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시 돌아온 일상 속에서

by mindful yj

퇴사일지까지 써가며 야심 차게 퇴사 이후의 삶을 꿈꾸었지만 나는 퇴사를 하지 못했다. 결국 다시 일하던 회사로 돌아와 착실히 비행하며 아이들을 돌보며 여전히 극한직업 워킹맘으로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달리고, 요가하고 책을 읽으며 그렇게 삶의 무게에 매몰되지 않고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무엇을 진정으로 좋아하는가, 무엇이 진정한 행복일까 하는 고민은 놓지 않고 있다. 아이에게도 가끔 장난처럼 하는 말이지만 정신 차리고 살려고 한다. 나를 놓치고 사회가 정해놓은 노선으로 자율주행처럼 살지 않기 위해, 진짜 내 삶을 살기 위해 여전히 회사생활이라는 사회인으로서의 역할도 부지런히 완수하면서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놓치지 않고 정신 차리고 살기 위해 노력한다.


회사생활을 꾸준히 하는 것이 결코 정체되어 있고 도태되는 것이 아님을, 퇴사를 하고 나만의 일을 찾는 것이 꼭 성공으로 가는 길이 아님을 이제 안다. 그러한 프레임 역시 사회가 만들어놓은 것이기에 더 정확히는 내가 사실이라고 믿었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였을 뿐이다. 사람마다 다양한 삶의 모습이 존재하기에, 누군가는 회사에 충성하며 임원이 되길 꿈꾸고, 누군가는 회사를 박차고 나와 나만의 사업을 일구고, 누군가는 회사와 가정의 밸런스를 지키며 살아내기도 한다.


다양한 삶의 모습 중에서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면 그것이 바로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 그 모습이 나에게는 일과 가정과 나의 밸런스를 맞추며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였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부와 명예를 바라지 않고 그저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주는 가족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운동과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과 신체가 주어지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거기에 더해 하나만 더하고 싶었는데 바로 쓰고 싶다는 욕망이 늘 있었다. 많이 읽다 보면 자연스레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람들에게 나를 드러내고 주목받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동시에 한다. 읽히지 않는 글을 쓰고 싶은 걸까 아니면 주목받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거짓인 걸까. 한때 블로그를 열심히 했을 때 내 글이 네이버 블로그 메인에도 올라가며 애드포스트로 수익도 생기고 책을 보내줄 테니 서평을 해달라는 제안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 글에 악플이 달리기도 하고 누군가 내 글을 도용해서 신고를 한 적도 있다.


항상 좋은 일만 생길 수는 없다는 것, 모든 일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함께 오고, 그 좋고 나쁨이라는 판단도 결국은 내가 그 일을 그렇게 해석한 결과라는 것을, 아직은 내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에 그릇이 부족하기에 블로그도 닫고 쓰는 것을 멈추었다.


그럼에도 사람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비이성적인, 비효율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이기에, 결국에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야 한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특정한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혹은 누군가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역사가 개인의 자유 확대라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귀찮아서 글을 쓰지 않는 것도 나의 자유이고.


최근 최태성 선생님의 책을 읽고 있는데 역사라는 과목을 정말 싫어했던 내가 <역사의 쓸모>를 시작으로 <최소한의 한국사>, 연이어 <다시, 역사의 쓸모>를 연달아 읽으며 이러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태성 선생님 말고도 최근 김주환 교수님의 벽돌책 <내면소통>을 완독 하며 김주환 교수님의 유튜브 강의도 섭렵하고 있는데 결국 모든 진리는 통한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한국에서는 어제 첫눈이 내렸지만 오늘 폭염경보가 뜬 시드니의 한 공원에서, 여전히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엄마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고 성실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곳의 바람과 햇살을 느끼며 지금 아이들이 있는 한국이 아닌 나의 몸이 있는 시드니에 (나의 의식도) 함께 있기. 지금 여기서 평온하기. 평온하기 위해 노오력 하는 것이 아니라 평온 그 자체기 되기.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요가하듯 명상하듯 달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