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개미 Jan 03. 2024

괴롭힘 가해자가 되고도 견딜 수 있을까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건강한 일터를 꿈꾸며



가해자가 되는 억울한 마음


'가해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눈앞이 캄캄해져 순간적으로 정전이 된 것처럼 느꼈다. 나를 가해자로 신고한 신입사원 A과 지방 출장을 다녀온 바로 다음 날이었다. 사무실로 복귀하기 무섭게 임원 호출을 받은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전혀 모른 채 큰소리로 웃으며 인사를 했었다.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 '피해자'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내가 의자를 빼고 앉은 직후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상황 파악에 나섰지만 벌어진 일들에 평정심을 되찾기란 힘든 일이었다.


A가 괴롭힘으로 주장하는 지점들은 어딘가 모호했다. 사실 우리 팀원들은 서로 친하기도 하고, '교육'이라는 업무 특성상 외향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종종 업무 중에도 시답잖은 농담들을 하곤 했데, 이런 팀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누군가는 불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여기에 교육 준비를 위해 해 왔던 일들이 '괴롭힘을 위한 잡무'가 되어 더해지고, 또 다른 누군가의 '상습범'이라는 제보로 이미 해자로 확정된 상황이었다. 억울한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내가 나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 보였다.


난생처음 일터에 대한 회의감이 려왔다. 먼저 신입사원 A에게 큰 배신감이 들었다. 선배사원에게 신입사원 OJT는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시간을 쪼개 기꺼이 할애한 노력의 대가가 가해자가 되는 것이라면, 차라리 무심함을 택하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 들었다. 무엇보다 임원에게 찾아가 직장 내 괴롭힘을 언급할 용기라면, 왜 당사자인 내게 직접 불편함을 표현하지 않은 것인지 따져 묻고 싶 걸 꾹 참았다.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중대하고 민감한 사안을 다루는 회사의 대처에도 실망이 컸다. 누군가를 '가해자' 혹은 '피해자'라 명하기 전에 양쪽 입장을 편견 없이 청취하는 역할. 직원 간 오해가 있었다면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야 말로 지극히 상식적인 절차인데, 어쩌다 내가 이런 상식밖의 에 엮여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하는 걸까.


누구나 가해자가 되는 일터에서 서로를 지키는 법


억울한 마음은 쉽게 해소되지 않아서 평온한 순간에도 울컥하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차오르곤 했다. '이깟 회사 그만두고 말지.' 하며 놓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평소 나와 A의 관계를 가까이서 지켜본 동료들이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과장님이 포기해요?"라며 지지해 주지 않았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동료들은 내게 새로운 별명도 붙여 주었는데 다름 아닌 '회사 일진'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안 해본 일진을 회사에서 다 해본다며 서로 깔깔깔 웃은 덕분에, 억울한 감정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이란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정의한다. 여기서 핵심은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는지의 여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명찰을 만들던 신입사원 A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조금만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면 A가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일찍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간 나도 모르게 일방적인 소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가해자가 될까 두려운 나는, 후배에게 업무 지시를 하기 전 상대방이 수용할 수 있는 ‘적정 범위’를 먼저 파악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번거롭더라도 일의 의미에 관한 부연설명을 더해주는 방식으로 나를 지키게 되었다.

 

"과장님이 회식자리에서 성희롱을 하세요."

최근 가까이 지내는 후배로부터 이와 같은 고민을 전해 들었다. 연차가 낮은 직원들이 가진 대부분의 불만은 선배를 향하기 마련이지만, '성희롱'은 '직장 내 괴롭힘' 만큼이나 중요하고 민감한 이슈다. 나는 조심스레 회식자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요. 자기들끼리 조금 야한 농담을 하셨어요. 그게 성희롱이죠 뭐."

다행히 어떤 직접적인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회식 자리에서 선배들이 성적인 농담을 나누었고 우연히 그걸 들은 후배가 불편함을 감지한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당장 신고부터 해야겠다는 후배를 진정시키며, 그 상황에서 느꼈던 불편함에 대해 선배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 볼 것을 권했다. 신고는 분명한 의사표현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어쨌거나 이 사건에 대한 후유증은 생각보다 커서 괴롭힘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난 후에도 한동안 생각하며 지냈다. 최초 신고자인 신입사원 A와 나,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보탠 B, 다짜고짜 몰아세운 임원 C 중에 과연 진짜 가해자는 누구였을까 는 물음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누구나 쉽게 가해자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특히 일터에서 발생하는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희롱'은 반드시 근절되어야만 한다. 다만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단 한 명의 억울한 가해자도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다.



마음의 병 공황장애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인사담당자가 오늘날 직장인의 마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터의 마음> 연재는 매주 수요일 발행되며 10화로 구성됩니다. 따뜻한 손그림과 담백한 글로 여러분의 출근길을 함께 하겠습니다 :)


글, 그림: 꽃개미

낮에는 HR 부서 교육담당자로 일하고 퇴근 후 그림일기로 일상을 기록하는 사람. 공황장애 에세이 <지하철이 무섭다고 퇴사할 순 없잖아>, <엄마가 되었지만, 저도 소중합니다>의 저자

인스타: @sammykhim

이전 01화 회사어른의 이상한 성적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