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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글리쌤 Oct 23. 2018

동료를 의식하기 시작하다/밥그릇 전쟁

사무인간의 모험

비슷한 표정, 비슷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마주 보게 되다


오후 6시 정각, 이사무는 슬슬 주변 눈치를 살폈습니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아무도 파티션 위로 고개를 들지 않아 덩달아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난 아직 인턴 신분이니 정시 퇴근해도 되지 않을까?’ 컴퓨터 전원만 끄면 퇴근 준비는 끝나지만 차마 전원 버튼에 손이 가지를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김 대리가 물었습니다. 
     
“오늘 약속 있어?” 이사무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습니다. 
“네, 오늘 자격증 대비 컴퓨터 수업이 입니다...”, 
“이야, 자기계발에 눈을 떴나 보네.” 
“부장님 회의 끝나기 전에 일찍 들어가 봐” 회의 끝나면 어떤 일거리를 또 
던져주실지 모르니까 “ 
   
이사무는 조용히 대답 후 짐을 싸고 줄행랑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김 대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자기계발이라, 세상 참 좋아졌네, 내가 인턴일 때는 정시 퇴근은 생각도 못 했지 아마..” 
  

 
취업을 하기 위한 스펙 전쟁이 끝난 것도 잠시 직장에 들어서는 순간 승진 전쟁과 자기계발 전쟁에 돌입합니다. 영어실력이 정말 필요해서 공부하는 것인지 남들이 하기에 불안해서 따라 하는 것인지 본인도 헛갈려하죠. 전통적인 노동자들에게 ‘자기계발’의 의미는 머나먼 이야기였습니다. 이는 19세기 들어 사무원이 급증하며 소위 화이트칼라의 계급의식을 나타내는, ‘지식계급’의 상징이 됐습니다. 
 
구릿빛 피부가 아닌 하얀 피부를 가진 사무원은 등장과 동시에 전통적인 노동자의 의미에서 배제됐고 사회적인 멸시를 받았지만 증가하는 군집 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업화로 사무 일거리가 많아지며 특히 회계원의 사무실 상주는 필수가 됐습니다. 많아지는 인력 수요와 더불어 여전하게도 노동의 상징은 ‘땀’이라 외치는 거친 남정네들의 야멸찬 눈빛을 견뎌야 했습니다. 


사무원이 19세기 들어 아무리 증가했다지만 그들이 사무실의 주인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회계사, 세무사, 변호사가 사무실의 주인이 되어 인턴을 고용하고 월 마감마다 직원을 쥐어짜지만 산업화 초기 사무원은 사업가의 한편에 마련된 책상에 멀거니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을 찾아서 하기보다는 서류 작업이 주어질 때만 열심히 계산을 하고, 필사를 하고 서류더미를 만들어내고 찢기를 반복했습니다. 사무실 주인은 대부분 상업가였습니다. 요즘 강연, 집필, 코칭, 영업, 마케팅까지 혼자 해내는 1인 기업가가 유행하고 있는데 19세기 초반 상업 가도 혼자 모든 것을 해내야 했습니다. 도매상, 소매상이 되기도 하고 수출을 하며 수입을 했고 운반업까지 책임졌습니다. 



산업화의 요충지인 미국에서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겨났습니다. 업무가 분화되기 시작한 것이죠. 상업가가 혼자 하던 업무들을 따로 떼어내고 전문화 한 사무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보험 사무소, 운반 업소, 은행이 생겨났습니다. 상업가 또한 다양한 업무를 덜어내고 외주를 주며 몇몇 분야에 집중했습니다. 반복되는 업무나 허드렛일은 사무실에 남아 있던 사무원이 해나갔습니다. 지금의 영업자나 대표 직함을 가졌던 상업가들은 거래를 위해 밖으로 나돌았고 사무원들은 회계실에서 그들만의 영역을 확보했습니다. 

분업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물건을 만드는 공장이 생겨났고 ‘유통’이 활성화됐습니다. 만들고 파는 일원화 구조에서 만드는 곳 따로, 파는 곳 따로 분화가 생긴 것이죠. 판매 가게 수입 대장에 매출을 기록할 인력이 필요하게 됐습니다. 업무의 분화, 분업과 함께 자연스레 사무원의 증가가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데 섞여 있던 생산과 판매가 분리된 것이죠. 집에서 만들고 파는 가내수공업을 들여다보면 만드는 노동자와 판매하는 판매업자가 혼재해 있었습니다. 제대로 땀을 흘리는 자와 옆에서 보조하는 사람이 함께했었죠. 차츰 분업화가 진행되며 노동이 분리됐습니다.




 기존 육체노동자와 사무원으로 말이죠.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던 흐릿한 마음의 경계가 물리적인 경계로 이어진 것입니다. 공장과는 다르게 회계실이 따로 설계됐습니다. 자연스럽게 공장으로 들어가는 근로자와 사무실로 들어가는 사무원의 이동 경로도 달라졌습니다. 창문 너머로 ‘하얀 남자’가 행하는 괴이한 사무업무를 지켜보던 육체노동자의 힐끗거림도 더 이상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사무원 또한 자신의 불안정했던 지위에 조금씩 확신이 들며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 자신감의 원천 중 하나는 비교적 높은 보수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공무원의 첫 기본급이 높은 편은 아니듯 초기 사무원의 월급도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급이나 일한 양에 따라 일당을 지급받는 노동자에 비해 포괄 연봉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매력적이었습니다. 일단 일을 시작하고 어느 정도 버티고 나면 전통적인 노동자보다 안정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의식이 퍼져나갔습니다. 




지금은 일반 사무직의 위기론이 대두되는 시점이지만, 어쨌든 19세기 중반 전후로는 사무원의 ‘우월한 자기 정체성’은 점점 더 확립돼 갔습니다. 산업화 시대의 전통적인 노동 권력자들에게 사무원은 신군부 세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체 시장의 권력은 여전히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응집력에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업무 분화로 늘어나는 사무업무 속에 서서히 존재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사무원들도 고유영역을 확보해 나갔던 것입니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점차 사무 직장인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묘하게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이사무가 김대리에게 컴퓨터 학원에 간다며 줄행랑을 친 것처럼 초기 사무원에게도 ‘자기 공부’는 서서히 피어오르는 산 권력을 뒷받침할 마중물이었습니다. 전통적인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노동 후의 ‘응집력’이었습니다. 함께 땀을 흘리고 비슷한 보수를 받는 입장에서 노동이 끝난 후 군것질을 함께 하는 동지애가 싹텄죠. 이에 반해 사무원은 사무실이라는 다소 고립된 환경에 노출되며 결집보다는 동종 직원 간 ‘경쟁’의 의미를 알아갔습니다. 



사무원들의 지식 충족 욕구를 알아챈 업자들은 발 빠르게 지금의 학원과 같은 전문기관을 만들기에 바빠집니다. 고대 그리스의 필경사처럼 어떻게 하면 필사를 빠르게 것이며 셈 능력을 강화할 것인지 알려주는 전문학원이 생겨났습니다. ‘너도 영어 공부하니? 나도 해볼까?” 현대 직장인들은 불안감에 막연한 자기계발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19세기 중반 전후로는 필요에 의한, 생존을 위한 지식 충족 욕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의 조용히 일하는 사무직 직원들처럼 소리 없이 조용히,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보인, 이상한 계급층, 사무원. ‘진정한 노동은 근육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전통 근로자들의 상식에서 빗겨 난, 그들의 의식에서 여자들이 주로 할법한 노동으로 치부되던 사무업무. 공장 밖에 사무실이 지어지는 분화 현상만큼이나 대립된, 기존 노동계층과 신 노동계층의 충돌은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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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동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 <사무인간의 모험>을 쓴 

이종서 작가입니다. 이 매거진은 <사무인간의 모험, 이종서, 웨일북> 中에서 

일부 발췌해 재구성 했습니다. 현직에서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책을 통해 소통하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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