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밀과참 Oct 03. 2023

완벽하지 않아서 좋은 휴일

연휴 다섯째 날의 시간

  우리 지역은 산으로 막혀 있다 보니 바다는 생경한 대상이다. 좋아하진 않는다. 별 감흥이 일지도 않는다. 볼 기회가 잦아야 정도 빨리 드는 내겐 언제고 펼쳐 있는 초록색 무대가 더 눈부시다. 다만 '여행' 하면 '바다'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인 까닭에 호불호보다도 당연시되는 경향이 커 보인다. 올여름 삼부녀 첫 여행의 목적도, 지난여름 부모님이 골탱이 난 둘째 딸을 차에 태운 것도 바다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서 바다를 남달리 여기는 건 아빠와 언니다. 이번에는 쪽수로 밀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연휴 다섯째 날 여행지는 해수욕장이 있는 보령으로 정해졌다. 바다를 사랑하여 강릉에 거주한 적도 있는 첫째 딸을 위하여, 그리고 바다는 안 좋아하지만 조개구이가 궁금하다는 엄마를 위하여.


  나만 출발 전부터 화나 있었다. 전날 밤의 꽁기와 당장의 짜증이 어우러졌다. 텔레비전 독점자 아빠에게 리모컨 넘겨줄 것을 미리 부탁하며 동의도 받았었다. 밤 9시에 우리나라 남자축구 8강전이 있음을 난 일찌감치 알았다. 아빠는 명색의 '스포츠 토토' 러버가 돼선 시간 확인도 안 하고 배팅한 건지, 축구하는 줄 몰랐다며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언니까지 방구석 중계에 합세하였다. 두 사람과 경기를 보려면 귀마개 착용도 통하지 않는다. 내 목적은 축구 시청도 아니기에 엄마와 안방으로 피신하였다. 우리나라 승리로 끝났다 하여 드디어 텔레비전 볼 생각에 나갔더니 하이라이트 장면이 나온답시고 요지부동이었다. 축구는 실시간 응원이 묘미인 걸 알지만 우리의 협상 전에 경기는 이미 잡혀 있었다. 축구를 볼 거면 시간 확인을 했어야 됐다. 아빠는 8강 전까지 축구를 챙겨 보지도 않았다. "9시에 텔레비전 줄게" 말했으면서 "스읍, 축구한대잖아" 한 입으로 두 말 하다니 뻔뻔하기 그지없다!


  넷째 날의 여행을 다섯째 날로 미루며 출발은 10시로 맞췄다. 하나 시간을 정해두는 일은 우리 집에선 날마다 달라지는 날씨만큼이나 의미 없다. 여기에 집착하는 건 나뿐이다. 다섯 구성원 다 같이 낮잠 잤는데 나만이 새벽 5시 넘어서야 잠들었다. 아침 7시 알람은 내 정신이 가뿐히 무시했고 8시 알람은 엄마가 꺼버렸다. 9시도 아니고 10시가 돼서야 일어나고는 어찌해야 좋을지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이래서 일찍 일어나고 차에서 자려 한 건데 온 계획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며 암울해졌다. 내 기상(起床)을 기점 삼아 다 함께 준비하였다. '날 기다릴 시간에 깨워주는 게 낫지 않았나' 야속했다. 앞서 말한 바 '약속한 시간'만큼 구실을 상실한 것도 없기에 가족들은 별말 없이 짐을 챙겼다.


  원래는 태안이 목적지였는데 차 안에서 보령으로 변경됐다.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나는 또다시 탄식하였다. 보령에 도착하고는 주차할 곳을 찾느라 빙빙 돌았다. <점심을 먼저 먹을지, 바다부터 거닐지> 정해지지 않았다. 바다를 거닐다 말고 햇빛이 뜨거워 실내에 가기로 했는데 <조개구이를 지금 먹을지, 카페 갔다가 갈지, 점심은 간단히 해치우고 저녁으로 조개구이 먹을지>도 입이 모아지지 않았다. 10월 2일 보령 날씨는 여름과도 같았다. 무지막지한 햇빛을 도로에서 감내한 걸로도 모자라 직사광선으로 쬐이며 이리저리 걸었다. 언니는 네이버 예약으로 싸게 먹자면서 기다리라 하더니 "됐다, 그냥 가서 먹자" 관두었다. 일렬로 식당이 늘어서 있기에 나는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물었다. 내 의도는 '왼쪽 식당에 들어가냐, 오른쪽 식당에 가냐'였으나 가족들은 오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애당초 목적 중 하나가 조개구이니 진즉 식당을 정하고 오든지, 그도 아니면 전부 조개구이집이니 아무 데나 들어가든지!!! 점심 먹고 나서의 계획도 無라는 게 내 불안이 활활 타오르도록 만들었다. 조개구이집만 들어가면 한소리 해야겠다고 다짐했으나… 언니가 선수 쳐버렸다.




  대천 해수욕장에는 조개구이 전문점이 일렬로 쫙 있다. 2층은 커피숍인 건물이 있는가 하면 2층까지 식당인 집도 많다. 가게 앞에는 한두 분이 나와 계시며 이리로 오라고 홍보하신다. 아무래도 주차 공간이 빡빡하여 "주차까지 해결해 줍니다~"라면서 우렁차게 말을 거신다. 우리는 인근에 차를 대고 걸어가던 중이었기에 "식사는 하셨나요?"라며 붙잡으시려는 분들이 많았다. 후다닥 뛰쳐나오시며 "뭐가 드시고 싶으세요? 보고 가세요!" 외치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다 직원 말고 사장이시라는 분과 맞닥뜨렸다. 강렬한 미소를 풍기시며 "가격 확인하시고 다른 집 가셔도 괜찮으세요 ^_^"라며 우리 걸음을 붙들으셨다. "가격은 어느 집을 가든 똑같습니다. 딸들에게는 초밥 서비스, 사장님(아빠)에게는 술과 회 서비스~!"라며 손짓발짓 다하시는 퍼포먼스에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언제까지 시간을 지체할 순 없으니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가 네이버로 찾던 건 조개 삼합(조개+삼겹살+김치를 비롯한 반찬) 구성이었는데 이 집엔 삼합은 없고 삼겹살 네 조각이 밑반찬으로 나왔다. 조개 무한 리필을 이용하려면 인원수대로 주문해야 됐다. 언니는 다른 식당이 낫지 않았느냐면서 알아서들 주문하라고 투덜거렸다. 화장실에 다녀오고 나선 "옆집은 떡갈비도 서비스로 준다"며 궁금하지도 않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럴 때마다 나와 엄마는 "1절(만 해라)" 받아친다. 이미 들어왔고, 주문했고, 조개까지 나왔는데 옆 식당을 들먹여서 무얼 하나. 식당에선 점심 먹고 나서의 일정을 정하고 계획의 필요성을 설파하려 했다. 나야 바다를 안 좋아하니 그렇다 쳐도, 세 사람 다 예상치 못한 더위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당연 양산과 모자도 챙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까처럼 정수리가 마냥 타게 둘 순 없었다. <해변에 얼마나 있을 건지, 카페에 가려면 얼마나 머물 건지, 집에서 막내(멍멍이)가 기다리고 있으니 몇 시에 출발할 건지> 대강이라도 정하길 바랐다. 동시에 "다음번에도 계획 없이 출발했다간 동행하지 않겠다!" 팍 폭발하려 했건만…… 넷 중 화내는 사람은 하나로 족하다. 언니의 불평이 잠재워지고 얘기를 꺼냈으나 전날 아빠를 기다릴 때처럼, 뺏긴 순서에 발 동동 구르느라 내 화는 미약하게 튀어나왔다.


  밥을 먹으면서는 '친절'에 관해 떠들었다. "저 새끼는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분노는 알겠다마는 '가정교육'은 수능 공략처럼 인풋과 아웃풋이 확실하지 않다. 우리 자매만 해도 똑같은 엄마 밑에서 상극을 보였으며, 거리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한 사람이 뛰어나고 다른 한 사람이 뒤처진다기보단 성향 차이가 커서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지경이다. 언니와 나는 동일한 초중고에 입학-졸업하였다. 간혹 언니를 가르치신 선생님께 나도 수업을 듣는 경우가 생겼다. 그럴 때마다 자유로운 영혼인 언니 존재를 숨기려 했다. 중학교 <도덕>과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은 내가 좋아하는 과목들이었다. 자연스레 담당 선생님들에게도 친밀감을 가졌는데 재밌으신 선생님들이 언니한테는 화를 내다는 게 아닌가. 언니가 중학교 졸업하면서 내게 물려준 후드집업은, 도덕 선생님이 한때 언니 담임이셨다는 걸 들은 날로 내던졌다. 이 후드집업 탐탁지 않아 하셨다고……. 윤사 선생님은 내가 입학하기 전에 선도 담당이셨다. 당시 교칙에 어긋나던 '여학생 바지 착용' 문제로 언니를 주시하셨다고 한다. 언니는 좋게 말하면 신이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굽힐 줄 모른다. 반면 나는 신념은 있어도 할 말 삼키니 호구라 언니가 야단이다. 내 호구끼를 인정한다.


  남들에게 (나도 못하는) 완전하고도 완벽한 선의를 강요하지 않는다. 악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니 차라리 위선이라도 떨라며 선을 우선으로 두게 하고 싶다. 언니는 서비스업에 오래 종사한 데다 인구 많은 서울에서 다양한 진상들을 접하다 보니 사람에게 질색팔색한다. 문제는 모든 개인이 전부 나쁠 수 없다는 진리다. 선한 사람들의 친절은 은은하게 이어지지만 악한 이들은 곧장 고개 찌푸릴 만큼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요즘 사람들 왜 이러냐?" 이 말은 냄새나는 인간들이 인당 50인분으로 굴어서 나온 거다. "요즘 사람들 왜 이러냐? 우리는 저렇게 되지 말자" 구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요즘 사람들 왜 이러냐? 나도 손해 볼 바엔 저들처럼 굴련다" 각성하는 집단도 있는 게 악을 제대로 콱! 처치해야 하는 까닭이다. 언니는 진상 손님에게 반격할 줄 알지만 따뜻한 손님은 어색해한다. 날이 갈수록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같은 말도 듣기 힘든 요즘이다. 선은 이렇게 한 마디로도 가능한데 악은 구구절절 길어지니 인상도 깊게 남긴다. "이러이러한 게 문제잖아" 지적하는 건 쉬워하나 "나는 이런 게 잘못이고 너는 이런 걸 잘했네"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언니와 선의에 대해 논쟁하다 말고 열심히 먹었다. 곁들여 나오는 음식은 인원 수와 상관없는지 알밥, 칼국수가 0.5인분만큼 나왔다. 초밥과 회는 1인분처럼 보였다. 삼겹살은 리필 가능한데 필수인 조개구이용 치즈는 돈을 내야 했다. 인원 관계없이 딱 한 접시 나오나 추가하려면 3천 원이라고 했다. 키조개, 가리비, 홍가리비 등이라도 리필해야겠다며 언니가 열을 올렸다. 리필은 처음 나온 대접과 묘하게 차이나긴 했다. 화살은 아빠에게 향했다. 집 앞에 조개구이 맛집이 있어서 가자가자 노래한 엄마에게 아빠가 바닷가가 싸다고 굴었었다. 싸기는 무슨! 아무래도 내 호구 DNA는 물정 모르는 아빠에게서 나온 게 아닐지. 카페는 내가 정한 곳으로 갔는데 즉흥적인 방문이 나을 때가 있다는 걸 카페에 머물면서 실감했다. 사람들 눈 다 똑같나 보다. 내 눈이 MZ 세대 취향과 걸맞긴 한지 조개구이 집에서 보이지 않던 젊은 남녀들이 밀려들어왔다. 의자에 비해 테이블이 낮은 '감성 카페'라 허리를 숙여야 하는 것 빼곤 다 괜찮긴 했. 카페와 차를 세운 곳까지는 거리가 있어서 물살이 차오른 해변을 따라 걸으며 돌아왔다. 연휴가 어째 완벽하게도, 그렇다고 못나게도 흐르지 않은 게 딱 우리 가족 같다.


대천 해수욕장은 저녁 직전이 아름다운 듯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낮잠의 결말은 배고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