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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여행해
by 남상화 Mar 26. 2016

동유럽 여행해 본 적 있나요?

힙스터 아지트로 변신한 유대지구

동유럽을 여행하는 내내 영화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이 생각났다. 줄리델피와 에단호크가 하룻밤을 보낸 무대가 비엔나이고,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존재의미가 큰 줄리델피 할머니 집이 부다페스트인 것 말고도 이유는 하나 더 있다. 9년 만에 재회한 이들이 <비포선셋>에서 만나 본격 수다를 떨기 시작하면서 건넨 줄리델피의 다음과 같은 대사 때문이었다.



“동유럽에는 가본 적 있어? 나는 10대 때 폴란드 바르샤바에 갔어. 아직 공산주의 시절이었지. 물론 난 공산주의자는 아니야. 아무튼 그때 특별한 경험을 했어.


한 2주쯤 지나니까 어떤 변화가 내 안에서 느껴지더라고.  도시는 회색빛으로 우울한데 내 머릿속은 완전 선명해지는 거야.  일기도 많이 쓰고 전에 해보지 못했던 온갖 생각이 떠오르고 말이야. 그 변화의 이유를 깨닫지 못했는데 하루는 유대인 묘지를 걷다 갑자기 깨달았어. 


TV에 나오는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듣지, 쇼핑할 일도 없지, 주위에 광고 하나 없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산책하고 생각하고 글쓰기는 것뿐이었지. 그러자 소비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뇌가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정말 황홀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어.”  




광고가 없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소비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뇌가 쉬고 있는 느낌을 줄리델피는 영어로 “내추럴 하이”라고 표현했다. 그녀가 느낀 내추럴 하이를 느끼고 싶었다.     


좋은 가이드를 만났다. 프리워킹투어. 현지 청년들이 테마별로 주요 장소를 걸어서 안내해주는 투어 프로그램이다. 엄밀히 공짜는 아니다. 투어가 끝나고 소정의 팁을 줘야 한다. 마음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다. 도네이션이나 팁보다 정해진 가격이 편한 이유다. 당연한 소리지만 가이드의 지역에 대한 애정이 클수록 투어 만족도는 높아진다. 그런 면에서 폴란드 크라쿠프와 헝가리 부다페스트 프리워킹투어는 단연 으뜸이다.           


몇 차례 투어에 참가했더니 잡히는 것도 같다. 나라가 바뀌고 도시의 색깔도 바뀌었지만 반복되는 테마가 있다. 유대지구와 코뮤니즘. 이들은 암흑의 역사를 공유한다. 마크 마조위는 <암흑의 대륙>에서 20세기 동유럽을 불운한 이데올로기의 실험실이었다고 말한다. 


2013년 유대문화축제 때 그려진 이스라엘의 유명한 거리예술가 필 펠레드Pil Peled의 벽화Judah. 모노노케히메처럼 생긴 그림 속 사자의 탈을 쓴 소녀는 두려움을 극복해낸 유대인들의 생명력과 문화를 상징한다.


나치의 신질서와 인민민주주의. 그 흔적을 따라 관광객들이 순례한다. 가장 인상적인 건 한때 게토였던 유대지구의 변신이다. 오랫동안 버려진 채 방치되었던 크라쿠프 유대지구는 이제 개성 있는 펍, 레스토랑, 카페가 들어선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세계 도시 어느 곳이나 그렇듯 폐허에 생기를 불어넣고 잿빛 건물에 색깔을 입힌 건 가난한 예술가들이다.      


특히 건물 외벽을 덮은 벽화들이 눈길을 끈다. 메가폰을 잡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벨을 울리고, 무리들은 입을 반쯤 벌린 채 초점 없는 눈으로 벨을 바라보고 있다. 그 무리들 사이로 Never Follow라는 낙서가 있다. 또 다른 붉은 벽면에는 한 남자의 상반신이 있다. 얼굴 위로 사선이 그어졌다. 검열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란다.       


한때 나치즘과 전체주의로 개인의 자율성이 훼손되던 이곳에서 일방적인 선전과 검열을 주제로 한 벽화를 마주하는 일은 의미심장하다.   


좌) 사회비판적인 벽화 메시지와 비디오아트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거리예술가 블루BLU의 Ding Dong Dumb 우)Grolsch ArtBoom festival때 그려진 For God's Sake, Censorship is Everywhere이란 제목의 피카소Pikaso벽화     


쿠라쿠프에 벽화가 있다면 부다페스트의 유대지구에는 루인펍이 있다. 

루인펍은 버려진 건물에 제멋대로 만들어진 저렴한 펍을 말한다. 대표적인 루인펍 심플라Szimpla Kert 마당에는 자동차가 있고 인스턴트Instant 천장에는 동물들이 뛰어논다. 이곳 역시 2차 대전 이후 폐허였던 유대지구를 주머니 사정이 빤한 젊은이들이 놀이터 삼기 시작한 것이다. 부다페스트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의 루인펍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어느새 부다페스트 명물이 되었다.    

  

심플라에서 맥주 한잔을 놓고 독일과 호주에서 온 여행자들과 밤새 어울렸다. 제자리를 잃은 물건들 사이에서 이방인의 긴장과 경계도 사라진다. 2001년 가장 먼저 만들어진 심플라는 그 상징성 때문에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그러나 여전히 주민들을 위한 파머스 마켓이 열리고 노숙자들에게 화장실을 개방하고 노인들에게 할인을 해 주는 로컬들의 동네 술집이기도 하다.         

    


동유럽의 코뮤니즘과 유대지구 투어가 인상적이었다고 하자, 부다페스트 호스텔 스탭으로 일하는 비앙카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대별 코뮤니즘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나이가 많은 노인들은 공산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어. 무엇보다 베트남, 중국, 러시아, 동구권을 적은 비용으로 마음대로 여행하던 시절을 그리워해. 그런데 우리 엄마는 달라. 엄마는 어려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몰래 숨어 들으며 팝송을 따라 불렀대. 엄마는 문화와 취향이 통제된 공산주의 시절보다 지금의 자유를 훨씬 좋아해."             

  

서유럽에서 온 줄리델피가 광고 없는 폴란드에 매력을 느끼고 있을 때 같은 십대였을 비앙카 엄마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카세트 플레이어를 플레이하면서 서유럽 소식과 미국 팝송을 들었단다. 


농장주를 몰아내고 동물이 주인이 된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떠올린다. 암말 몰리는 각설탕과 리본을 포기할 수 없어 동물농장을 빠져나와 자발적으로 ‘행복한 노예’가 된다. 귀여운 암말 몰리. 부르주아를 상징한다고 도식처럼 말하지만 소비사회에 길들여진 우리는 모두 몰리가 아닐까.      


부다페스트에서 묵었던 호스텔 이름은 힙스터였다. 강산이 세번쯤 변할 사이, 어디에도 광고가 없던 동유럽의 도시는 이제 힙스터 아지트가 되어 있다. 


내추럴 하이는 결국 못 느꼈냐고? 아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길 위에 선 순간 언제나 내추럴 하이를 느낀다. 등 뒤의 배낭 안에 7종, 11종 화장품은 공짜로 줘도 담을 수가 없다. 옷도 구두도 백도 마찬가지다. 광고 따위 작동하지 않는 여행자만의 황홀한 세계다. 하는 일이라고는 산책하고 생각하고 끄적일 뿐. 그래도 충만함을 느낀다. 아무리 고단해도 다시 배낭을 쌀 궁리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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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그리스 여행책<산토리니, 주인공은 너야>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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