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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달리다(4)

마흔아홉, 장하리 씨

by 도란도란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 통증이 시작되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무릎이 시큰거렸다. 무릎 통증이 사라지자 발목 통증이 이어졌고 걸을 때마다 매번 찌릿했다. 발목 통증이 좀 가라앉자 정강이 통증이 새롭게 나타났다. 달리는 건 끊임없이 아픈 일이었다. 그렇게 반년이 성큼 지나갔다. 마흔아홉의 반은 분노의 질주를 했고 그로 인한 통증과 동고동락했다.


나는 그간 분노에 차서 달렸다. 화가 끓어오를 때마다 집에서 뛰쳐나왔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도록 내달렸다. 그렇게 달리고도 쓰러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분노의 질주를 하고 나면 솟구치던 화가 사라졌다. 근심도 잠시 잊었다. 내가 내달린 길 위에 모두 내려놓고 온 듯 후련했다. 나는 계속 달려야 했다.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내 속도를 찾기로 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속도로 달리는 연습을 시작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질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달리기 전에 스트레칭도 하고 달린 후에는 근육 이완도 했다. 통증은 점차 줄었고 달릴 수 있는 거리는 늘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30분을 달렸던 날은 굉장히 뿌듯했다.


나는 달리면서 화를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 생각했다. 하나의 고통이 사라지면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고통과 고통 사이에 깃든 소소한 기쁨과 행복은 보지 못했다.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사춘기의 두 아이가 내 삶의 고통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 지냈다. 두 아이가 내게 준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많은지 잊고 있었다. 아이는 자란다. 내 걱정이 무색하게 하루하루 자랐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던 현우도 자라는 중이었다. 내가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늘도 또 불을 켜고 잠들었나 하고 방문을 열었다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현우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강현우, 안 자?"


"내일 수행평가 있어. 다 외우고 잘 거야."


"공부하는 거야?"


"수행평가."


"엄마, 지금 감동받았어. 우리 현우가 공부를 하고 있다니."


"수행평가야."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감격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던 그가, 지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당연히 휴대폰을 보다가 불도 안 끄고 잠들었을 줄 알았다.


"나 바빠. 엄마는 얼른 자."


"배고프면 말해. 안 자고 거실에 있을게."


"괜찮아. 배 안 고파. 먼저 자요."


방문을 닫고 나와 기쁨을 만끽했다. 학생이 공부를 하는 것,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공부하지 않는 현우를 보며 너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며 지탄했다. 그가 공부를 하고 있다. 수행평가도 공부다. 기뻐서 밤잠을 설칠 것 같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침대에 누웠다.


아이는 자란다. 나는 달린다. 전전긍긍하며 그를 다그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마음이 건강하다면 제 갈 길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아이는 자라고 나도 자란다.





맞은편에 앉은 정이만 씨가 그림을 그리다가 손을 주무르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펜을 놓치기도 했다. 혹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정이만 씨를 걱정하는 또 다른 시선을 발견했다. 정이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시선이 자주 정이만 씨를 향한다는 걸 알았다. 정이만, 정이나 이름까지 비슷했고 보면 볼수록 둘의 눈매와 콧방울이 닮았다. 둘의 관계가 의심이 되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순임 씨와 봉수 씨는 여름 분기를 마치고 캐나다로 간다고 했다. 첫 손주를 만나러 다녀온다 했고 매우 행복해 보였다.


순임 씨가 말했다.


"겨울 분기에 다시 올게. 내 몫까지 그림 열심히 배우고 있어. 우리 또 보자고."


6개월을 매주 만나며 정이 아주 많이 들었다. 순임 씨와 봉수 씨가 내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건네준 공감이 삶에 큰 위안이 되었다. 보자는 인사를 나누었으니 다시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낙원동 주민센터 문화 교실은 12월 한 달 동안 수강생들의 작품 전시회가 있다. 정이나 선생님이 3분기 시작과 함께 안내했다.


"누구나 작품을 낼 수 있어요. 한 사람당 두 작품까지 가능하고요. 3분기는 전시회 작품을 준비하도록 할게요."


겨우 6개월을 배웠는데 전시회 작품이 가능할까 의아했는데 정이나 선생님이 용기를 주었다. 자신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면 된다고. 지금 배우고 있는 그림도 이미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혜은 씨와 나는 정이나 선생님 개인 화실에 가서 더 배우기로 했다. 문화 교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은 아쉬웠고 시간을 내어 집중해보고 싶었다.


두 작품은 무리였고 3개월 동안 풍경화 한 점을 완성하기로 했다. 풍경을 눈에 담아 그림으로 옮기려면 자세히 보아야 한다. 지겨울 정도로 보다 보면 눈을 감아도 풍경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시간은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그림을 그리다 시계를 보면 깜짝깜짝 놀랐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일이 있다는 건 큰 행운이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계속 달리며 마음이 평온해졌다.


12월 1일 낙원동 주민센터 1층에서 수강생들의 전시회가 열렸다. 나는 정이만 씨의 작품을 한참 바라보았다. 제목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리웠던 이, 그리운 이, 그리울 이들


정이만 씨의 작품 중 한 작품에 우리가 있다. 어반스케치 반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던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했다. 지나가 버렸지만 사라지진 않았다. 그림에도 내 마음에도 그 시간이 선명히 새겨졌으니까. 그림은 순간을 영원히 멈추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그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리 씨!


순임 씨와 봉수 씨가 돌아왔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어반스케치 반의 겨울 분기가 시작되었다. 자, 다시 시작이다.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마흔아홉, 장하리 씨>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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