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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여행해
by 남상화 Mar 16. 2016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모로코 쉐프샤우엔 골목길에서

여행이 길어지면 가장 아쉬운 건 영화다. 모로코 쉐프샤우엔에서였다. 빵빵하게 터지는 인터넷에 접속해 서로 좋아하는 노래와 영상을 플레이한다. 호주에서 온 친구 앤드류와 함께였다. 나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좋아하는 장면을 찾아냈다.      

-깊고 깊은 바다 속 그곳이 옛날에 내가 있던 곳이야. 그곳에서 올라온 이유? 너랑 세상에서 가장 야한 짓을 하려고.
-깜깜한 바다 외로웠겠네? 
-아니 그렇게 외롭진 않았어.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다만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를 뿐.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진 못하겠지.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서 깊은 바다 속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앤드류는 자기 집에서 홈스테이 하는 외국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랐다. 한국 친구들도 있었지만 주로 일본 친구들이었단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어려서는 일본어도 곧잘 했다며 언젠가는 일본 여행을 하고 싶단다. 어쩌면 잃어버린 일본어 능력이 되살아날지 모른다고. 나는 그런 앤드류 앞에서 “꼬로꼬로 꼬로꼬로.(데굴데굴 데굴데굴)” 조제를 흉내내 본다.      


다음날 우리는 또다시 골목길을 어슬렁거린다. 이곳은 온통 파랗다. 담벼락도 계단도 대문도 모두 파랗게 칠해져 있다. 맑은 날의 하늘색 스카이블루, 어둠 직전 세상에 내려앉는 미디움블루, 빛이 반사되는 투명한 바다 아쿠아마린, 깊은 바닷속 코발트블루까지 온갖 종류의 파랑을 만난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화분 위의 꽃들이 반기고 하얀 계단 위에 졸고 있는 고양이들이 인사한다. 떼 지어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모자 달린 전통의상 젤라바를 입은 노인들이 유유히 지나간다. 동화 속을 걷는 것 같다.


메디나 서편으로 난 문을 통과하자 구시가지인 메디나를 벗어났다. 식당을 찾던 차에, 한 아이가 다가와 레스토랑을 안내해주겠단다.      


레스토랑이 아니라 가정집이었다. 담벼락 아래 다 깨진 플라스틱 테이블과 간이의자가 놓여 있다. 소년은 화려한 꽃무늬 천으로 테이블을 씌우며 씽끗 웃어 보인다. 이층 창문을 향해 누군가를 부른다. 아빠뻘로 보이는 한 사내가 내려온다. 제 일을 마친 소년은 공을 몰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남자가 와서 주문을 받는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그림을 그려가며 치킨타진 2인분을 주문했다. 이번엔 소년의 삼촌뻘 되는 자가 나타나 주문 사항을 전달받고 장을 보러 간다. 한참 뒤에 장을 봐온 삼촌은 재료를 이층으로 올려 보낸다. 소리를 듣고 이층 창문에서 소년의 할머니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민다. 


완벽하게 분업화된 패밀리 비즈니스. 어쩐지 불안하다. 그러나 주문과 동시에 시장에서 재료를 사 오고 제 식구들을 먹이는 가정집 부엌에서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이라니 걱정할 일도 아니다. 메뉴표도 가격표도 없지만 부르는 가격이 얼토당토않으면 흥정을 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나도 어느새 모로칸 스타일로 사고를 한다.     



한참을 기다렸더니 허기가 몰려온다. 나는 앤드류를 보며 내가 알고 있는 몇 개 일본어 단어로 말장난을 친다.

“하라배꼬 하라배꼬 꼬로꼬로 꼬로꼬로 (배고파 죽겠네, 데굴데굴 데굴데굴)”        

웃고 있던 앤드류가 묻는다.  

“그런데 그 영화, 왜 갑자기 생각났어? 그거 네 얘기야?” 

왜냐는 질문이 조금 당황스럽다. 미처 답하기도 전에 앤드류가 말한다. 

“그동안 여행을 마치고 돌아갔을 때의 네 기분이 그랬어? 여행이 끝나고 난 뒤 너의 삶은 그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었고 단지 바다 속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조개껍데기가 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라고 진지하게 묻는다.       


순간 얼음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여행이 끝난 뒤 밀려오는 허전함은 사랑이 끝난 뒤의 슬픔과 비슷한 통증이었다.      

엔딩의 한 장면. 조제는 아무렇지 않게 선물이라며 SM King 잡지를 건네고 츠네오는 뒤돌아 한참을 걷다 자동차 소음 속에 울음을 쏟아낸다. 


가슴 저미는 이별의 순간을 이보다 더 담담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늘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의 내 모습과 어딘지 닮아있다. 한 세계는 끝이 났는데, 또 다른 세상은 내 사정과 무관하게 계속해서 돌아간다.        



“언젠간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네,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 프랑소와즈 사강 [1년 뒤] 중에서     


나도 알고 있다. 언젠가는 이 여행도 끝이 나겠지. 우리는 현실로 돌아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갈거야. 거기엔 지나가버린 두 계절이 있을 뿐, 삶은 계속된다. 그러나 떠났다 원래 자리로 돌아온 나는 분명 그 이전과는 조금 다른 나일 것이다. 


츠네오는 SM King 잡지를 볼 때마다 조제를 떠올리듯, 나는 파란 대문을 볼 때마다 쉐프샤오엔의 한가한 골목을 떠올리겠지. 그 순간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한, 우리는 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는 한 끝이 나도 그건 끝난 게 아니다.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여행도... 


드디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재개봉. 열두 해를 보내며 영화 한 편에 너무 많은 추억을 묻었다. 

오랜만이야 조제. 잘 지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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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여행하고 순간을 기록합니다. 
터키그리스 여행책<산토리니, 주인공은 너야>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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