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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m May 01. 2021

심리상담 이야기 3. 내 마음에 항상 물음표가 붙는다.

내 감정이 이게 맞나요? 틀리면 어떡하죠?

 2021.4.30. 세번째 상담 시간. 지난주에 상담을 취소하고 일주일을 미뤘다. 육체적으로 극도로 피곤하기도 했고 원래 무슨 일을 하든 한두 번 하면 나타나는 '그만하고 싶어' 증상이 도진 탓이기도 했다. 안그래도 이번 상담에서 선생님이 그걸 물어보셨다. 이번에는 어떻게 계속 나오시게 됐냐고. 이번에도 그만두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주변 또래들은 벌써 결혼하고 애까지 낳고 사는데 아직도 사람들하고 어울리지도 못하는 나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고. 지금 그만두면 몇 년 후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지금 힘들어도 조금 이 악물고 몇 번을 더 견뎌내 보기로 했다고.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아주 다른사람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더 발전할 수 있으니까...


 지난 시간에 막막해서 하지 못한 가족 얘기를 했다. 내가 직장 상사들, 나보다 나이나 연차가 높은 사람들을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불편해하고 싫어하는 이유가 어렸을 때 가정환경의 영향이 어느정도 있을 거 같다고 했다(문장완성검사에 이렇게 썼다. "나는 상사를 보면 마주치기 싫어서 오던 길을 되돌아 간 적이 있다" "윗사람들은 항상 아래사람들을 평가한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정말이지 불편한 존재 그 자체였다. 다른 수식을 굳이 힘들여 붙이고 싶지도 않다. 거의 항상 싸웠고,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부터 벌컥냈고, 한번 화가 나면 이성의 끈을 아주 쉽게 놓아버리곤 했다. 엄마 아빠가 기분이 좋은 날도 분명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날에도 언제 이 평화가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한번 싸우면 개싸움이 되었다. 몸으로 치고받고, 동네가 떠내려갈 듯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살림을 때려부수고, 집을 나가고...

직장생활을 하고 돈을 번다는 대가로 치러야하는 갖은 마음고생, 몸고생의 고단함을 알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야 없는 살림에 한창 커가는 자식 둘을 키워야했던 부모님의 마음이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에서 오는 불안과 분노를 아무런 힘없는 어린 내가 고스란히 견뎌냈어야 하는 타당한 이유는 없는 것 같지만.


 대표적인 일화는 이런 종류의 것이다. 중학교 3학년이나 고등학교 1학년 쯤 되었던 것 같다. 초여름 보슬비가 살짝 내리는 하교길이었다.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아 엄마와 집으로 가는 길 언저리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시장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고 버스에 내려 약속 장소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통화중이었나 해서 연락이 되질 않았다. 집도 멀지 않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해서 혼자 집으로 걸어갔다. 그 당시엔 현관문이 열쇠로 되어 있어서 열쇠를 가지고 있는 엄마가 와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복도 계단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줄기차게 통화를 했던 것 같다. 그 사이 엄마는 통화가 되지 않는 전화를 붙잡고 씩씩대며 집으로 왔으리라. 복도에 앉아 까르르대며 통화하고 있는 나를 보고 벌컥 분노를 내질렀다.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기억이 나는 건 내가 '이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야?'라는 식의 말을 했던 것과 그 말로 인해 엄마의 분노를 더 키워 집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는 정도이다.

 

 엄마가 화났을 때 내게 하던 말들은 거의 거기서 거기다. 새롭고 참신한 말은 없고 거의 쌍시옷이 들어간 욕의 연속이거나, 어디서 감히 부모도 못알아보고 말대꾸냐, 내가 니 부모다, 개같은 년, 뭐 같은 년 등의 그닥 논리도 감동도 없는 어지러운 말들의 반복이었다. 굉장히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엄마가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니면서 남편에게는 항상 무시당하는 여자가 유일하게 떵떵거릴 수 있는 사람, 내가 낳은 딸. 같은 환경에 처한 모든 사람이 우리 엄마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겠지만 슬프게도 우리 엄마는 부모라는 지위를 권력으로 휘두르는 걸 선택했다.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으니 아주 모질게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엄마에게 난 엄마 소유였다.


 그렇게 집으로 올라가 내 딴에는 듣지 않아도 될 과한 비난을 받았다는 억울함이 들어 나름 대들었던 것 같다.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냐고!"

 "뭐? 이런 개같은 년이 뭐라고 했어 지금?!"

 그렇게 머리 위로 가혹한 폭행이 가해졌다. 나는 수도없이 맞았고 머리채를 잡힌 채 여기저기 던져지며 욕을 들어야 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또 때리려고 달려드는 엄마를 향해 책상 의자를 들어올렸다. 정말 쳐 내리고 싶었다. 그냥 나도 한때 쳐버리고 싶었던 마음이었다는 것밖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죽여버려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차마 그러진 못하고 팔을 부들부들 떨며 의자를 계속 들고 있었다. 패륜아라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는 그 길로 아빠에게 전화를 해서 최대한 빨리 집으로 들어와서 저년을 죽이든지 내쫓든지 해야 할 거 같다고 얘기했고 방문을 닫고 나갔다. 아빠가 올 때까지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방안에서 기다려야했다. 그때의 공포는 지금 생각해도 어마어마하다. 창 밖으로 뛰어내릴까. 지금 할머니나 다른 사람이 집에 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맞고 싶지 않았다.

 

 "그때 왜 집밖으로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그러게요..그런 방법도 있었는데 왜 하염없이 떨고만 있었을까요. 나도 그게 안타까웠다. 도망갔어야했다.


 아빠가 온 이후로는 더 맞았다. 아빠는 골프채의 손잡이 부분으로 나를 두들겨 팼다. 참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못살던 집에서 골프채가 나오다니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 당시에는 우리집이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골프를 치러다니진 않았고 예전에 아주 조금, 아주 조금 살만하다 느꼈을 때 부부동반으로 골프를 몇 번 치러다녔던 적이 있었다. 그 어린나이에도 도대체 돈도 없는데 골프를 왜 치러 다니는 걸까 의아해 했던 것이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학창시절의 어느 날 나에게 살상무기가 되어 돌아온 걸 생각하면 기가막힐 노릇이다. 차라리 맞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사태를 알아주지 않을까. 분노 조절이 힘든 부모의 폭력을 아무도 모르게 참아내야 하는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내가 죽는 것. 결국 내가 죽어야 끝날 일이었다.


 심리검사 결과로 나온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내가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꾹꾹 누르고 있거나, 그마저도 자기 감정에 완전한 확신이 들 때까지 두고 보다가 폭발하듯 터뜨린다는 것이었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묻어두는 것보다는(물론 그것도 맞지만) '자기 감정에 확신이 들 때까지'라는 부분에서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그게 심리검사로 나온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내 감정에 확신이 없다. 어떤 사람의 말 때문에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빴다 치자. 그러면 그 순간 내 안에서는 매우 엄격하고 빡빡한 자기 검열이 시작된다. 이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인가? 정말 저 말에 기분이 나쁜거야, 아니면 오늘 컨디션이 그냥 안좋아서 그런거야? 너무 속이 좁은 거 아닐까? 이런 것도 쿨하게 웃어 넘기지 못하다니. 이걸 표현하면 분위기가 매우 안 좋아질거야.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등등의 내면의 말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그러니 당연히 기분 나쁘다는 감정을 표현할 시의적절한 때를 놓치게 된다. 게다가 그런 기분 나쁜 말들은 표현하지 않으면 어김없이 반복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한두 번, 두세 번 타이밍을 놓친 후에 끝내 폭발적으로 터지게 되는 성격의 뫼비우스의 띠가 형성되는 것이다.

 

 선생님은, 어렸을 때 성숙하게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부모를 보면서 섣불리 감정을 표현했을 때 상대가 얼마나 상처를 입을지를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가족 내에서 한번도 부정적인 감정을 말로써 풀어내 본 경험도, 진정한 화해를 해 본 경험도 없고 어떤 관계에서 서로 감정이 상하는 일이 생겼을 때는 결국 그 관계가 끝장나버리고 마는 경험밖에 없었던 터라 내게는 관계를 맺는 게 그토록 어려웠는 지도 모르겠다.

이젠 그걸 인지하고 내 감정을 '잘'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앞으로 상담을 하면서 혹시 상담선생님과의 상호작용에서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들었을 때는 솔직하게 말해보기로, 그래서 상대방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사과도 받아보고, 또 내가 어떤 걸 오해하고 있지는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알아가보기로 했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지금보다 내 감정을 처리해내고 표현하는 데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상담을 마쳤다.


 상담선생님 앞에서 말로 표현할 때는 눈물이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선생님이 더 울어서 많이 비워내야 한다고 우는 시간(?)을 주기도 하셨는데도 그냥 멀뚱멀뚱 앉아있었는데 이렇게 글로 쓰니 과거의 기억이 더 선명하게 떠올라 글을 쓰다 말고 엉엉 울기도 한다. 물론 혼자 있어서 그런 게 더 자연스러웠을 지도 모른다. 눈물을 그치고나서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의 아픈 기억을 들춰내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현재의 내가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는 게 지금은 그렇게 크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님을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면서 살았다는 것도, 온 몸에 멍이 들 만큼 맞고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가야만 했다는 것도, 부모님이라는 권위적인 벽 앞에서 내 감정들은 쓰레기처럼 보잘것 없는 취급을 당했던 것도, 이제는 내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도 있겠지만 경제적 독립과 함께 이젠 정말 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도 큰 몫을 하는 것 같다. 물론 어렸을 때의 기억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데 발목을 잡아 이렇게 오랜 시간 고통받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차원이라는 생각에 깊은 안도감이 든다. 부모의 불화나 분노는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으니 그때보다는 훨씬 무력감이 덜하다.

 

 20 중반까지 부모님집에 얹혀 살면서는 지금의 이런 모습을  한번도 그려낼 수가 없었다. 마흔이 넘는 나이에도 부모님한테 맞는 상상을 하기도 했으니. 그런데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더라. 마냥 만족스럽고 행복한 날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은 내가 컨트롤   있는 자율적인 , 그것을 갖게 되는 날이 이렇게 왔다. 조금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만 그때는  가혹한 시간들을 속이 물러터지도록 견뎌내는  내가   있는 최선이었으니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혹시 나처럼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어린 학생들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빠른 시간 내에 자율을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게 안되더라도 어느 순간이 되면 내 삶은 어느덧 부모님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것이 되는 날이 오게 마련이니 항상 머릿속으로 그런 삶을 그려보라고도 말해주고 싶다.


 아, 잘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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