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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m May 23. 2021

경기도여자기술학원 화재사건

사회에 대한 태도 EP.101995.08.21

1995년 8월 21일, 새벽 2시 6분. 경기여자기술학원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출구와 비상구에는 특수 자물쇠가 채워져있던 상태로 37명이 질식하여 사망하였고, 1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의 사망자와 부상자 대부분은 10대 소녀들이었으며, 소녀의 부모, 가족들은 경기여자기술학원은 물론 전국의 직업기술학원과 격리 수용시설에 대한 실태조사를 촉구하였습니다. 강화유리로 만든 현관문, 현관문에 달린 특수 자물쇠, 굵은 쇠창살 창문, 고장난 화재 감지기 등 화재를 대형참사로 이어지게 한 건물 구조적인 문제가 밝혀지며,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던 미성년자들에 대한 격리수용 처우가 이슈화된 것입니다.



경기도는 1995년 7월 3일에 이 시설에 대한 안전점검을 실시하였고, 소화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소화기 사용법은 교육되지 않았으며 사고 5일전부터는 화재 주경보등이 꺼졌으나 이에 대한 그 어떤 시정조치도 없었습니다. 사고 이전 해 1월에도 기술학원측에 불만을 품은 원생 2명이 불을 지르고 탈출하는 사건이 있었는데도 전혀 소방대책을 세우지 않아 발생한 대형 인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학원은 지난 62년 개원이래 모두 4천9백85명의 수료생을 배출했습니다. 하지만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은 전체의 20%에 불과한 1천18명에 불과, 시설의 실질적인 교육효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 배경


1995년은 제14대 대통령인 김영삼 대통령 정부의 집권기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정부는 문민정부라는 4 글자로 불렸습니다. 문민정부는 일반 국민에 의한 정부라는 뜻으로, 그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32년간의 군부 정권의 집권이 끝이나고 민간인에 의해 선출된 정부라는 강력한 정치적 상징입니다.  


1987년 6월 항쟁, 6·29민주화 선언을 토대로 도입된 직선제 이후 처음으로 군부독재세력이 아닌 정권이 들어섭니다. 문민정부. 김영삼 정권의 등장은 군부독재 세력의 직접 집권이 끝났음을 뜻했지만, 또한 기존 체제와 단절된 민주화의 길은 닫혔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이 나라에서는 구 지배 블록의 기득권의 안전을 보장하는 민주화만이 가능함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문민 정부라는 이름 아래에서, 대통령 취임 후 김영삼은 상호 갈등적이고 모순적인 정치적-정책적 목표를 추구하였습니다. 김영삼은 군부정권 실력자들의 지원과 경상도민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한편, 군사 정권의 유산을 제거하고 지역적 대립을 완화하려는 미션을 수행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영삼의 개혁정치는 지지세력 내부 분열과 대구경북지역에서의 지지 감소라는 결과만을 낳았습니다. 지지세력이 축소됨에 따라 김영삼은 소규모의 부산ㆍ경남출신세력에게 더욱 의존하였고, 정책은 일시적이고, 인기영합적인 측면을 띄었습니다. 이후 아들인 김현철의 국정 개입과 부패스캔달, IMF라는 국가부도상태를 초래하게됩니다.


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꾸준히 전진해왔다는 해석은 신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군부독재의 잔재는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해석하는 시기 이후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습니다.



사회적 배경


 경기여자기술학원은 1995년 당시 전국에 2개뿐이었던 윤락여성 기술 교육시설이었습니다. 1962년 서울 중랑구 상봉동의 국립 부녀보호소를 경기도가 인수하여 도립 부녀보호소로 운영해오다 66년 9월 이름을 경기여자기술학원으로 개칭하였습니다. 1983년부터는 사회복지법인 대한 예수교장로회 자선사업재단에 운영을 위탁하였습니다. 1992년에는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에 경기도 예산 26억원을 들여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을 건축하여 확장이전하였습니다. 


 설립 시점인 1960년대에는 윤락여성들을 감호하고 과거 생활을 청산할 수 있는 경제적 자립이 건물 설립의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이 당시에도 교화를 목적으로 한 구타 및 엄격한 군대식 생활이 유지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부녀보호소는 이후 90년대로 접어들면서 직업교육을 강조하는 공공기술학원으로 변모하였고, 교육생의 구성비중 역시 변화해 기술을 배우려는 저소득 미성년자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학원 내부의 교육방식은 여전히 교화를 위한 구타와 감금이 공공연히 허용되었고, 외부와는 철처히 차단된 생활방식이 유지되었습니다. 엄격한 군대식 기숙사 생활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은 '불이 나면 문을 열어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을 지르고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학원 측이 원생들의 잦은 탈출을 막기 위해 설치한 철창과 당직 직원들의 늦장 대처,청경이 열쇠를 갖고 있지 않는등 소방훈련이 안된 상태에서 방화사건이 발생하는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화재로 인한 피해가 확대되었습니다.  



 화재 당시 137명의 기숙학원 여성 중 윤락여성의 수는 10명 미만으로 집계되었으며, 21세 이상의 원생이 7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미성년자가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구타 등 비인간적인 대우문제로 원생들과의 마찰이 계속 되어온 것이 취재과정에서 밝혀졌습니다.



원인


기술학원의 원생들은 10개월 전 기간 중 모두 엄격한 합숙 생활을하며 외출이나 전화사용을 할 수 없는'통제된 생활'을 해야했습니다. 오후 7시 하루 일과가 끝나면 기숙사의 출입문을 모두 잠그는 등 70년대 교도행정 차원에서 만들어졌던 기숙사생활 프로그램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X세대 비행소녀들을 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한 기능과는 동떨어진 관리를 지속해온 것이 참사의 가장 큰 원인으로 당시 전문가들은 지목되었습니다.



구성원


경기여자기술학원에 수용된 인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80년대는 윤락여성을 적발하고 생활관으로 인원을 통합한 뒤, 재사회화 교육을 통해 사회에 재적응시키려는 시도가 강했습니다. 이곳 역시 8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주로 경찰및 행정당국에 의해 적발된 윤락여성들이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는 학교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한채무단가출및 비행을 일삼는 10대 소녀들이 부모들의 요청에 따라입교하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문제소녀들의 사회훈련 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어 운영되고 있다. 이에 따라 입소대상도 '윤락여성 또는 윤락행위 우려가 있는 여성', '가출이나 무의탁여성으로 기술을배우고자 하는 여성', '성폭력 피해여성', '저소득 여성으로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여성'으로 바뀌었다.


화재 당시 이곳에서 교육받고 있는 1백 38명의 원생 중 윤락행위 등으로 인해 들어온 원생은 약 8%인 10명 내외에 불과했습니다.



사망원인과 사망자


1층에 있던 원생 70여명은 다행히 1층 현관문을 밖에서 열어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기숙사 2층에 쇠창살을 설치하는 등 비윤리적인 감금구조 문제를 갖고 있던 건물 때문에 이번 사고는 대형 참사로 이어졌습니다. 건물구조적인 문제라 함은 강화유리로 만든 현관문, 현관문에 달린 특수 자물쇠, 굵은 쇠창살 창문, 고장난 화재 감지기 등을 말합니다. 이후 조사에서 경찰은 홍종찬 사무장 등 학원 관계자 9명을 소환해 조사하였고, 화재경보 스위치가 작동하지 않았으며 통로에 설치된 철재 차단장치 등이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주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수원아주대학병원(9명)▲高해진(14)▲金영미(16)▲洪지연(16)▲朴미자(17)▲姜선화(17)▲李영진(13)▲李장경(18)▲李정하(16)▲이연주(14) ◇수원동수원병원(9명)▲李경아(17)▲徐경화(16)▲禹정덕(15)▲權미성(16)▲金미란(16)▲黃수정(13)▲崔명숙(15)▲신미희(14)▲朴지예(15) ◇수원성빈센트병원(3명)▲裵정희(17)▲金지은(16)▲柳진(14) ◇수원의료원(9명)▲李성아(17)▲閔혜경(16)▲權선임(18)▲梁승실(16)▲金희재(16)▲裵지혜(19)▲李정숙(18)▲尹여경(20)▲이혜미(13) ◇오산도인병원(5명)▲史은혜(16)▲이경림(32)▲鄭선아(17)▲성현숙(16)▲崔정은(15) ◇용인세브란스병원(2명)▲金효숙(17)▲李자옥(16)



대응과 보상


 당시 화재로 발생한 53명의 사상자에 대한 보상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경기도와 위탁운영자인 재단 간에는 큰 신경전이 있었습니다. 위수탁약정서에는 재산상의 손해배상에 대한 명시만이 있을 뿐, 불의의 사고로 인한 사상자에 대한 보상 규정은 명시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기도는 사고대책 본부장인 이인제(李仁濟)경기지사가 밝힌 "사망자 1인당 4백만원의 장례비 지급"방침 외에는 '보상의 전적인 책임은 수탁자인 자선사업재단에 있다'는 입장이었으나 유가족 대표와의 보상협의에서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사고 2일 뒤, 있었던 경기도와 유가족 대표들 간에 있었던 보상협의에서는 부상자 입원치료비 전액을 경기도에서 부담하고 사망자에 대한 특별 위로금은 성수대교 사고 등의 사례를 참고로 액수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한편 경찰은 사고 당일 숙직근무를 했던 직원 전상주씨에 대해 신속한 구조를 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과실치사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1년 전, 강제수용처분 취소청구소송


 1994년 3월, 경기도여자기술학원에 수용된 스물한 살 백아무개양이 경기도를 상대로 강제수용처분 취소청구소송을 냈습니다. 소장에서 '기술학원에 사람을 강제수용하고 있는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경기도 여자 기술학원은 '잘못된 가치관을 교정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입소시 보호자의 동의를 받고 있다'라고 소송 과정에서 반박을 하였습니다. 백양은 이 소송 후, 퇴소하였습니다. 1년 5개월이 지난 1995년 8 월, 이 시설에서는 화재가 발생합니다. 



당시 뉴스

https://imnews.imbc.com/replay/1995/nwdesk/article/1958449_30705.html

https://imnews.imbc.com/replay/1995/nwdesk/article/1958609_30705.html



참고자료 

문민정부·국민의 정부 왜 이렇게 부르지?

윤락여성에게 기술교육 알선

용인 화재 희생자, 못 구했나 안 구했나?

<비보호 좌회전>, 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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