시지요. // [ㅞ] 편의 수신인은 '우리' 할머니라 한자를 붙이지 않았고요. [ㅟ] 편은 애정을 느낀 대상들이 아니니 생략했습니다. // 晴(갤 청)과 炫(밝을 현):  晴 앞에서는 유독 솔직해집니다. 언제든 마음을 다독여주니 울적함도 금방 개더라고요. 炫은 눈이 아프도록 점점 눈부셔집니다. 늘 본받게 돼요. // [ㅡ] 편에선 선생님이란 호칭 앞에 '사서'도 붙으니 굳이 한자까지 더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넘치시던 慈(사랑 자) 선생님과, 어디든 학생들을 인도하시던 載(실을 재) 선생님에겐 붙였습니다. // 我(나 아) 세탁소 사장님: 제 의도를 뽐냄과 동시에 저만의 색채가 강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 碩(클 석)님: 연예인이니 검색만 하면 이름의 한자를 알 수 있더라고요. 잘 어울려서 그대로 데려왔습니다.


고3 때 부적이었습니다. 문구는 제가 고른 건데 바꿀 수 있다면 "our story"로 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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