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Simp의 도발적 영상에 대한 간략 감상
Language Simp라는 폴리글롯 유튜버가 한
시간 전에 도발적인 영상을 하나 올렸다. 흥미로운 말거리가 몇 개 떠올라 감히 몇 마디 얹어 본다.
내 생각은 대략
학습 초기에 모든 분야에서의 정밀성에 집착하는 일은 의욕을 저해할 위험이 있으므로 조심해야겠으나,
학습 목표를 중고급으로 올려 갈수록 언어학의 기술(description)을 참고하는 일이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적어도 교수자는 언어학적으로 정밀한 지식을 최대한 알고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교수자가 아는 언어학적 지식을 현장에서 언제 얼만큼 학습자에게 명시적으로 전달할지는 별개의 문제고 또한 교수자 역량의 일부다.
와 같이 정리되어 가는 듯.
https://youtu.be/vQL3CJB72lM?si=ytLcNFoGSW2NqR5v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밝혀 두자면,
사실 이런 주제에 대해 자신있고 당당하게 말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은 언어학 전문가도 아니고, 폴리글롯도 아니고,
외국어 교육학 지식(현장과 실험 상황에서 보고된 데이터에 대한 지식 포함)이나 외국어 교육 현장의 직접 경험을 풍부히 갖춘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셋 다 아니니까 그냥 가볍게 읽어 주시길.)
외국어 교육/학습 시에 학습자가 언어학 지식(발음법, 문법에 대한 세밀한 기술 일체)을 의식하면서 배우도록 학습 내용에 명시하는 게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문제는 외국어 교육(학)계에서 적어도 몇십 년째 논쟁중인 주제(라고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짧은 생각이지만, 수많은 전문가들과 현장의 교육/학습자들이 여러 이론과 실행을 쌓아 왔음에도 논쟁이 진행중인 거라면, 아무래도 절충적인 입장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합리적이어 보인다.
우선, 표현이 과격하긴 하지만 Language Simp 영상의 골자에는 일리가 있다. 학습자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서, 딱히 언어학 지식을 배우려는 게 아니라 실용 외국어 구사만을 목적으로 하는 학습이라면 초기부터 언어학 지식(좀 넓은 의미로)에 집착하는 일은 방향을 잘못 잡는 걸 넘어서 학습 의욕에 꽤 방해가 될 수 있다.
언어학과 어학의 차이를 말할 때 자주 드는 비유인데, 자전거 타는 법을 처음 익히는 사람한테 자전거의 균형을 잡을 때 물리학적으로 힘을 어느 위치에 어느 방향으로 얼만큼 작용시켜야 하는지 설명하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요컨대 외국어 구사력과 언어학 지식의 양/깊이는 생각보다 서로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영상에서 외국어 구사가 과학이 아니라 기술(art)이라는 지적을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나도 다른 사람의 외국어 학습을 도울 때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해서 시행착오를 겪은 적이 많이 있다. 영어를 거의 처음 배우는 사람한테 명사구의 구조를 들이밀면서 시작했다든지...
학습자의 단계, 상황, 성격 등에 따라 그냥 일단 대강의 요령을 받아들이고 보는, 그냥 일단 틀리더라도 따라하고 보는 학습 자세가 매우 필요하고 바람직할 때가 많이 있다. 초기에 오류를 저지르더라도 학습이 진행되다 보면 딱히 언어학적인 피드백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교정될 수 있다.
이런 걸 원어민 신생아 방식의 외국어 학습법이라고 하여 매우 좋게 평가하는 일을 왕왕 본다. (일본식 영문법 운운하는 이야기가 따라붙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원어민 아기처럼 외국어를 배울 수 있는 환경에 놓이지 못한다. 보통은 노출량부터가 충분하지 않고, 산출 연습이나 피드백이 풍부하게 이루어지기도 어렵다.
그래서 보통의 한국인 외국어 학습자는 언어학자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언어학(문법, 발음법 등) 지식을 명시적으로 배운다.
특히나 학습 목적에 따라서, 이를테면 고급 단계의 문법을 반드시 정확하게 구사해야 하는 경우, 충분한 노출량, 산출과 피드백의 양이 보장되지 못하는 환경에 놓인 한국인 학습자가 오로지 '원어민 신생아 학습법'으로만, 즉 문법에 대한 명시적 지식이 전혀 없이 오로지 흉내내는 일로만 학습목표를 달성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토익 900이나 JLPT N1같은 성적이 있어도 여전히 외국인 티가 나게 하는, 외국어교육계 안팎의 언어학자들이 포착하고 정리해 둔 미묘한 차이들, 원어민들은 자연스럽게도 구사하지만 비원어민에게는 좀처럼 의식하기 힘든 그런 현상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발음에 대해서, 전에 말해보카 리뷰 글에서 말했듯이 이를테면 영어의 boat - bought를 구분할 줄 모르는 학습자가 레벨을 불문하고 꽤나 많은데, 학습자의 여유 여하에 따라서는 이런 걸 교정하는 데에 발음기호 정도는 쓰는 편이 좋을 것이다.
외국어 발음 학습과 언어학 지식의 관계에 대해, 평소 존경스럽게 생각하는 언어학 전공자 한 분을 인용해 보겠다.
이 분은 깊은 언어학 지식과 유창한 외국어 구사력을 모두 갖추고 계시고, 외국어 교육 분야에도 관심과 전문지식이 많으시다. (언어학자라고 해도 다 그런 건 아니다.)
평소 언어학 지식이 정확한 외국어 구사에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학습자의 상황에 따라 제시 순서나 방식이 조절될 필요가 있다는 점 또한 잘 알고 계신 분이다.
아래는 중국어와 일본어 발음 학습에 대해 그 분이 제시하신 의견이다. 특히 성조와 피치악센트에 대해서이다.
(카톡방에 구어적으로 올리신 글이기 때문에 가독성을 위해 원문의 내용을 왜곡하지 않을 선에서 별도 표시 없이 문장부호나 일부 어미를 수정하여 인용한다.)
"드라마 및 현실 중국어가 4성체계를 충실히 실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더라도,
1. 4성이 잘 살아있고 각 어휘성조의 혼란도 없지만 학습자에게 지각이 어렵다. (인토네이션과의 결합 등)
2. 4성이 잘 살아있지만, 각 어휘의 성조가 문어/구어에 다소 차이가 있다
3. 4성체계가 구어에서 다소 무너져있다
이런 가능성이 모두 상정 가능할 것 같은데,
전 1번의 가능성을 경시해선 안된다고 봅니다.
제 일본어 악센트 학습을 예로 생각하자면,
초기에는 '악센트 열심히 외웠는데 왤케 맞춰서 안하지? 악센트 외우는 의미가 있나?' 하는 의심을 품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악센트 어차피 다들 안지켜~' 하고 물을 뿌리기도하고...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와, 모어화자들은 어쩜 이렇게 논문에 쓰여 있는 그대로 따박따박 정확하게 처리하지? 정말 경이롭다.'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여러 악센트가 공존하는 단어도,
초기에는 '일케 병존하는 단어가 많은데 이거 뭐지?'
지금은 '와, 병존하는 단어 흥미롭다 (다 이유가있음)'
'왜 내가 외운거랑 다르지?' 생각하면서도 안 지킬 리는 없다는 무근거한 믿음과 신념으로 살아왔더니 모두 지키고있다는걸 알게 됨.
결국 중국어 성조도 제가 깊이 알지못해서 말하기 어렵지만 다 지키고 있을 것."
"제가 악센트학습하면서 지칠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준(?) 것으로는
일본어모어화자가, 발화를듣고 모어화자의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가장 큰 요소가 악센트(아마 인토네이션도 섞여있을듯)라는 내용의 연구논문들이었습니다
(다른 밑 순위로는 유성음, 장단 등등)
사실 모 대학의 J. Whang 교수님은 강의 중에 화자들이 자신의 방언과 타 방언을 구분하는 가장 쉽고 직접적인 요소가 피치라는 언급도 하신 바 있습니다."
- 외국어 발음 학습시에 꼭 원어민과 같은 발음 구사를 목표로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언어학습에 얼마만큼의 목표를 가지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겠습니다.
다만 악센트(및 여타 음운적 요소) 또한 언어구조의 중요한 일원이기때문에, 악센트 습득이 결여되어있다면 언어내 다른 구조또한 온전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모어화자의 언어수준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포기하고 버리는것도 충분히 할 만한 선택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일본어의 경우 [피치악센트 학습을 포기하면] 어휘구조에대한 부분이 상당히 결손되겠죠.
악센트(및 여타 음운적 요소)가 다른 언어구조에 관여하는 점이 아니라도, 그 자체로도 충분히 학습할 이유는 있다고 생각하긴하지만요
모어화자의 수준으로 실력을 끌어올릴 필요도, 여건도 안된다면, 무언가를 포기하는 선택을 하게될 텐데, 그 중 음운(조음, 악센트 등등)을 포기하는것은, 가령 조사의 쓰임차이의 학습을 포기하거나 시상체계를 익히기를 포기하는 것과 동등하게 비교할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사실 포기하는것 자체는 학습자의 목표나 성향에따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제가 종종 비교하는것이 있는데,
틀려도 적당히 알아듣고 몰라도 이해할 수 있지만, 모어화자에겐 깊이 뿌리박은 요소로서 유럽어의 명사 성 구분을 들수가 있겠는데요,
악센트 암기를 포기하나 성 암기를 포기하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으로 유럽어학습에서 명사 성 암기는 초기학습자에게 다소 과열돼있다고 생각합니다."
- 모어와 외국어 발음을 구분하는 능력이 유아기 이후에는 없어진다는 연구결과에 대해
"어떤 언어의 음성을 잘 처리할수있게 습득하는 과정은, 다른 언어의 음성을 처리하지 않는 걸 습득하는 과정이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 어린 시절에 (그리고 나이를 먹으며 꾸준히) 자신의 언어에서 구별하지 않는 소리를 구별하는 능력은 사용하지 않아 무뎌지게 되겠지만, 그런 생체적 능력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용하다 보니 좋은 말씀이 많아 예상했던 것보다 인용문의 분량이 다소 비대해졌지만, 그만큼 여러 독자께 공유하고 싶었다.
하여튼
- (특히 학습 초기에) 언어학 지식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 (Language Simp 영상은 이보다 훨씬 급진적이지만)
- 언어학 지식이 정확한 학습을 돕는다는, 나아가 정확한 학습에 필요하다는 의견
양쪽에 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어 보인다.
학습자로서는 수용할 만한 만큼은 의식적으로 학습하되 목전의 공부 목적에 안 맞는 언어학 지식에 파묻히는 일이 부담스럽다면 당장은 마음을 가볍게 먹고 원어민 흉내내기에 더 집중해도 될 거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의 지식을 배울 기회가 나중에도 있을 것이다.
+ 언어학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영상이 좀 불편하긴 한데(실은 메시지 외적인 면에서도), 어쨌든 골자는 좀 아프게 받아들일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남에게 아는체하며 간섭하려 들지 말라는 말...
++ 영상에서 언어학도들의 국제음성기호(IPA) 만능론이 외국어 학습자들을 망친다고 지적하는데, 사실 국제음성기호가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은 언어학도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일단 IPA 기호도 결국 연속적인 음성을 이산적으로 그룹화해서 만든 기호이니만큼 자소마다 음가가 완벽히 일관되게(범언어적으로) 배당되는 게 아니다.
(전문 음성학자들도 전사 과제 수행 시에 모어의 간섭을 상당히 받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설령 국제음성기호 알파벳 기호가 꽤 훌륭한 거라고 치더라도, 일반적인 음성기호 표기 관행상으로는 단어, 구, 문장 단위에 실리는 비분절요소(suprasegmental, 운율prosody)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어도 한국어는)
'국제음성기호만 다 외우면 무슨무슨 외국어 발음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라는 주장은
그다지 언어학을 아는 사람이 할 만한 주장이 아니다.
Language Simp가 이 부분을 지적하는 건 사실 일종의 허수아비 때리기랄까...
음성, 음운 바깥에서도 유사한 지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형태통사론을 비롯해서 언어학이 자연언어의 모습을 기술(describe)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완성되면 곧 강인공지능이 도래하겠지.)
(메타학문적, 언어학철학적 입장에 따라선 완벽한 기술이란 게 애초에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거라고 보기도 한다.)
언어학의 description 자체가 완벽한 게 아니니, 언어학을 좀 안다 해도 그것만으로 외국어를 원어민같이 구사하는 일이 곧장 가능해질 리가 없다.
그러나 제한된 노출량으로 인해 오리무중 학습을 이어나가는 비원어민 학습자에게 꽤 유용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할 만큼의 통찰은 언어학에 충분히 쌓여 있다.
원어민이 갖고 있는 신비한 직관을 관찰하고 뒤따라가며 그 내막을 캐내어 보고자 하는 언어학자,
원어민과 많은 교류를 나누다가 어느새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직관을 옮겨받는 어학 수련자,
둘은 분명 서로 매우 다르지만
언어학자의 통찰이 꽤 도움이 될 때도 분명 있을 테니
너무 미워하지만은 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