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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m Apr 11. 2021

심리상담 이야기 1. 잘 살아갈 용기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번 더 해보려구요.

 2021.4.10. 완연한 봄. 적당히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고 햇살은 서글플 정도로 따사로운 봄날. 가방도 메지않고 주머니에 교통카드와 휴대폰만 넣고 단촐하게 집을 나섰다. 새로운 심리상담 센터로 가는길. 어떻게 왔냐고 물을텐데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할까? 10년도 훌쩍 넘은 나의 기나긴 우울과 불안의 터널, 도저히 풀어낼 방법이 없을 것처럼 모질게 엉켜버린 내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냥 맡기자. 면접보러 가는 게 아니잖아. 습관적인 불안과 강박이 잠시 엄습했지만 놓아버리기로 했다. 내가 어버버하며 말을 못해도 알아서 잘 진행되게 해주실거야. 도움을 받으려고 가는 곳이니까.


 심리상담센터는 내가 좋아하는 원목과 푸른 식물들로 간결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주먹만한 크기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경쾌한 음악이 대기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앉아있던 의자는 딱딱한 나무의자여서 그닥 편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불안해하며 앞에 놓여있는 라탄 재질의 의자인지 뭔지 용도를 알 수 없는 둥그런 물체에 발을 올리고 있으면 덜 불편할텐데 그래도 되는건지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40~50대 정도로 보이는 인자한 인상의 상담 선생님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OOO님 되시죠? 반가워요. 저는 상담을 맡게 된 OOO라고 해요.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너무 젊은 나이대의 상담사가 배정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나랑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에게 내 고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심리상담을 전문적으로 배웠어도 그게 인생을 배우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건 잘 되었다.


 본격적인 상담 전에 개인정보 동의서와 상담과 관련된 이런저런 안내를 받았다. 마지막엔 자살하지 않겠다는 서약도 했다. 나는 상담을 진행하는 도중...자살을 생각하거나 실행하지 않겠으며...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을 때에는 주위에 도움을 청할 것을 서약합니다...

자살은 나의 선택지에 없었다. 그저 깊은 숨을 내뱉듯 아, 죽고싶다, 라든가, 내가 죽어야 이 모든 게 끝날 거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들, 죽지 못해 사는 시간들도 분명 있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냈다. 삶에 미련이 많았다. 이대로 죽으면 너무 억울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이 왜 이리도 자주 무너지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명확히 기억나는 건 "어떻게 오셨어요?"와 같이 망망대해같은 무한한 대답할 거리를 만들어 입을 옴쌀달싹 못하게 만드는 막연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자살하지 않겠습니다 서약을 한 후에 상담조사문 같은 걸 썼다.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선택하는 항목이 있었고, 학업과 자해 같은 이미 지나쳐 온 것들이나 너무 극단적인 선택지를 빼고는 거의 다 체크했던 것 같다. 우울, 불안, 초조, 긴장, 이별, 체중 증가, 대인관계 등.


 혹시 전에 심리상담을 받아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했던 거 같다.

"두어 번 정도가 있어요. 대학 다닐 때 22살때인가 전화상담으로 한 번, 2017년에 한번, 그리고 작년 봄에도 한 번 받았어요. 그런데 다 1회성으로 끝냈던 거고, 작년 이맘때 쯤인가엔 병원에 가서 약도 받아서 두 달 정도 먹었던 거 같아요."


 상담 선생님은 단기성이지만 꽤 자주 심리상담센터를 찾았다는 것에, 그리고 그걸 2번 이상 지속하지 않았다는 것에, 그리고 약물치료도 스스로 중단했다는 점에도 꽤나 놀라신 거 같았다. 첫째는 진짜 죽을만큼 힘들 때 상담 받으면 엉엉 울게 되고 그러면 속이 좀 시원해지니까 괜찮아진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고, 둘째는 평일엔 업무에 치여 보통 상담시간을 주말에 잡는데 도저히 주말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을 만큼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까 얘기는 안했지만 비싼 상담료도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월 200만원의 월급쟁이가 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부유한 때일만큼 가성비에 찌들어있는 가난한 선택지에 익숙해져있던 내게 값비싼 상담료는 항상 숙청해야 할 적이었다.


 그렇게 두번째 서약을 했다. 이번에는 상담을 받다가 그만두고 싶거나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들 때에도 상담 선생님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같이 의논해서 결정하기로. 그렇게 말하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 웬만하면 혼자 속으로 삭히는 성향에 대해서도 말하게 됐다. 또 그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상담을 그만두었다가 왜 다시 찾아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얘기가 이어졌다.

 

 다시 상담을 받아보기로 결심한 이유는 지금 2년 넘게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와 행복해지고 싶어서이다. 내게 깊고 어두운 터널같은 우울의 늪이 있다는 것도, 그런 우울의 원인이나 그동안 이런 저런 상담을 받고 항우울제를 먹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은 지금의 남자친구뿐이다. 그런 얘기들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한테만큼은 말해도 되겠다 싶었다. 헤어질 각오까지 하고 내 밑바닥을 드러냈지만 남자친구는 오히려 나를 안아줬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작년에 병원으로 상담 받으러 가는 길에는 혹시 눈물이 날 지 모르니 필요할 거 같다며 자신의 손수건을 내 손에 조용히 쥐어주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지금의 상태로는 절대 행복을 안겨줄 수 없을 거 같았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에서 결혼하고 싶다고 했고 그건 남자친구도 바라는 바였다. 건강하게 치유될 때까지 응원하고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정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다시 상담소를 찾았다.


 "그렇게 지지해주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왜 그렇게 이별에 대해 불안해하세요?"

 "그냥...저처럼 이렇게 우울한 사람이랑 있으면 싫을 거 같아요. 저는 같이 있으면 기운 빠지게 하는 사람인 거 같아요. 지금 이 상태론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어요."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우울한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학창시절엔 어땠냐고 하셨다. 학창시절은 지금의 나와 많이 달랐다. 지금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만큼 다른 모습이었다. 반장도 많이 했고, 친구들과도 대체로 잘 지내는 학생이었다. 공부도 꽤나 잘 했고 학교가는 게 즐거웠다. 그런데 그건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였고, 고2때부터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건 내가 한 2~3년 전 쯤부터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느끼게 된 것인데 고등학교 1학년때 처음 사귄 남자친구와 1년 정도 만나고 헤어지게 되면서 생긴 상실감과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같은 시기에 찾아온 류마티스 관절염의 발병으로 인한 어려움이 겹치면서 전보다 움츠러든 게 아닌가 싶다고 말씀드렸다.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학창시절에 친한 친구들과 즐겁고 재밌는 얘기는 많이 했는데 내가 힘든 얘기는 거의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참고로 그 시절의 우리집은 매일매일 최악을 경신하는 중이었고 나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살았다. 그런데도 그 모든 분노와 무력함, 슬픔 같은 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았다. 그냥 언제나처럼 혼자 알아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친구들만 보면 웃음이 배실배실 흘러나와 집에서 있었던 온갖 끔찍한 기억들은 슬쩍 잊혀져서 그랬던 거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남자친구라는 존재가 생기면서 처음으로 나도 누군가에게 기댈  있고 의지할  있다는  알게  것이다.  동안은 의지한다는  무엇인지 몰랐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과는 다르게 너무도 화목한 남자친구네 부모님을 보면서 처음으로 '가정' 대해서 생각했을  나도 행복해질  있다는 희망을 품었던  같다. 뭐든 처음은 달콤하고 그래서 그만큼 아프다고 했던가. 첫사랑의 상실감은 어마어마했다.  직후 손가락 관절에   없는 통증이 찾아왔고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 진단과 함께 나는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매사가 불안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며 자신감이 없는 그런 사람으로. 그 전에도 약간은 그런 면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몸과 마음에 통증을 짊어지고 나름 공부라고 했는데 원하던 대학에는 갈 수 없는 성적이었다. 집안 형편 상 재수는 꿈도 꿀 수 없었고 점수에 맞는 대학에 학과만 배우고 싶던 걸 선택해서 들어갔다. 선생님께서는 지금 졸업한 대학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요, 라고 말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나도 공감한다. 그런데 그때는 아니었다. 원하던 대학에 가서 즐거운 대학생활을 하는 친구들에게 자격지심을 느꼈다. 무엇보다 자신감이 없었다. 나를 내놓고 다니는 게 너무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학교만 겨우 오가는 정도로 은둔 아닌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첫 상담에서 나눈 대화는 이 정도이다. 세상에 이런 얘기를 벌써 몇번째 하는 거지만 또 울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왜 내 감정을 얘기하려고 하면 눈물부터 나는 것일까. 어쨌든 이렇게 50분 간의 첫번째 상담이 끝났다. 상담 선생님은 내가 겪은 아픔에 공감해주셨지만 너무 지나친 위로를 하진 않으셨다. 그 점이 좋았다. 몇 년 전에 상담받았을 때는 그렇게 힘든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대학도 딱 나오고 취업도 딱 하고 잘 살고 있다, 라고 격려 아닌 격려를 해서 전혀 내 얘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구나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힘든 사람에게 너무 맥락없이 그래도 잘 하고 있다,라고 하는 격려는 오히려 더 공허하게 들릴수도 있다.


 하고싶은 검사가 있냐고 물어셔서 원래의 기질과 성격에 대해 알고싶다고(학창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도무지 매칭이 되지 않고 이런 상태가 오래되다 보니 본래 성격이 어떤건지, 어떤게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분이 안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했더니 MMPI 검사와 TCI 검사지를 받았다. 다음주에 결과가 바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집에 와서 깊게 한숨 자고 1시간 정도 검사를 마치고 이 글을 쓴다.


 많은 시간이 속수무책으로 지난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상담센터를 찾은 이유는 잘 살고 싶어서이다. 나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에게도 위로가 되고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고싶어서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회복이 어느때보다도 절실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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