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영화 1960.3.
정론적 빠포스와 예술적 형상
예술 영화 《단결의 노래》에 대하여
한도수
당의 정확한 문예 정책을 받들고 비약적인 발전의 길에 들어선 우리 나라 영화 예술은 비단 그의 량적 및 예술적 형상의 질에 있어서만 아니라 다양하고 풍만한 소재 세계와 주제의 개척으로써 자기의 전투적인 역할을 제고하고 있다.
풍요한 소재 세계의 개척과 다양한 주제의 탐구가 영화 예술의 전반적 발전에 피루적인 것처럼 새로운 주제와 생활의 개척 또한 우리의 영화 예술 발전을 위해 반가운 기여가 아닐 수 없다.
우선 이러한 의미에서 최근 우리의 화면에 처음으로 1930년대, 항일 무장 투쟁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서 급격히 앙양되던 당시 국내 로동 운동의 력사적 화폭을 재현한 영화 《단결의 노래》(씨나리오 리북명, 연출 윤룡규)는 의의 있는 작품이다.
더욱이 1930년대 일제의 식민지 파쑈 통치 하에서 사회적 및 민족적 해방을 위한 정의로운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당시 로동 운동의 력사를 진실하게 사실주의적으로 보여준다는 그 사실 자체가 오늘 사회주의 건설 도상에 있는 우리 인민들을 무한히 고무하며 그들의 공산주의 교양을 위해 귀중한 정신적 자양으로 된다는 것을 고려할 때, 특히 이 작품이 그러한 자기의 사명을 예술적으로 성과 있게 해결하고 있음을 인정할 때 영화 《단결의 노래》는 더욱 가치 있는 작품이다.
씨나리오 작가와 연출가는 자기의 창작 앞에 일제 식민지 통치와 자본주의적 착취의 억압 속에서 조선 인민이 민족적 및 사회적 해방을 쟁취하고 참다운 삶을 찾는 것은 오직 근로자들이 단결하여 결정적인 투쟁에로 나아가는 길 뿐이라는 폭 넓은 사회적 문제성을 제기하고 있다.
맑스는 일찍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첫 강령적 문헌인 《공산당 선언》에서 《만국의 로동자들은 단결하라!》고 호소하였다.
근로자들의 단결과 투쟁에 관한 이 력사적인 명제와 사상, 정론적인 문제성을 주제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자기의 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어떠한 예술적 형상에 의거하였는가?
이를 분석하기 전에 필자는 먼저 하나의 연구적 과제를 설정하려 하는바 그것은 정론적 과제를 실현하는 작품들에 있어서의 예술적 형상의 수법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실지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의 설정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필자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정론적 과제를 실현하는 작품이라고 하여 그 어떤 특수한 형상적 형식, 수법을 요구하거나 예술의 일반적 법칙을 떠난 다른 법칙의 적용을 용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구태여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가? 그것은 지난 시기에 우리들이 보아 온 정론적 작품들이 많은 경우에 예술적 형상의 일반적 요구를 등한히 하면서도 이를 작품의 정론적 과제로 인한 불가피한 현상인 듯이 생각하는 편향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 수 있는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강한 정론성이나 정론적 빠포스가 그것을 용허하는가?
영화 《단결의 노래》의 예술적 형상 수법에 대한 분석은 이에 명료한 답변을 줄 것이다.
영화의 슈제트를 구성한 기본 내용은 평범한 한 보통 로동자인 문길이의 성격 발전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직 계급적 의식과 혁명적 자각에 눈 뜨지 못한 채 다만 《일을 많이 해야 락이 온다》는 협애한 신조를 지키면서 살고 있던 그가 어떻게 하여 이 낡은 관념의 허위적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자기의 진정한 행복과 삶을 위한 길이 오직 착취자들을 반대하여 결정적인 투쟁에로 나아가는 길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혁명적 투쟁 대렬에 참가하는가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주인공의 설정과 그의 성격 발전의 기본 그리고 슈제트의 기본 내용은 이러하다.
따라서 예술적 형상의 초점은 주인공 문길이의 성격 발전을 계기지어 주며 그의 운명이 구현하는 철학적 결론을 해명하는 데로 돌려 졌으며, 영화 구성의 전 체계는 이를 위해 조직되고 복종되여 있다.
간단히 한 두 개의 례를 들어 보자.
첫 화면에서 영화는 공장장의 대사를 통하여 앞으로 로동자들에게 4시간의 작업이 더 강요될 것이며 이른바 로력의 효과적 리용을 위한 《정기 신체 검사》가 실시될 것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제시는 결코 당시 지배자들의 착취상을 보여주거나 로동자들이 당하는 일반적인 비극적 운명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주인공 문길에게 부닥칠 운명적인 사건의 제시였으며 실지로 이 사건은 가장 비극적으로 문길에게 타격을 준다.
또한 이 영화에서 순필의 운명에 관한 드라마의 전개는 인상에 있어서나 분량에 있어서나 창작자들의 로력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적인 사건의 전개는 오직 문길의 성격 발전의 계기를 지어주기 위한 필수적인 복선으로서만 리용되고 있다.
철식, 용수 등 선진적인 로동자들의 조직인 친목회 회원들의 활동과 성격의 묘사도 역시 그러하며 겨비계의 끄나풀인 《생쥐》의 설정과 활동도 역시 그러하다.
실지에 있어서 그러할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극적 구성의 요소들은 그렇게 되지 않고는 자기의 예술적 의의를 상실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디테일이나 장면의 설정과 처리에 있어서도 작가와 연출가는 이 의의를 문길의 성격 발전과 그 운명의 해결을 보여 주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인정하였으며 이를 정확히 처리하였다.
때문에 영화에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장면들이 조성되였던 것이다.
우선 우리는 문길의 가난한 살림살이가 둥지를 틀고 있는 산’등성이의 언덕’길을 잊을 수 없다. 이 언덕’길은 영화에서 여러번 나온다. 몇 푼 안되는 로임을 타 쥐고 빚쟁이들의 눈을 피하여 무사히 빠져 나온 안도와 희망으로 가냘픈 미소를 띠고 올라 가는 문길, 순필이가 죽은 날 밤 북바치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달려 나와 몸부림치며 쓰러지는 문길,
신체 검사의 결과 공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버림 받은 신세가 되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문길, 《생쥐》를 때려 눞이고 밖으로 나갔다가 경찰에게 추격 당하는 철식을 발견하고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뛰여 내려 가는 문길, 투쟁하는 로동자들의 시위 대렬에 참가한 문길을 고무하기 위하여 몰려 내려 오는 그의 가족들과 죽은 순필의 로모 – 이 모든 문길의 생활은 이 언덕’길에 그림자를 남긴다. 이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언덕’길을 연출가는 문길의 운명을 보여주는 《운명의 언덕》으로 효과 있게 처리하였다.
또한 순필의 로모가 아들의 혼약을 하고 돌아 오면서 《하늘이 무심치 않구나! 이제는 며느리’감도 생겼으니 날래 성례를 치르구 손자도 봐야 할까부다》하는 독백 장면을 순필의 죽음 직전에 제시함으로써 문길의 협소하고 어리석은 생활관의 파산적 운명을 간접적으로 보충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문길이가 해고 당하여 집으로 돌아 오는 길 앞에 백발의 로파, 순필의 로모를 마주 세워 놓았는가도 명백하다.
문길의 집 담벽에 붙은 《일을 많이 해야 락이 온다》는 《좌우명》도 그의 성격 발전의 묘사ᅟ글ㄹ 위해 극히 효과적인 것이였다.
한 마디로 말하여 이 영화의 전 구성 체계와 예술적 형상 수단이 문길의 성격 발전의 드라마를 위해 전’적으로 복종되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명료하다.
대체 이토록 영화의 창작자들이 심혈을 기울인 예술적 형상의 초과제인 문길의 성격 발전과 그의 운명의 해결이 구현하는 생활적 결론은 무엇인가? 《일을 많이 해야 락이 온다》가 아니라 《착취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해야 락이 온다》이다.
문길의 개인적 드라마를 통하여 구현된 이 생활적 결론은 그가 마지막에 시위하는 로동자들의 대렬 속에 뛰여 들므로써 전체 로동자들의 계급적 사상으로, 사회적 문제성으로 예술적 형상을 통하여 승화되였다.
이로써 우리는 문길이라는 평범한 한 로동자의 개인적 운명의 드라마가 훌륭하게 작품의 사상-주제적 과제인 사회적 및 정론적 문제성을 해결하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사실에 있어서 정론적 과제를 실현하는 예술적 형상의 수법이란 별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강력한 정론적 빠포스는 높은 예술적 형상의 안받침 없이는 불가능한다.
실로 자기의 정론적 과제를 강한 빠포스로써 해결하고 있는 영화 《단결의 노래》의 성과 여부는 주인공의 성격 발전의 드라마를 해결한 예술적 형상의 성과 여부에 의존된 것이다.
이는 이 작품이 자기의 사상 – 주제적 과제를 실현함에 있어서 발로된 일부 부족점이 무엇에 기인한 것인가를 고찰할 E 더욱 뚜렷이 실증된다.
이 작품의 사상적 과제는 그 자체가 강한 혁명적 랑만성을 띠고 있으며 따라서 작품의 형상이 이를 해결할 것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이에 반하여 우리는 영화 《단결의 노래》에서 이의 해결이 극히 불만족하게 처리되였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는바 이러한 약점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영화에서 우리는 물론 용수와 금숙이가 산’등에서 공장을 내려다 보며 미래 사회의 아름답고 행복한 생활에 대한 꿈을 속삭이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간단한 에피소드적 처리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의 해결 방도는 어디에 있었는가? 문길이가 자기의 낡은 생활 신조와 완전히 결별한 이후부터 새로운 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때까지의 그의 내면적 심리의 발전과 각성 과정을 보다 주의 깊고 침착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묘사하는데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 그가 투쟁의 길에로 몸을 던질 때까지는 복잡하고 단순치 않은 모색과 심리적 발전과 사상적 각성의 경로가 있었을 것인 바 이때에 있어서 그의 사상적 발전과 결심을 추동한 결정적 요소는 투쟁의 미래와 승리에 대한 혁명적인 락관주의였을 것이다. 이 락관주의는 위대한 쏘베트 인민의 거대한 승리와 김일성 동지가 령도하신 항일유격투쟁의 혁혁한 전과의 영향에 의하여 굳건히 담보되였을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이러한 점들을 친목회원들의 대화로써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 문제는 문길의 운명 속에서 극적으로 구현됨으로써만 원만한 해결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약점은 영화의 후반에 와서 전반적으로 전반부에 비하여 작품의 빠포스를 저하시키는 도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창작자들은 마땅히 작품의 초과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형상의 초점을 계속 문길이에게서 떼지 말아야 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친목회원들의 파업 조직을 위한 활동 부문에 관심을 두었다. 물론 이에 관심을 둔 것이 오유인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생활들이 문길의 성격 발전과 시종 긴밀하고 유기적인 극적 련계 속에서 원만히 처리되지 못한 데 약점이 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러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의 묘사도 결국은 작품의 정론적 빠포스를 높일 수 없었으며 선진적 투사들인 친목회원들의 성격도 더 높이 살리지는 못하였다.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작품의 정론적 빠포스는 등장 인물들의 보다 생동하는 초상과 보다 개성적인 성격 발전의 드라마를 통하여서만 제고될 수 있다.
영화 《단결의 노래》는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