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서 모를 일
혼자가 좋다. 독서, 글쓰기, 폴댄스, 요리. 내가 취미로 하는 일들 중 사람이 필요한 일도 없거니와, 사람과 함께 활동하더라도 그것은 충전이 아닌 방전의 진행이다. 무리에 끼어있으려 노력할 때도 있었지만, 모든 일정을 누군가와 함께하는 생활은 역시 내게 맞지 않았다. 자연히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과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구축했다. 여기에 밤낮없는 연구실 생활을 거치고, 채식 지향이 4년차에 접어들며 더욱 단체활동과 멀어졌다. 회사에 들어오며 술도 육식도 하지 않는 내게 돌아올 시선을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독특한 인간으로 인식은 되겠으나 비난과 조롱 역시 '굳이' 에너지를 들이는 일이다. 간혹 있는 단체 식사 자리에서는 감사하게도 주변의 이런저런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연구원의 적당한 개인주의와 존중의 분위기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쭉, 적당한 거리로 사람을 대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일해서 친해지는 것은 괜찮지만 친구와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 입에 달고 다니는 관계의 원칙이다. 사적인 감정이 일의 이해관계와 얽혀 질척해지는 상황은 질색이다. 만일 일하며 친해졌다 해도 함께 일하는 동안은 경어를 사용하며 원리원칙에 충실한다. 매일 얼굴을 보는 사람일수록 더 신중하게 선을 지켜 대한다. 나를 감추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다른 생각이 든다. 남에게 들어가는 길에도 내가 허들을 두어야 한다. 나의 사적인 영역을 내놓는 일보다 남을 깊이 알아가는 쪽이 더 두려운 일이다. 드라마의 고독한 주인공이 '난 아무도 믿지 않아'라는 대사를 한다면, 그는 반드시 누군가를 깊이 믿고 사랑하고 다시 상처받는 스토리가 등장한다. 현실도 대개 비슷한 줄기로 흘러간다.
정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일 수록 정이 넘친다. 내가 그런 것 같다, 아마도. 냉정한 사람이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번 생은 그른 것 같다. 이런 자각이 오래되지 않았다. 나조차 이토록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타인의 일각을 보고 감히 기대를 가지게 되는지. 신기한 일이다. 정을 붙이지 않는 일은 불가능하니, 일정한 양의 정만 주고받을 수 있는 상태를 만들고자 애쓴다.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돌이켜 보니 내가 매일 만났던 사람들과는 어떻게 친해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대체로 매일 얼굴을 보는 시기가 끝나고서야 본격적으로 친목을 도모하거나, 나의 거리두기를 뚫고 들어오는 소수의 힘을 통했다. 가까워질 수록 서로에게 실망할 일이 늘어난다. 감정이 상한 상태에서 소통해야만 하는 상황은 고역인지라 최대한 피해왔다.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인간관계의 파동,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정 강한 것이었다.
강박에 가까운 일중독 성향은 늘 주변인의 걱정을 불러왔다. 가지고 있는 각양각색의 영양제 중 내 돈으로 산 것이 없다. 신경성 위염을 달고 살다보니 죽 기프티콘도 셀 수 없이 받았다. 잠 좀 자라, 밥 제때 먹어라, 커피 좀 줄이라는 잔소리는 덤이다.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걱정어린 말을 수용해본 적은 거의 없다. 잠과 끼니와 휴식을 조금 미뤄서 결과를 올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한다. 할 수 있는 일을 안할 이유가 없다. 걱정의 끝은 보통 한숨과 알겠다는 말이다.
근래 위로와 안부와 응원이 뒤섞인 말을 유독 많이 들었다.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한 적 없는데도, 회사에서 진지하게 안부를 묻는 질문을 연달아 받았다. 괜찮냐. 지쳐 보인다. 번아웃이 걱정된다. 괜찮다의 범위가 무엇인지 항상 고민한다. (무엇을 하기에) 괜찮다, 의 형태가 원래 문장이 아닌가. '일을 지속하기에' 괜찮아서 아직 괜찮다고 답했다. 하루는 내 실수로 급한 자료가 틀어졌고 수습은 상관이 했다. 터진 멘탈을 부여잡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징징거리는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으로부터-근래 연락이 뜸했던 사람들을 포함하여-묵직한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다. 어떠한 이득도 없는데 굳이.
생각보다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이 없다. 맞다. 그러나 생각보다 사람들은 남에게 쉽게 마음을 건넨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물론 나도 걱정을 한다. 위로와 응원도 건넨다. 꽤나 자주 한다! 그렇지만 의미없는 말을 솎아내고, 주제넘은 참견이 아닐지 몇 번을 누르고서야, 상대의 반응이 어떨지 고민하고서야 실행한다. 괜찮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와도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 때면 차마 괜찮냐고 묻지 못한다. 타인의 날카로운 방어에 종종 실망을 했기에 그럴 거다. 그렇다면 나에게 마음을 건네는 과정도 그들에게 쉽지 못했을까. 타인도 나의 방어가 달갑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나처럼 뚜렷한 방어기제를 만들지 않고도 쉽게 친밀해진다. 그게 신기하고 또 부러운 것 같다. 내 감정에 '-같다'를 쓰고 싶지 않지만, 나도 확신할 수 없기에 덕지덕지 여지를 깐다. 현재로서는,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대인관계에 대한 고민을 한 것이 몇 년만인지 모르겠다. 나는 나대로 살면 남을 사람은 남고 떠날 사람은 떠난다. 살다 보니 그렇게 남은 사람들만을 챙기기에도 충분히 많은 에너지가 든다. 진리에 가까운 원칙이다. 새삼 업무 관계의 사람들과 더 친해지고 싶다는 의욕이 솟았나? 굳이 그걸 바란다면 해결책은 명확하다. 차고 넘치는 '회사에서의 인간관계' 방법론 콘텐츠를 따라가면 된다. 제목만 보고도 몸서리치며 지나칠 게 뻔하다. 앞으로도 그럴 거다.
어차피 나 아닌 누군가가 될 수는 없다. 내일도 나는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점심시간의 사적인 담소를 지나칠 것이다. 그저 타인이 건네고 간 걱정과 위로가 작은 가시처럼 찝찝하게 목에 걸려있다. 진즉 적당히 삼키고 잊었어야 했는데. 적당히 붙이고 뗄 줄을 모르는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마음의 투명도를 조금만 높여봐도 이 모든것이 두려워서, 라는 근본적 원인으로 수렴한다. 이런 면에서 나는 한없이 어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