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후련한 이별
아침 6시. 시계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거실에 나가자, 텔레비전에 스트레칭 디비디가 플레이 버튼만 누르게 세팅되어 있고, 바닥에는 요가매트까지 깔려있었다. 모두 엄마가 준비해주신 것이다.
나는 영상을 보며 30분간 스트레칭을 하고, 샤워를 하고, 엄마가 준비해준 선식과 과일을 먹고 집을 나왔다.
평소에는 지하철을 타지만, 오늘은 왠지 조용히 있고 싶어서 택시를 타고 학원에 갔다. 택시 기사님께 라디오를 꺼달라고 부탁하고, 오늘 공부 스케줄을 확인한 후, 위밍업 삼아, 영어 단어를 암기했다. 학원 강의실엔 이미 중간까지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사실 인터넷 강의로 들어도 되지만, 나는 더 집중하고 싶기도 해서 직강을 선호하는 편이다.
첫 강의가 끝났다. 쉬는 시간에 공부한 내용을 되새기며 운동 삼아 꼭 화장실에 다녀온다.
두 번째 강의가 끝났다. 배가 고파, 엄마가 싸준 샌드위치 한쪽을 먹었다.
세 번째 강의가 끝났다. 이제 가방을 들고 학원 옆 독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가방을 정리하고 꼭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는다. 공부에 집중하기 위한 나만의 의식이다.
책상에 앉아, 오늘 계획을 다시 한 번 본다. 그리고 첫 계획인 오전 강의 정리를 시작한다.
2시,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며, 머리를 식힐 겸 미드 한편을 자막 없이 보았다.
3시에서 7시까지 요점정리 중심으로 공부를 했다.
7시부터 8시 30분까지 저녁밥 먹는 모임 사람들과 밥 먹으면서 시험 정보 교류 및 스트레스 해소용 수다를 떨었다.
8시 30분부터 12시까지 문제풀이 위주의 공부를 했다.
12시 정각, 독서실 직원이 엄마가 도착했음을 알려주었다.
차에서 텔레비전 예능 프로를 보듯 편하게 인터넷 강의를 재생시켰다.
집에 도착하고, 엄마가 말했다.
“민영아, 엄마는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니까 진짜 그 자체로 엄마는 매우 자랑스러워. 열심히 성실하게 노력하는 아이로 내가 잘 길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공부해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씩 웃었다.
새벽 1시. 씻고, 책상에 앉았다.
수첩을 폈다. 오늘 계획을 적은 종이를 펴고, 각 항목마다 체크를 했다. 계획을 정말 완벽하게 수행한 날이었다. 나는 달력에 커다랗게 빨간색으로 하트를 그렸다. 이번 달 달력에 무려 하트가 10개나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이번 달 마지막 날에는 하루 쉬고 목욕탕을 갈 수 있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내일을 위해 가방을 싸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저녁에 뭐 먹을까. 학원 앞에 새로 생긴 분식집에 갈까, 아니면 뜨끈한 부대찌개를 먹을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나는 잠이 들었다.
또다시 아침 6시, 알람이 울렸다.
나는 알람을 껐다. 어제처럼 스트레칭, 샤워, 엄마가 챙겨준 아침을 먹고, 도시락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1층입니다”라고 말하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던 나는 순간 흠칫 놀랐다. 어린 커플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뽀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문 앞을 가로막은 커플들에게 헛기침을 해줬다. 그러나 그 애들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괜히 혼자 쭈뼛거리며 부딪히지 않게 그들을 피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다.
‘쯧쯧, 아침부터 저게 뭐하는 거야. 저렇게 공부 안 하고 연애질이나 하는 거 부모님이 아실런지 원......’
그리고 또 생각했다.
‘아... 나도 솔로 된지 한 달도 안되었구나. 하아... 나도 커플이었네. 진작에 정리하고 더 공부했으면, 삼수까진 안 했을지도 모르겠네.’
나는 오늘은 사람들 구경 좀 하고 싶은 마음에 지하철을 타고 학원에 가기로 결심하고, 전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가을이 끝나가고 있었다. 추워진 기온 때문인지, 가게마다 진열해놓은 빼빼로 때문인지, 괜히 마음이 헛헛해서 공부에 집중이 어려웠다. 나는 일찌감치 공부를 마무리하고,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마시며 엄마가 픽업하러 데리러 와주기를 기다렸다.
엄마 앞에서는 오늘 공부 안 한 것을 숨기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듯, 차에서 인강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벌써 3년째 수험생 신분이었다. 푸석해진 피부만큼이나, 내 젊음에 곰팡이가 피는 것 같아 괜히 속상했다. 어쩔 때는 그냥 시험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기대를 무너뜨릴 자신도 없고, 회계사를 대신할 내가 하고 싶은 그럴듯한 직업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상태로 선을 보러 다니는 것은 더 자존심이 상했다.
괜히 혼자 뽀류퉁해진 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식탁에 도시락을 거칠게 놓고, 방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가방을 던지고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언니가 방으로 쫒아 들어왔다.
“야. 힘드냐?”
“아 뭐야. 머리 아프니까 나가.”
“할 말이 있어.”
“뭔데”
“민영아, 있지 나 남자가 하나 있는데......”
“그게 뭐? 언니는 원래 어장에 항상 물고기가 있었잖아.”
“헤헤헤. 그건 그래. 근데 이 남자는 좀 달라서...... 집에 데려올까 하는데.”
“엉?”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이성교제에 엄격한 아빠 때문에 우리 자매는 부모님께 남자친구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아니 부모님뿐 아니라 우리 둘 사이에도 대충 눈치로 요즘 뭐가 있구나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서로의 애인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물론 부모님도 딸들이 바보같이 데이트 한 번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식구들이 결혼과 상관없는 이성교제는 서로 알고 싶지도, 알리고 싶지도 않다는 요상한 사상에 의해 그냥저냥 우리 자매는 연애 한 번 안 해본 것으로 공개적 코스프레를 하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남자를 부모님께 소개한 다는 뜻은 바로 “결혼”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언니, 결혼할 거야?”
“으응... 그럴까 해. 히히히.”
언니가 배시시 웃었다.
“와. 대박. 어떤 사람인데?”
“두 달 전에 이모가 소개해준 사람이야. 나이차가 좀 있어서 주저했는데. 몇 번 만나니까 뭐... 마음이 좀 움직이네. 그이가 나이가 있으니까 바로 결혼하자고 강력하게 말하고, 나도 뭐... 어차피 결혼 빨리 하고 싶었고... 뭐 그래서 조만간 서로 집에 인사부터 가기로 했거든. 그냥 뭐 그래서 일단 너한테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헤헤헤.”
“헐... 언니가 결혼... 남자.... 우와. 나는 언니 남친 있는 것도 몰랐는데. 대박이다.”
그때 엄마가 과일을 들고 내방으로 들어왔다.
“둘이 뭐해? 과일 먹으란 소리도 못 듣고? 무슨 이야기 하니?”
“엄마, 언니가 남자친구 데려온데.”
언니 얼굴이 빨개졌다. 엄마가 깜짝 놀란 듯 쟁반이 흔들렸다. 나는 얼른 과일 쟁반을 받아 내 책상에 올려놨다. 엄마가 언니 얼굴을 빤히 보더니, 책상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 혹시 마지막 선 본 남자?”
“네.”
언니가 당황해하며 평소에 쓰지 않던 존댓말로 대답했다.
“이모가 소개해 준 안과 의사.”
“그래? 그랬구나. 어쩐지 니가 그때부터 선을 안 본다고 했지...... 근데 저번에 박 여사가 해준 성형외과 의사가 좋다고 하지 않았어?”
“그 사람은 처음에는 잘 생겨서 좋았는데. 말을 할수록 좀 별루라서요. 만나자마자 병원 개원이 어쩌고 대출이 어쩌고 하는데. 뭔 말인지도 모르겠고, 쫌 이상했어. 우리 집이 무슨 재벌도 아닌데 너무 많이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근데 이 분은 그냥 평범해. 의사라고 잘난 척하지도 않고. 나한테 잘해주고. 같이 떡볶이도 먹고, 쭈쭈바도 편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집안은 좀 우리랑은 다른 것 같은데 뭐 우리도 평범한 집안이니까 크게 문제 될 것 같지는 않아요. 근데 나이가 좀 많아서 결혼하자고 졸라서요. 나도 어차피 벌써 20대 후반이니까 그러자고 했어요. 조만간 서로 집에 인사 가자고 했어요. 아이, 원래 내일 아침에 말하려고 했는데 그냥 말해버렸네 호호.”
“그래, 그래. 집안이야 뭐... 사람이 중요하지. 사람은 참 순진하고 반듯하다고는 하던데. 나이가 몇이지?”
“나보다 8살 많아요. 그리고 음... 살짝 이마가 넓어. 그래서 막 동안은 아니야. 근데 인상이 좋아요. 브루스 윌리스, 숀 코넬리 같아. 그리고 똑똑하고.”
“대머리? 언니 미쳤어? 아들 낳으면 어쩌려고?”
“얘는, 형부 될 사람한테 말조심해. 어린애는 빠져. 그까짓 것 같고 유난 떨지 말고, 민주, 너만 좋다면야. 우리야 다 좋지. 일단 아빠한테 전화를 해야겠다.”
엄마는 뭔가 당황해하는 듯 서둘러 방을 나갔다. 언니도 엄마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나는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언니도 벌써 28살이고, 결혼하기에 좋은 나이이니 축하해줄 일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정말 묘~했다. 신기하기도 했다. 결혼이라니......
거의 매일 새벽 늦게 퇴근하시는 아빠가 엄마 전화를 받고는 금방 집으로 달려오셨다. 온 가족이 모처럼 와인을 마시며 언니의 결혼 상대자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언니, 완전 축하해.”
“홍홍 고마워.”
“근데 뭐 보고 결혼할 생각이 생겼어? 그것도 두 달 만에?”
“모르겠어. 그냥 뭐, 결혼 안 할 이유도 없잖아? 좋아하는데. 서로 좋아하는 마음 확인했으니까 시간 끌지 말고 결혼하는 거지.”
“그래, 그래. 큰애 말이 맞다. 민영이 네가 잘 모르겠지만. 원래 결혼은 그렇게 하는 거야. 이것저것 더 알아보고 결혼하려면 결국 암 것도 안되고 헤어지는 법이야. 결혼 빨리 해라. 잘 결정했어. 일단 사람 보고 판단해야겠지만, 니가 데려오는 사람이니 문제 있겠니. 게다가 처형이 소개해준 사람이니 믿을 만하겠지.”
아빠는 평소보다 길게 말씀하시며, 또 와인을 원샷하셨다. 엄마는 계속 부엌을 오가며 뭔가 먹을 것을 가져오셨고, 아빠는 계속 술을 원샷하셨다. 언니는 두 볼이 빨개진 채 언니 답지 않게 조신한 표정을 지으며 아빠에게 술을 계속 따랐다.
와인 두 병을 다 비우고서야, 온 가족이 각자 자기 방으로 갔다.
나도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문득 ‘하긴 나도 얼마 전까지 결혼하려고 계획까지 세웠었는데, 계획대로라면 지금 언니가 아니라 내가 오늘의 주인공이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현욱 오빠와 헤어진 후, 처음으로 오빠가 궁금해졌다. 나는 페이스북으로 들어가서 현욱 오빠를 검색해서 찾아냈다. 현욱 오빠의 페이스북의 상태 메시지는 두 달 전에 작성된 것이었다.
[이번 여름 나는 살기 위해 애썼다. 가을이 왔다. 다행이다.]
그가 마음속으로 날 정리한 후, 이 글을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메시지를 한 참 보았다. 오빠가 생각보다 오래 힘들어했던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괜히 미안해졌다. 그리고 궁금했다.
정말, 정말로, 이제는 오빠가 날 잊었을까? 그리고 오빠는 왜 그 날 나를 더 잡지 않았을까?
그 날, 현욱 오빠가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내가 오빠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잠수를 타면서도 언젠가는 오빠가 집으로 찾아올 줄 알았다. 오빠라면 얼굴을 보기 전에는 이별을 인정하지 못할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사실은 오빠를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할지 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했었다. 오빠가 어떤 모습으로, 언제 나타나, 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에 다양한 상황을 가정하면서 시뮬레이션해야 했다.
나의 계획은, 오빠가 무슨 짓을 해도 당황해하거나 반응하지 않을 것, 냉정하게 굴 것, 최대한 모르는 사람인 양 그냥 지나갈 것 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빠가 만약 감정적으로 굴면서, 소란을 피우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늦은 밤, 집 앞으로 찾아온 오빠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냥 정리하기 위해, 멀리서 한 번 마지막으로 보러 온 사람 같았다. 그렇게 덤덤하게 나를 뚫어져라 볼 뿐이었다. 나 역시 피할 이유가 없기에 똑바로 그를 보며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갑자기 그가 내 팔에 살짝 손을 얹었을 때 사실 엄청 놀랐었다.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순간 걸음을 멈출 뻔 했었다.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계획대로 그 손을 부드럽게 떼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집에 올 수 있었다. 사실 엘리베이터에 타기 직전까지, 혹시 현욱 오빠가 뒤돌아 달려오면 어쩌지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있었지만,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보이는 현욱 오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다행이었는데, 근데 어쩌면 너무 싱겁게 끝나서 조금 실망했던 것도 같다.
[이번 여름 나는 살기 위해 애썼다. 가을이 왔다. 다행이다.]
그의 상태 메시지와 함께 업데이트된 정보들을 대강 훑어보았다. 대충 과외하면서 사는 것 같았다.
예전 계획대로 내가 회계사가 되어, 아직 학생이거나 취업 준비하고 있는 그를 집에 데려왔다면 하는 생각을 해봤다. 부모님은 반대하지는 않으셨겠지만, 적어도 오늘처럼 부모님이 들뜬 표정을 짓지는 않으셨을 것 같다.
‘내가 참 어렸구나, 그리고 참 순수했구만.’
나는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언니가 결혼을 한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이나, 신경 써야 할 것들은 없다.
괜히 언니 축하해준답시고 당장 오늘도 너무 늦게 자서, 내일 공부에 지장이 생겼다. 어쩌면 이번 주말, 한 달 동안이나 벼르던 목욕도 못 가고 일요일 내내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