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오 김 Nov 16. 2024

‘여보’의 지칭어 용법에 관한 소고

규범주의와 기술주의를 생각함

‘호칭어’는 ‘아빠, 밥 줘!’에서의 ‘아빠’처럼 남을 직접 부르는 말이고,

‘지칭어’는 ‘이 옷은 아빠가 사 준 거야.’에서의 ‘아빠’처럼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말의 친족어(kinship terms, 가족관계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부르는 말) 중에는 위에 제시한 ‘아빠’의 예문과 같이 호칭어로도 쓰이고 지칭어로도 쓰이는 말들이 있다.


‘엄마’, ‘아빠’, ‘언니’, ‘누나’, ‘형’ 등을 표준국어대사전에 검색하면 모두 ‘(어떠어떠한 사람)을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이르는 말’이라 함은 지칭어로 쓰인다는 뜻이고 ‘부르는 말’이라 함은 호칭어로 쓰인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이 옷은 이 사 준 거야.’(지칭)도 자연스럽고 ‘, 밥 줘!’(호칭)도 자연스럽다.


그런데 부부간에 사용하는 ‘여보’라는 말은 (‘친족어’로 분류하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정이 좀 다르다.


적어도 우리 2030세대 직전까지 ‘여보’는 오로지 호칭어로만 쓰이는 말이었던 듯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여보’는 대명사나 명사가 아니라 감탄사로만 올라 있다.

‘여보’에 대해서는 위에 나열한 호칭어처럼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 아니라 오로지 ‘부르는 말’이라고만 적혀 있는 것에 주목하자.


한국에서 나고자란 나도 어려서부터 늘 호칭어로서의 ‘여보’만 들어 왔고, ‘여보’가 ‘여보는, 여보가, 여보를’처럼 지칭어로 사용되는 모습은 이십대 후반에 접어들기까지 거의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여보가’를 연세 20세기 한국어 말뭉치에 검색하니 4건의 용례가 나오는데, 전부 요즘과 같은 지칭어 용법이 아니라 메타언어적으로 ‘여보’라는 말을 가리키는 용례로 보인다.)


그러다 얼마 전, 결혼을 통해 나와 인척이 된 어느 젊은 부부의 대화에서 ‘여보’가 2인칭 대명사처럼 ‘여보가, 여보를’과 같은 형태로 사용되는 현상을 처음 목격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마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아내도 결혼 후에는 나와 말하며 나를 지칭할 때 ‘여보가, 여보를’과 같은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내가 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말하기 전에 잠깐 규범주의(prescriptivism)와 기술주의(descriptivism)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규범주의는 언어사용자에게 어떤 언어표현을 쓰지 말고 다른 언어표현만 쓰라고 명령(‘권고’)하는 입장이고, 기술주의는 언어사용자가 어떤 언어표현을 쓰든 그것을 기술(describe)할 뿐 개입하지 않는 입장이다.


나는 기술주의를 좋아하고 규범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언어학이 기술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지만, 나는 언어학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좀 더 반-규범주의적인 성향에 치우친 편인 것 같다.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대충 ‘과도한 반-규범주의는 아마추어 언어학도들의 특징’이라고 하던데, 뭐 내가 아마추어인 탓인가 보다.)


내가 규범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언어는 늘 변화해 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화해 갈 것인데, 그 과정에서 언어가 취해 왔고 취해 갈 무수한 형태 중에서 유독 특정한 하나의 형태만을 옳다/좋다/똑똑하다고 고집하는 것은 별 기준이 없는 태도이다. 말의 모습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의적인 것이므로 어떤 형식을 갖추든지 그 가치는 다 똑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의적이라는 것은, 언어가 특정한 의미를 특정한 형식으로만 나타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건 어휘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고 구문 단위에도 적용된다.)


사실 특정한 어형에 몰리는 그런 선호에는 무슨 논리적인 근거나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게 전혀 아니고, 오로지 그 선호형태가 규범주의자 본인에게 익숙하다는 주관적인 이유만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어떻게 포장하고 무슨 이유를 가져다 대든지 간에 자의적인 태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자의적이라는 것은, 수많은 어형들 중에 자기한테 익숙한 어형만을 좋은 것으로 고르는 데에 객관적이거나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인 기준이 없다는 뜻이다.)


(더러 ‘옳은 어원’을 기준으로 삼기도 하지만, 규범주의자가 활발히 사용하는 언어표현 중에는 선조들의 잘못된 어원인식으로 인해 생겨난 표현이 매우 많으므로 일관성이 있으려면 규범주의자는 그런 표현도 똑같이 싫어해야 마땅할 것인데, 선조의 재분석이 만들어낸 표현은 지금의 규범주의자에게 이미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 그런 주관적인 이유로 - 규범주의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보면 나보다 훨씬 언어학을 잘 아시는 분들이 쓰신 글에서도 규범주의적인 냄새가 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당황하기도 하고 깜냥에 맞지 않게 토론을 벌여 보고 싶은 충동도 느낀다. (그치만 실제로 그런 어리석은 짓을 벌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냥 완전히 납득은 되지 않지만 규범주의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만 하고 있다. 나보다 똑똑하신 분들이 그렇게 말하는데야 뭐... (내가 실제로 납득하는 규범주의의 몇 가지 효용에 대해서는 전에 브런치에 올린 글을 참조.)

(‘기술주의만을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규범이다’라는 말도 인상깊었다. 한편 ‘관용이 유일하게 관용하지 못하는 것은 무관용뿐’이라는 역설이 있다는 모양이다.)


규범주의에 관대한 언어학도 한 분이 하신 이야기 중에는 이런 게 있다. 대략 인용한다.

‘언어현상이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기 싫은 어형을 마주할 때 내가 느끼는 불쾌감은 실재한다. 내게는 그런 어형을 적어도 나와 대화할 때만큼은 피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 논리는 나도 납득을 했다.


(수정 추가 - 오해를 막기 위해 밝히자면 위에서 말하는 ‘불쾌감’이란 혐오 표현 같은 심각한 문제에 대한 정당한 불쾌감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이를테면 ‘건강하길 바래’에 대해 느끼는 시답잖은 불쾌감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여보가, 여보를’에 대해 말하자면, 내게는 그런 용법이 낯설다. 어느 쪽인지 굳이 말하자면 왠지 좋은 감정은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요샌 좀 다르다.)


그래서 한 번은 아내에게, 위와 같은 논리로 자기합리화를 하며, ‘여보’의 지칭어 용법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여보가, 여보를’과 같은 표현이 낯설어서 거부감이 든다. 가급적 안 써 주면 좋겠다.’


그 뒤로 아내는 한동안 그런 표현을 피하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다시 자주 사용하고 있다. 딱히 심하게 거슬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굳이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여보가, 여보를’을 계속 듣다 보니 언젠가부터 그냥 익숙하게 느껴지고 거부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읽다 보니 요 앞앞 문장에는 ‘언제부턴가’가 나오고 요 문장에는 ‘언젠가부터’가 나오는 게 재미있다.)


나는 여전히 ‘여보’를 호칭어로만 사용하고, 내가 스스로 ‘여보가, 여보를’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아내가 내게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카카오톡 언어학 오픈채팅방에는 이런 밈이 있다.


‘5읽정’

5번 읽으면 뭐든 정문이 된다.

라는 밈이다.

(문법성에 대한 원어민의 직관을 바탕으로 한 통사론 연구에 등장하는 예문을 가져다 원어민들에게 문법성 판단을 시켜 보면 같은 판단이 재현되지 않는 일이 많다고 한다.)


‘여보가’, ‘여보를’도 원래 나의 개인어에는 존재하지 않던(unattested의 의미에서 asterisk가 붙을 만했던) 말이지만, 이제 ‘5번 읽는’ 것도 아니고 수백 번을 듣고 나니 (적어도 passive하게는) 정문이 된 것이다.


뭐 나한테 ‘여보가’가 익숙하든 말든, 짐작건대 언어학을 좋아하는 사람의 상당수가 여전히 ‘여보’의 지칭어 용법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전에 어느 언어학 전공자를 인용하여 말했듯이, 문법 경찰을 만들어내는 성격요인(? 그게 무엇이든)은 언어학에 대한 관심을 만들어내는 성격요인과 매우 밀접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여보가’를 받아들여 달라고 누구를 설득하려고 쓰는 글은 아니다.


그냥 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다.


+ 제목을 ‘소고’로 끝내면 내 감각엔 왠지 좀 예스럽고 현학적인 느낌이 든다. 뭐 그냥 내 느낌이다. 그래서 좀 민망한데 그래도 내용과 잘 맞는 것 같아서 이대로 간다.


+ 검색하다 보니 부부간에 ‘자기야’를 사용하는 걸 나무라는 신문기사도 있다. 규범주의적인 지적이 있을 때 으레 그러듯이 여러 부부들은 누가 나무라거나 말거나 잘만 쓰고 있는 듯.


+ ‘여보’의 지칭어 용법에 대해서는 규범주의적으로 지적하는 글을 아직 못 봤다. 지적할 만한 사람이 ‘여보가’를 목격할 만큼 널리 퍼져 있지 않아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이 글은 유튜브의 어느 영상에 나온 젊은 부부의 대화에서 ‘여보가’를 보고서 생각이 나 쓰기 시작한 것이다.)


+ ‘여보’의 뜻을 如寶라고 푸는 글도 검색 중 발견했는데, 틀린 어원이지만 재미는 있다.



++ 이 글을 쓰면서 정치적 올바름에 바탕을 둔 용어 바꾸기에 대해서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건강하길 바래’를 보기 싫어하는 것과 혐오 표현을 보기 싫어하는 것은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이 글은 전적으로 전자만 생각하고 적은 것임을 밝힌다.

정치적 올바름에 바탕을 둔 용어 바꾸기에 대해서는 번역가 신견식 님이 최근 ‘폐경’의 대체어 ‘완경’에 대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참고가 된다. 댓글에 따르면 의료현장에서는 이미 ‘완경’으로 바꿔말하는 관행이 정착되어 있나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